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노가 사라져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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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친노가 사라져야 하는 이유는 노무현이 죽어야 하는 이유와 같다. 재벌, 새누리당, 검찰, 언론 등으로 이루어진 지배계급에게 해방 이후 노무현만큼 불편하고 두려운 존재가 없었다. 감히 대학도 안 나온 고졸 출신 변호사 주제에 상식과 원칙이란 이름으로 지배계급의 권력을 위협하다니, 그리고 대통령이 되다니.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무현을 능지처참하고 삼족을 멸하리라. 그들은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이다.

노무현은 죽었지만, 여전히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친노와 노빠라는 이름으로 노무현 정신을 얘기했다. 노무현의 죽음은 운명처럼 문재인을 정치로 이끌었고, 문재인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친노의 중심이 되었다. 이 나라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몹시도 불편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만약 문재인이 정권이라도 잡게 되면…, 아 그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야당의 기회주의자들에게도 문재인과 친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이 권력을 쥐게 되면, 아 궁물은 어쩌란 말이냐. 문재인이 당대표가 되자, 하루가 멀다 하고 친노패권주의, 호남홀대론을 외치며 그를 끌어내리려 했다. 예전 후단협이 노무현에게 했던 것처럼, 예전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을 탄핵했던 것처럼. 그것이 예의치 않자, 그들은 당을 박차고 나갔다. 그 중심에 안철수가 있었다.

조중동과 종편에서 문재인과 친노는 북한의 김정은보다 더 흉악한 족속들로 그려진다. 그들이 얘기하는 종북이 친노고, 그들이 얘기하는 빨갱이가 친노고, 그들이 얘기하는 테러집단이 바로 친노다. 왜? 두려우니까. 지배계급에게 유일하게 위협이 되는 세력이니까.

친노와 노빠가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자발적이라는 점이다. 누가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고, 돈이나 궁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노무현 정신으로 이 사회를 바꾸어 보겠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서운 거다. 이것은 돈과 권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지배계급은 친노세력을 저주한다.

재벌, 새누리,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이 나라 지배권력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친노와 노빠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은 악마이고, 친노는 사라져야 한다. 노무현이 죽은 것처럼 친노도, 노빠도, 문재인도 사라져야 한다. 그들을 없애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정말 정의와 평화와 민주가 젖과 꿀처럼 흐르는 나라가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반기문, 아니 안철수라도 데려 와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야 한다.

오늘도 문재인과 친노에 대한 그들의 저주는 그렇게 계속된다.

democracy

죽음 너머의 세계

죽음을 체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은 대개 유사하고 일관되다. 임마뉴엘 스베덴보리, 이븐 알렉산더 등 이름난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소위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으로 불리는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그들의 증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이 공중에 떠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잠시 후 그는 암흑, 혹은 터널 속을 굉장한 속도로 지나간다. 그는 눈부신 빛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최근에 죽은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는다. 보통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리고 지상에서 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광경 – 구릉진 목장, 꽃이 만발한 계곡, 반짝이는 시냇물 등 – 을 본다. 이 빛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는 아무런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으며 밀려오는 환희와 사랑과 평화의 느낌에 휩싸인다. 그는 무한한 자비의 느낌을 방사하는 ‘빛의 존재(혹은 존재들)’를 만난다. 그 존재는 그에게 자신의 지난 삶이 파노라마처럼 다시 펼쳐지는 ‘인생복습(life review)’을 경험하게 한다. 그는 이 광대한 현실의 경험에 압도되어 그곳에 한없이 머무르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존재는 그에게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다시 육체로 들어가 지상의 삶으로 돌아가게 한다.

<마이클 탤보트, 홀로그램 우주, p. 337-338>

사람들이 자기의 몸이 “참나’가 아님을 깨닫게 되면 이러한 증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그리고 알고 있는 세계는 진리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열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살다 보면 점점 더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천지간에는 자네의 지혜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있다네.

