감히 양심을 말할 수 있는 자

감히 양심을 말할 수 있는 자

오랜만에 서울에 갔다가 아침 출근길 전철을 탔다. 몇 년만이지 모르겠지만, 전철 안의 풍경은 정말 낯설었다. 전철 소음을 제외한다면 전철 안은 적막했다. 사람들은 빼곡히 들어차 있었지만, 그 누구도 깨어있지 않았다. 태반은 졸고 있었고, 눈을 뜬 사람들조차도 활기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들 피곤에 절어 있었고, 얼굴은 잿빛이었다.

전체 국민의 절반이 모여 산다는 서울의 아침은 그렇게 잿빛이었다. 출근 시간이 지난 한낮에도 강남의 거리는 차들이 밀려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으로 공기는 매캐했다. 강남의 어느 비싼 아파트 단지는 출근시간에 주차장을 빠져 나가는데에만 30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아파트 값이 떨어질까봐 쉬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아파트를 뜯어먹고 사는 족속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서울의 경쟁력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려고 했던 이유는 우리나라 국토의 균형 발전을 추구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잿빛으로 죽어가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살리자는 뜻도 있었다. 물론 서울의 아파트를 뜯어먹고 사는 족속들에게 이런 노무현의 진심이 먹혀들어갈 리가 없었다. 노무현의 행정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다. 헌재의 노회한 재판관들은 조선시대 경국대전을 들먹이며 수도 이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어처구니 없어 보였지만, 그들도 역시 아파트를 뜯어먹고 사는 족속이었으므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행정수도는 행정복합도시(세종시)로 강등되었지만, 이조차도 서울의 아파트를 뜯어먹고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 당시 서울시장으로 있었던 이명박은 행정도시 건설을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막고 싶다고 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국회에서 합의한 ‘행정중심 복합도시’안을 24일 “군대라도 동원해 막고 싶다”고 말한 데 이어 25일에는 “행정도시 건설은 수도분할로 국가 정체성과 통치의 근본을 쪼개 수도이전보다 더 나쁘다”고 맹비난했다.

[이명박 “군대 동원해…” 김현미 “쿠데타 수제자…”, 한겨레]

이명박은 2007년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 말을 180도 바꾼다. 그에게 있어서 말바꾸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도 더 쉬운 일이고 더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다.

“일부 도민들께서는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행복도시를 중단할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여권(민주당)에서 이명박이 되면 행복도시는 없어진다고 저를 모략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말씀 드릴 것은 이미 (행정도시를 추진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저는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킵니다.

[이명박 “세종시 안한다는건 모략,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오마이뉴스]

이명박에게 있어 말이나 약속은 크게 의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2년이 가까워오는 동안 세종시 건설은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다.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막고 싶었던 것이였기에 이를 추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제 언론들은 이명박의 양심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7월 한나라당 의원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양심상 그대로 추진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당시 한 참석자가 전했다.

[이대통령 ‘세종시 원안 전면수정’ 정면돌파 착수, 한겨레]

이제는 양심상 할 수 없단다.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막고 싶었던 세종시이니 그리 얘기하는 것이 더 정직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양심을 가진 자에게 세종시를 원안대로 건설하라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정권을 교체하지 않고는 행정도시는 건설될 수 없다. 행정도시와 같은 어정쩡한 타협안이 아니라 원래 노무현이 하고자했던 “수도 이전”을 하려면 정권은 교체되어야 한다.

이명박의 말 중에서 몇 안되는 참말을 꼽으라면 다음과 같은 말을 들 수 있겠다.

선거 때 무슨 얘기를 못하나. 그렇지 않은가. 표가 나온다면 뭐든 얘기하는 것 아닌가. 세계 어느 나라든지.”

[MB 정세변화 못읽거나, 외면하거나, 한겨레]

그는 표가 나온다면 뭐든지 얘기하고 약속하는 자이다. 그런 자에게 세종시를 원안대로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양심을 들먹일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아파트를 뜯어먹고 사는 족속들이 저렇게 건재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그리 길게 가지는 못할 것이다. 서울에 사람이 더 모여들수록 서울은 더 살기 힘든 지옥이 되어버릴 것이고, 그들의 삶의 질은 사람이 모여들면 들수록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란 한편으로는 영리해 보여도 워낙 탐욕스러워서 끝을 보기 전에는 여간해서 포기하지 못한다.

행정수도 이전과 세종시 건설에 관한 이 지리멸렬한 논란을 통해 탐욕의 끝은 결국 공멸임을 깨닫게 되길 바란다. 그것만이 이명박 정권이 남긴 유일한 교훈이 될 것이다.

덧. 이명박의 어록이 잘 정리되어 있는 곳을 발견. OpenChronicle: 이명박 어록

6 thoughts on “감히 양심을 말할 수 있는 자

  1. 날씨가 춥습니다. 잘 계시는지요.

    전 충주로 내려온지 이제 3년째 입니다. 서울을 가면 정신이 없습니다. 무엇 보다도 서울은 죽은 도시라는 느낌이 많습니다. 인천에서 충주로 내려올 때 울며 가기 싫다고 했던 아이 엄마도 이제는 충주가 더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방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도 없고, 일거리도 없고… 여기에 대형마트때문에 문을 닫는 집이 속축하고…

    아무튼 사설이 길었습니다. 이명박이 무서운 이유는 “횡설수설하는 놈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전 이명박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다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 말을 횡설수설하다 보니 자연스레 거짓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1. 충주에 사시면 저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계시네요. 전 고향이 충청도고 20여년만에 다시 고향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지방은 사람이 점점 줄어들긴 한데, 저는 원체 사람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오히려 더 넉넉하게 살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명박이 상황에 따라 횡설수설하긴 하지요. 그러나 그 자는 의도적으로 그리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잘 합니다.

      날씨 추워지는데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 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소요유님이 서울에서 살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4대강은 비효율성 따져볼 필요없고, 세종시는 따져야 하고… 도로건설은 교통수요 조사해야지만 4대강 자전거 도로는 만들어주기만 하면 자전거 수요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MB정부의 이중잣대는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말씀대로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요.

    암울한 이 시대, 아무쪼록 건강이라도 챙겨아죠. 건강하세요.

    1. 저도 예전에는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20여년만에 고향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가끔 일이 있어서 서울에 오긴 하지만, 이제 서울은 정말 견디기 힘든 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CeeKay 님도 건강하세요.

  3.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훌륭하신 분들은 다 지역에 사시는군요. ^^
    전 상당히 훌륭합니다만 아 이 미친 서울에 있네요.
    이명박은 곧 제동이 걸릴 겁니다. 제동이 때문이죠.

    1. 김제동이 이름처럼 제동을 걸어준다면 정말 고마운 일이겠지요. ^^
      서울에도 올디제 님처럼 훌륭한 분들이 있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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