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을수록 바라는 것은

17세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수녀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Lord, thou knowest better than I know myself that I am growing older and will some day be old. Keep me from the fatal habit of thinking I must say something on every subject and on every occasion. Release me from craving to straighten out everybody’s affairs. Make me thoughtful but not moody; helpful but not bossy. With my vast store of wisdom it seems a pity not to use it all, but Thou knowest Lord, that I want a few friends at the end.

Keep my mind free from the recital of endless details; give me wings to get to the point. Seal my lips on my aches and pains. They are increasing and love of rehearsing them is becoming sweeter as the years go by. I dare not ask for grace enough to enjoy the tales of other’s pains, but help me to endure them with patience. I dare not ask for improved memory, but for a growing humility and a lessening cocksureness when my memory seems to clash with the memories of others. Teach me the glorious lesson that occasionally I may be mistaken.

Keep me reasonably sweet; I do not want to be a saint-some of them are so hard to live with-but a sour old person is one of the crowning works of the Devil. Give me the ability to see good things in unexpected places and talents in unexpected people. And, give me, O Lord, the grace to tell them so. Amen.

<Seventeenth Century Nun’s Prayer>

나이 먹을수록 바라는 것은 겸손하고, 사려깊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따뜻하고, 너그럽고, 되도록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말수를 줄이고, 참견하지 않고, 군림하지 않고, 유연하게 타인을 받아들이고 싶다.

욕망을 줄이고, 삶을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꾸려나가길 기도한다.

예수의 기도

흔히 기독교에서 “주님의 기도”로 알려져 있는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이다.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13절에 나와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우리가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들을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소서.

Our Father in heaven, may your name be kept holy. May your Kingdom come soon. May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oday the food we need, and forgive us our sins, as we have forgiven those who sin against us. And don’t let us yield to temptation, but rescue us from the evil one.

<마태복음 6:9-13>

법(法)의 정의

법(또는 법률)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 보면, 법이란 사회 질서 유지와 정의 실현을 위해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강제하는 일종의 사회 규범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법은 이런 사전적 정의와는 거리가 있다.

아일랜드의 극작가인 찰스 맥클린(Charles Macklin)은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법이란 속임수(또는 말장난)의 과학이다. 당신의 면전에서는 웃으면서 당신의 주머니를 뒤진다.

The law is a sort of hocus-pocus science, that smiles in your face while it picks your pocket.

이 말은 농담 같지만, 법의 본질을 비교적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현실에서의 법을 다시 정의해 보면, “법이란 법조인들이 (자신들을 포함한)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제정하고, 해석하고, 집행하는 강제력이 동원된 술책”이다. 따라서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피지배계급을 기만하는 무의미한 당위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조인이다. 법조인들은 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전문가 집단을 일컫는데, 여기에는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이 포함된다. 법을 만드는 입법권은 국회의원에게 있지만, 국회의원들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집단이 법조인들이다. 또한,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의 수장이나 장관들도 법조인이 많으며, 사법부는 100% 법조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민주주의는 삼권분립을 기초로 서로의 권력을 견제한다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 대개 법은 법조인들을 주축으로 제정되고, 법조인들이 법을 해석하여 위법 여부를 판단하며, 법조인들이 지휘하는 행정부가 집행을 한다. 따라서 삼권분립의 원리라는 것은 법조인에 의한, 법조인을 위한, 법조인의 정치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검사는 무소불휘의 막강한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사권과 기소권이다. 아무리 엄청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검사가 기소하지 않으면 죄가 아니고 처벌되지 않는다. 설령, 검사가 기소하였다 하더라도 판사가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무죄를 내리면 처벌할 수 없다. 반대의 경우,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검사가 기소를 하고 판사가 법을 어겼다고 판결하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박정희 정권 하에서의 인혁당 사건은 독재 정권과 결탁한 법조인들이 합법을 가장한 살인을 저지른 경우이다.