<세익스피어, 햄릿, 1막5장>

김성근, 김종인, 그리고 어버이연합

김성근. 올해 나이 75세. 한화 이글스 감독. 한때 야구의 신(야신)으로 불리며 한국 프로야구의 상징으로 떠오른 인물. 김성근 식 리더십으로 야구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리더들의 본보기가 된 사람. 지난 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만년 꼴찌 한화를 프로야구 최고 인기구단으로 만들어 놓았으나, 올 들어 김성근의 마법은 유통기한이 다 된 듯하다.

한화 이글스의 현재 성적은 3승 15패, 승률 1할5푼8리. 넥센의 신인 투수 신재영이 벌써 4승을 했으니, 한화 구단은 신재영보다도 적게 승리했다. 넥센 신재영의 연봉은 고작 2700만원.

김성근의 리더십은 특타와 야간 펑고로 대표되는 (될 때까지) “하면 된다”의 새마을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송창식, 권혁 등의 투수들을 혹사시킨다는 평을 받으면서도 (단기간의) 성과를 위해 무리한 선수 교체를 감행한다. 김성근 식 야구는 단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화 이글스의 미래와 선수들의 장래를 보았을 때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한화 선수들은 가장 많은 훈련을 하지만, 가장 많은 실책을 범한다. 선수들의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고, 감독과의 소통이 어려우며, 시키는 대로만 하는 장기판의 말이 되었다. 급기야는 “김성근 감독과 야구하기 싫다”며 트레이딩을 거부하는 선수들이 나왔다. 지난 해, 김성근 감독을 연호하던 팬들은 “감독님, 나가주세요”라는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시위를 한다. 이쯤 되면 김성근 식 리더십은 끝난 것이 아닐까.

김종인. 올해 나이 77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확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경제민주화의 상징처럼 군림하는 사람. 처음 더민주에 올 때, 비례대표에 전혀 뜻이 없다 얘기했으면서도, 본인을 셀프공천하여 국민들의 빈축을 산 인물. 정청래, 이해찬 등을 공천탈락시키면서 정무적 판단이라고 얼버무린 노회한 정치인이다.

그는 더민주에 남아 있는 기회주의자들을 주저앉히는데는 성공했으나, 젊고 진보적인 유권자들을 끌어모으는데는 실패했다. 총선이 끝나고 그의 주변에서 당대표 추대론이나 전당대회 연기론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는 계속 더민주에서 제왕적 당대표를 노리는 것 같다.

김종인도 소통에 문제가 있으며, 고집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경제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노욕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버이연합. 어버이라는 고귀한 말을 욕보이는 자칭 어르신으로 구성된 극우단체. 박정희와 박근혜를 숭배하며 전경련의 지원과 청와대의 지시로 끊임없이 관제데모를 주도하는 사람들.

“하루 2만원이 어디냐”며 탈북할아버지들은 어버이연합 주도로 관제데모에 나선다. 생활고에 허덕이며 극우집회에 동원되어야 하는 그들의 처지가 불쌍하다. 칠십 넘게 세상을 살았으나 여전히 지혜와는 거리가 멀고 노욕덩어리가 되어 가는 사람들. 부끄러움도 모르고 무지가 죄가 될 수 있음을 모르는 어버이연합 노인들.

김성근, 김종인, 어버이연합 노인들께 드리고 싶은 말, 떠날 때를 아는 노인만이 지혜롭고 존경받는다는 것.

마음은 뇌의 산물인가

오늘날 많은 신경과학자(혹은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마음 또는 의식이 뇌의 활동으로 생겨난다고 믿고 있다. 뉴런과 시냅스의 패턴을 연구하면, 첨단 장비로 뇌 영상을 찍어 보면, 마음이나 의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수 있을까?

