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 창의력에 경의를 표하며

법원의 창의력에 경의를 표하며

오래된 얘기지만, 아버지는 내가 판검사가 되길 원하셨다. 그 시대 분들의 공통된 염원이기도 했지만, 아들들이 공부 꽤나 하는 것 같으면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를 봐서 판검사가 되길 바라신 분들이 많았다. 그것이 그 시절 신분 상승과 출세의 지름길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아버지의 그런 바람을 거슬렀다. 사회 물정을 모르던 어린 나로서는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여 잘잘못을 가린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면에서 결벽증이 있었다. 더구다나 그 많은 법조문들을 외우고, 그 법으로 다른 이들의 행위를 재단하는 것이 재미없게 보였으며, 고리타분해 보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 법조인에 대한 나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법조인들은 절대 고리타분하지도 않고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내가 느낀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보여준 상상력과 창의력이 우리 사회 특권층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만 발휘된다는 사실이 참담할 뿐이었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든지 “사회의 정의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라든지 하는 퀘퀘묵은 언명들이 쓰레기통에 쳐박힌지는 너무나 오래되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명판결은 모든 성공한 범죄를 처벌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법치주의를 유린했지만 그들은 희희낙낙할 뿐이었다. “서울은 경국대전에 수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수도를 옮길려면 헌법을 고쳐야 한다”고 판결한 그들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만 있을 뿐이었다. 수백억의 회사돈을 횡령하고 회사에 수천억의 손실을 입혀 유죄가 선고되었지만 나라의 경제를 생각해서 사회봉사 명령을 내리는 그들의 애국심이 눈물겨울 뿐이었다.

법원이 재벌의 “유전무죄”를 위해 발휘한 창의력에 대해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법원을 빠져나오면서 웃음을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감히 재벌을 처벌하려 하다니, 재벌은 법 위에 군림하고 있는데 말이야, 안 그래?

나 같은 일반인들은 탈세나 배임, 횡령 같은 경제 범죄를 더욱 확실하게 처벌해야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상식적인 생각을 하지만, 우리의 자랑스런 판사님들은 나라의 경제를 위해서 재벌 그룹 회장들의 그런 범죄는 눈감아 주거나 눈감아 줄 수 없을 때는 강연이나 신문 기고 같은 엄청난 사회 봉사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상상력인가.

(물론 될 수도 없었겠지만) 내가 법조인의 길을 택하지 않은 건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다. 저렇게 소설가를 능가하는 창의력으로 법을 만들고 유린하는 그들과 같은 법조인이 되었다면 너무나 부끄러워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상상력이라면 아예 젬병이 아니든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한민국의 판검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유전무죄”의 깃발 아래 최고의 상상력을 발휘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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