문제는 이런 법조인들의 도덕성이나 가치 판단이 일반 국민들의 평균적인 수준보다 전혀 높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간혹가다 존경을 받을만한 법조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법조인들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다. 대부분 사법고시를 합격한다든지,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을 통과하여 법조인이 되는데, 이들 대부분은 기존에 형성된 질서를 수호하고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한다. 따라서 대개의 법조인들은 보수적이거나 수구적이다.

결국 이런 시스템 하에서 일반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착하고 선한 법조인을 만나길 기도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좋은 운을 타고 나야 일어나는 일이고, 대부분은 그들의 처분만을 묵묵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이 법조인이 되길 바라셨지만, 속세의 이치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아들이 그것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훗날, 그 선택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닫고 그 아들은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또 하나의 증거

죽음에 대해 선지자(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이븐 알렉산더 등)들이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수호천사>를 쓴 로나 번도 죽음에 관한 진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우리 대부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의 순간에 고통과 불편함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두려움도 불안도 없다. 당신은 자유롭게 간다. 죽음은 탄생과 같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난다. 당신은 실제로 죽지 않는다. 당신이 떠나는 것은 단지 이 물질적인 껍질뿐이다. 마치 텅 빈 계랸 껍질처럼. <중략>

많은 시간 우리는 정의와 복수를 찾는다. 그런 우리가 이해하기란 매우 힘들겠지만, 죽음 이후 신 앞에 서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너무도 큰 사랑은 물론 신과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을 느껴 그곳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매우 깊이 그리고 진정한 방식으로 용서를 구한다. 인간 조건의 연약함에서 기인해 이 지구에서 행한 모든 것에 대한 용서를. 그러면 신은 무한한 자비로 자신의 자녀들을 용서한다. 우리 모두는 신의 현존 안에 있는 아이들일 뿐이다.

당신의 영혼은 완전하다. 당신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그 영혼은 우주를 통과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장소들로 여행한다. 얼마나 황홀한 기분일지 당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달리 표현할 방법은 없다. 당신 자신이 그것을 경험하기 전에는 말해 줄 방법도 없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로나 번, 수호천사, pp. 286-287>

이런 증거들이 계속 쌓이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공감과 울림을 주는 말들

1. 채현국 선생이 며칠 전 진주에서 강연을 하셨다. 그는 “시시한 삶만이 확실하게 행복한 삶“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강연을 마쳤다.

“소박한 마음만 회복하면 된다, 삶 자체는 기적이다, 독을 어떻게 빼어내느냐는 문제다. 삶의 기적이 우리로 하여금 발효가 되고, 아름답고 좋은 포도주가 되게 할 것이다. 모른다는 생각부터 하면 된다. 모르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것이다. 소박한 마음을 회복하면 훌륭한 삶이 된다. 자기 자신을 예쁘게 봐주는 것부터 하면 된다.”

<“노인 봐주지 말라는 말은 젊은이들 속지 말라는 뜻”, 오마이뉴스>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는 우리 아이들이 한 번쯤 되새겨볼 귀한 말씀이다. 리더보다는 확실히 평범한 민초가 훨씬 행복하다. 물론, 기회주의자인 리더가 되겠다면 또 다른 얘기지만 말이다.

2. 호주 아시안컵 결승전을 마치고 슈틸리케 감독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다수 선수들이 학교에서 축구를 배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선수들에게 승리하는 법을 가르칠 뿐 축구를 즐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슈틸리케 일문일답 “우리 선수들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축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 전체의 문제다. 우리나라 교육은 언제부터인가 본질을 가르치지 않고 항상 (짧은 기간 안에)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만을 가르친다. 어떻게 하면 문제를 잘 풀고, 어떻게 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우리나라 교육은 어떻게 하든 다른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잡고 출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실 이것은 교육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민망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육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정글 시스템 안에서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이 꿈을 잃고 삶의 목표도 없이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와 부모들이 작당하여 아이들을 인질로 만든 추악하고 불행한 비극이고, 소수 몇몇을 제외하고 거의 대다수 국민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이 땅의 기성세대들은 슈틸리케 감독의 일침을 깊이 새겨야할 것이다.