지난 번에 얘기했듯이, 과학자들은 생명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은 마음이나 의식에 대해서도 정의하지 못한다. 마음이나 의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그것이 뇌 활동의 산물인지는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

물리요법가이자 UCLA 신체운동학 교수였던 발레리 헌트(Valerie Hunt)는 인간의 두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두뇌를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중요한 요소라고 너무 지나치게 과대평가해왔다고 생각한다. 두뇌는 단지 정말 훌륭한 컴퓨터일 뿐이다. 하지만 창조성, 상상력, 영성 등의 모든 것과 관계되는 마음의 측면들을 두뇌 속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음은 두뇌가 아니다. 마음은 바로 이 에너지 장 속에 있다.”

<마이클 탤보트, 홀로그램 우주, 정신세계사, p. 273>

아무리 좋은 현미경으로 신을 볼 수 없듯이, 인간의 과학으로 뇌를 아무리 연구해도 마음이나 의식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몸이 ‘참나’가 아니 듯이, 우리의 뇌가 마음이나 의식은 아니다.

이인제, 불사조는 어떻게 사라지는가

이인제는 충청이 낳은 걸출한 기회주의자다. 지금까지 13번 당적을 옮기면서 6번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2번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13번의 당적 변경은 아마 기네스북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는 가히 김종필의 뒤를 이을만한 위대한 생존능력을 지녔다.

이인제는 숱한 당적 변경에도 총선에 출마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당선이 되어 인터넷 상에서는 불사조 피닉제(피닉스+이인제)로 통한다. 심지어 무소속으로 출마할 때도 당선되었다. 그런 이인제가 이번 20대 총선에서 더민주 김종민 후보와의 대결에서 져 1천여표 차이로 아깝게 낙선한다. 그들의 대결은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전과 같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혈투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인제가 보여준 어마어마한 생존능력을 비하하거나 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10년은 사실 이인제라는 인물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김대중, 노무현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정치가들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성공은 이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이인제가 국민신당을 만들어 대선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알려진 위대한 인물이었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 김종필과 DJP 연합까지 했지만, 이인제가 출마하여 신한국당의 지지를 갈라 놓지 않았다면, 15대 대선의 승자는 신한국당의 이회창이었다.

당시 신한국당(지금의 새누리당)이 IMF 외환 위기 아니라 그 할애비를 불러왔다고 해도 김대중은 이회창을 이길 수 없었다. 이인제의 경선 불복, 탈당, 국민신당 창당, 대선 출마의 일련이 과정이 없었다면 김대중은 이회창을 이길 수 없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정치와 언론 환경이 척박했다.

16대 대선도 마찬가지다. 이인제가 새천년민주당에 들어와 유력 대선후보가 되지 않았다면 노무현은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노무현의 대선 출마 결심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바로 이인제였다. 노무현은 이인제와 같은 기회주의자를 극도로 싫어했다. 이인제가 정통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대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노무현은 2007년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결정적인 것은 이인제씨 때문이죠. 이인제씨가 2002년 대선 전에 우리 민주당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서였죠. 내가 그때부터 ‘이거 큰일 났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회창씨 쪽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내 상대는 이인제씨였어요.

“경선불복 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우리 당으로 와서 여기서 또 후보하겠다고 하는데… 그  설명할 수 없는, 이치에 닿지 않는 현상, 그리고 그 현상에 영합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임과 세력을 보면서 이게 뭐냐, 이게 정치냐, 이대로 가도 되냐고 분노했지요.”

“내가 이인제와 끝까지 맞섰던 것은 그 사람의 정책이나 기능이나 역량이나 이런 것이 나보다 훨씬 더 처진다는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칙을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3당합당 때 YS를 따라간 것이나, 경선불복한 것, 그리고 다시 보따리 싸고 당을 나와서 이전해 온 것, 이런 것들이 정치윤리상으로는 하나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노무현은 왜 대통령에 도전했나, 오마이뉴스>

이처럼 대한민국 민주정부 10년은 이인제의 결정적 역할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노무현의 대변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종민 후보에게 져서 낙선했다. 이 또한 그의 운명일지 모른다.

불사조 이인제. 그는 그렇게 정치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그가 정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 아니면 다음 총선에서 70이 넘은 노구를 끌고 또다시 부활할지 알 수 없다. 그는 불사조 피닉제니까.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편안히 남은 생을 즐기시라. 이제 그만 쉴 때도 되지 않았는가?