수호천사

로나 번이 쓴 <수호천사>에는 천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간단한 방법이 나온다.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마다 나의 천사들이 나와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이 간단한 요청이 천사들에게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수호천사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이런 기도를 해 보자. 그리하면 누구든지 천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리더의 역할

호주 아시안컵에 출전하고 있는 축구 국가대표팀이 결승에 올랐다. 지난 해 여름 브라질 월드컵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국민들도 놀라고 선수들도 놀라고 있다. 단지 달라진 것이라고는 대표팀 감독이 홍명보에서 슈틸리케로 바뀐 것인데, 슈틸리케가 대표팀을 맡은 것은 불과 몇 달 되지 않는다. 현대 축구는 점점 감독의 스포츠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도 얘기했듯이, 리더의 기본은 조직 구성원과 신뢰를 쌓는 것이고 그러기 위한 가장 원초적 조건은 기회주의자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조건을 만족한, 즉 기회주의자가 아닌 리더가 성공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리더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훌륭하고 유능한 구성원을 선발하는 것이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라는 경영 베스트셀러를 쓴 짐 콜린스(Jim Collins)에 따르면, 위대한 기업의 리더들이 하는 일은 직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중용하는 것이다.

축구 감독이 운동장에서 직접 공을 차지는 않는다. 기업의 사장이 실무를 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역할 중 핵심은 가장 적합하고 유능한 사람을 선발하여 일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그 조직은 저절로 굴러가게 되어 있고,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리더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리더가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들로 팀을 구성했다면 이미 80%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리더가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동기 부여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는 부차적인 일이다. 그것은 훌륭한 팀원들이 알아서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20%는 팀원들이 자기의 기량과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장(場)을 마련하고 외부의 압력이나 간섭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이다.

슈틸리케가 대표팀을 맡은지 다섯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리더로서 성공하고 있다. 학연, 지연이 아닌 단지 축구 실력으로 대표 선수들을 선발하고 있으며, 그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런 팀에서 선수들은 스스로 동기 부여하고 최선을 다해 훈련과 경기에 임한다. 팀의 분위기도 점점 끈끈해지고 있다.

축구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운영도 마찬가지다. 현 정부가 성공할 수 없는 이유는 대통령의 인사와 용인술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대로된 인사를 할 수 없는 리더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의 국민들은 훌륭한 리더를 선택하지 못했고, 지금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는 국민들이 많다는 것이다.

무지도 지나치면 죄가 된다.

아이폰은 언제 바꾸어야 하나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물건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거의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미덕이고, 가장 중요한 정책은 경제성장이다.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소비하고, 버리고, 또 만들고, 또 소비하고, 또 버리고, 이런 행위를 다람쥐 챗바퀴 돌듯 무한정 반복한다.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도덕성도, 환경에 대한 고려도 발붙일 곳이 없다. 그것이 필요에 따른 적절한 소비인지, 아니면 불필요한 낭비인지 따질 이유도 여유도 없다.

기술이 발전하고, 새로운 정보기술제품들이 매일 시장에 나온다. 스마트폰이라 불리는 휴대전화도 거의 매일 새로운 모델들이 출시된다.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을 소비자들을 꼬드겨 멀쩡한 휴대폰을 새것으로 바꾸게 만든다. 각종 광고와 마케팅 기법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많은 소비자들은 그것이 조삼모사임을 알고도 새로운 기기의 현란함에 빠져들고 만다.

2010년부터 아이폰4를 사용했다. 이 기기는 스티브 잡스의 역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잘 만들어진 전화기다. 5년을 넘게 사용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애플은 2010년 아이폰4를 출시한 이후, 거의 1년에 하나씩 새로운 아이폰 모델을 내놓았지만, 새로운 모델로 갈아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난 해, 애플이 iOS8을 내놓기 전까지는 말이다.

iOS8은 아이폰4를 지원하지 않았다. 아이폰4의 하드웨어 사양이 새로운 iOS를 제대로 구동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 해 가을부터 아이폰6로 갈아탈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이폰4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때마침 단통법이라 불리는 세상에 듣도보도 못한 흉악한 법 때문에 아이폰6로 넘어가기를 단념했다.