호남의 착각 또는 자해?

광주와 호남에서 국민의당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8할을 담당했던 그곳에서 말이다. 김대중, 노무현의 민주정부 10년을 만들어낸 그곳에서 말이다. 기회주의 정당이자, 야권분열 정당이자, 새누리 2중대 정당인 국민의당을 지지한다고 한다. 광주와 호남의 정치의식이 그 정도라면 이 나라에 희망은 없다.

호남 사람들에게 국민의당을 지지하는 이유를 물으니, “무조건 본가(더불어민주당)를 혼내주기 위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더불어민주당(더민주)을 혼내주는 것은 좋은데, 그 방법이 국민의당 지지란다. 혼내는 방법이 너무 궁색하고 부끄럽지 않은가?

지금 국민의당을 만든 사람들은 어디 화성에서 온 외계인들인가? 그들은 더민주(새정치연합)에서 단물이란 단물은 모두 빨아 먹고, 먹던 우물에 가래침을 뱉고 나온 인간들인데, 그들이 이름만 바꾸면 새사람이 되는가? 현역 국회의원 교체 여론이 높았던 광주와 호남에서 다시 공천을 받고 국회의원되기 힘들어지자, 자기가 몸담았던 정당의 등에 칼을 꼽고 나와서 국민의당으로 출마하면 정치신인이 되는 것인가?

정치의식이 높다는 광주, 호남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호남에서 오랫동안 제1당을 차지한 더민주를 혼내주겠다는 것은 좋다. 그럴 수 있고, 때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 더민주를 혼내기 위해 정의당이나 녹색당 등을 지지하겠다면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높이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더민주의 대안이 국민의당이라면 그것은 착각과 오판을 넘어선 자해행위다.

국민의당이 호남 제1당이 된들 호남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고립과 멸시뿐이다. 정말 안철수가 정권교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지, 아니면 국민의당이 호남을 넘어 전국정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지 궁금하다.

그동안 더민주가 보였던 퇴행적 행태의 근본 원인을 제공한 자들이 만든 당이 국민의당이다. 호남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호남의 정치자영업자와 종편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근거없는 마타도어에서 벗어나라고 말이다. 국민의당을 지지해서 당신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국 현대사에서 광주와 호남이 기회주의자들을 지지한 적은 없다. 그것이 주어진 운명이었던, 아니면 자의적 선택이었던 간에 광주와 호남은 한국 민주주의의 버팀목이었고, 근간이었다. 또다시 이 나라의 운명은 광주와 호남이 쥐게 되었다. 당신들의 선택에 따라 이 나라의 미래가 달라진다. 그 선택이 국민의당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망월동의 영령들이 당신들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한 유명한 생명과학자(혹은 생물학자)의 강연에 갔다가, 질문 기회를 얻어 생명이란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생물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얘기를 했다.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물질대사를 하고, 자극에 대해 반응하고 항상성을 유지하며, 발생, 생장, 생식, 유전, 적응과 진화를 하는 개체라고 말이다.

그것은 생명의 특성을 나열한 것이지, 생명의 정의는 아니다. 그가 말한 생명의 특성도 모든 생명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생명체인가? 수 년의 동면 기간 동안에 먹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않는 아르테미아 새우는? 아름다운 조직으로 성장하고 복제하는 수정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과학계에서 일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명에 대한 면밀한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생명에 대한 수십 가지의 정의를 내렸지만, 그 어느 것도 생명이 무엇인지 명쾌히 설명하지 못했다. (Tsokolov, S. A., 2009, “Why is the definition of life so elusive? Epistemological considerations,” Astrobiology, Vol. 9, No. 4, pp. 401-412.)

그러던 중,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다가 다음 구절에서 전율하였다.