새해 들어 딸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휴대전화가 필요하다고 하여, 단념한 아이폰6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용하던 아이폰4를 딸아이에게 넘기고, 단통법에도 불구하고 아이폰6를 구입하기로 했다. 딸아이가 아이폰4를 땅바닥에 집어던지지 않는 한, 아마 앞으로도 몇 년은 더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폰6를 받은지 2주쯤 된다. 기존 아이폰4에 비해 달라진 것은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는 것, 화면이 많이 커지고 해상도도 높아졌는데 그에 따라 전화기도 커졌다는 것, 터치ID로 지문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클릭 한 번으로 기존 아이폰4에 있던 모든 데이터와 세팅을 저장하여 고스란히 아이폰6로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이폰6는 애플이 iOS를 업데이트해 주는 한 계속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혁신이 나오지 않는 한 10년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이렇게 반자본주의적으로 소비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충분한 것은 충분한 것이다.

아이폰6

품위있는 노인의 지혜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품위있는 노인(뿐만 아니라 사람)을 찾기 쉽지 않은 시대에, 채현국 선생은 그 존재만으로도 빛을 발한다. 채현국 선생이 1년마다 인터뷰 형식으로 전하는 말씀은 품위있는 노인의 잠언이라 할만하다.

“농경사회에는 나이 먹을수록 지혜로워지는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지혜보다는 노욕의 덩어리가 될 염려가 더 크다는 겁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욕망이 커봤자 뻔한 욕망밖에 안 되거든. 지가 날 수도 없고 기차 탈 수도 없고 자동차도 못 타니까 그랬는지 확실히 농경사회의 노인네는 경험이 중요했지. 지금은 경험이 다 고정관념이고 경험이 다 틀린 시대입니다. 먼저 안 건 전부 오류가 되는 시대입니다. 정보도 지식도 먼저 것은 다 틀리게 되죠. 이게 작동을 해서 그런지 나이 먹은 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하고 점점 더 욕구만 남는 노욕 덩어리가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들, 점점 더 노욕 덩어리 되어가”, 오마이뉴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이후, 채현국 선생은 또 한 번의 죽비와 같은 말씀으로 노욕으로 눈 먼 사회를 질타하신다.

선생의 건강과 무탈을 기도한다.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그 말씀으로 세상을 일깨워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틀리다는 말도 없다. 다른 게 있을 뿐이다. 정답은 없다. 해답이 있을 뿐이다.”

“죽음이 불안과 공포라는데, 사는 것 자체가 불안과 공포 아닌가? 죽음이란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쉰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는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 표현의 자유는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나라치고 제대로된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없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가해자들이 여전히 강자이거나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 그들이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는 어느 정도 제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면 안 된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허락된 독일이지만, 그것은 금기이다.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면 안 된다. 나치가 유대인에 대해 가해자였듯, 이스라엘의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에 대해 가해자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인들도 흑인들에 대해 제한 없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 안 된다. 그들은 아직도 갚아야할 빚이 적지 않다.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기본 권리라 하더라도,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방의 언론들은 이슬람교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현대 역사를 살펴 보면,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은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 대해 가해자들이였다. (이러한 이유로 알카이다의 테러가 정당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피해자의 입장을 배려해야 한다.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먼저 주장하기 전에, 그 표현으로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결코 자기 검열이 아닌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이다.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역사적) 피해자들과 사회의 약자들이다. 이들은 지배계급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도 된다. 그들의 표현들이 해학이 넘치고 정곡을 찌를 때, 그것은 조롱도 모욕도 아닌 풍자가 된다. 따라서 풍자는 피해자들과 약자들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