우주에는 견고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양한 ‘의식의 상태’를 현상화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그리고 그 의식의 상태가 ‘티끌들의 아물거림’의 조직과 형상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모든 외적 형태란 내적 의식의 표현물이었다.

[생명]과 [의식]은 하나이고 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은 [생명]이다”라거나, “저것은 [의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식은 곧 생명이었고, 생명은 곧 의식이었다. 그리고 그 둘을 만들어낸 ‘창조적 권능‘은 우주의 배후와 그 속과 그 너머에 있는 [신성한 우주심](Divine Universal Mind)이었다.

I realized there was nothing solid in the universe, everything visible was manifesting a differing ‘state of consciousness’ which determined the composition and form of the ‘shimmer of motes’.

Therefore, all outer form was an expression of the inner consciousness.

LIFE and CONSCIOUSNESS, I realized, were one and the same thing.

It was impossible to say ‘This is LIFE’ and ‘That is CONSCIOUSNESS’.

Consciousness was Life, and Life was Consciousness and was the ‘Creative Power’ of both; DIVINE UNIVERSAL MIND’ beyond, within and behind the universe.

<그리스도의 편지, 정신세계사, p. 44>

이 책을 통해 “생명은 의식이다”는 언명이 가장 정확한 생명의 정의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물질 세계만을 다루는 과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아진

꽃샘 추위가 찾아온 3월의 어느 날 아침, 작은 소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진이라고 했고 나이는 열일곱이라고 했다. 얼굴은 막 중학교 입학한 아이처럼 어려 보였고, 커다란 안경을 썼고, 머리는 짧았으며 피부가 고왔다.

아진이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몇 가지 물건을 꺼내 펼친다. 아버지는 안 계시고 엄마는 아파서 일을 할 수가 없으며 동생을 돌봐야 한단다. 몇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그 외에 돈벌이를 위해 물건을 팔러 다닌다고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의 전형이다. 부모님이 안 계시거나 아프고, 동생을 돌봐야하는 소녀 가장. 정부에서 쥐어주는 몇 푼 안 되는 생활비, 일주일 내내 일을 해도 생활비를 벌기 어려운 형편.

이런 사정으로 아진이는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했다. 학교에 다녔으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아이.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 물으보니 배시시 웃으면서 형편은 안 되지만 꿈은 크다고 하면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아진이의 커다란 안경 너머 초롱초롱 빛나는 까만 눈망울을 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에게 칫솔과 면도기를 사면서 5만원을 쥐어 주었다. 나중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다시 찾아오라고 얘기했지만, 아진이는 다시 올 것 같지 않았다.

아진이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의 꿈을 위해 기도라도 올려야 할 것 같은 봄이다.

알파고보다 더 무서운 것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가 이 나라에 한바탕 광풍을 일으키고 있다. 알파고는 세계 바둑 최강자 중 한 사람인 이세돌 9단과의 대결에서 4승 1패로 낙승을 거두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동안 인간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바둑의 세계가 기계에 의해 점령당했다며 충격에 빠졌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제 공상과학 영화처럼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냐며 두려움에 떨었다. 충격과 공포.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에 대해 전문가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다.

워낙 냄비근성과 호들갑에 익숙한 나라의 언론과 백성들이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길 만큼 바둑을 잘 둔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바뀌거나 망하지는 않는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우선 바둑은 서양장기 체스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게임이지만, 언젠가는 컴퓨터가 인간보다 잘 할 수 있는 게임이고, 그 날이 우리 생각보다 조금 빨리 온 것 뿐이다. 체스는 바둑보다 훨씬 단순하여 인간이 컴퓨터를 이길 여지가 없다. 컴퓨터는 체스 게임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하여 최적의 수를  계산한다.

바둑이 체스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컴퓨터의 연산 속도가 빨라지고 알고리즘이 더욱 효율적으로 발전한다면 컴퓨터가 인간과의 대결에서 충분히 우위를 보일 수 있다.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대결에서 그것을 보여준 것이다. 때문에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다고 해서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알파고는 몇 가지 알고리즘과 빅데이터 분석을 바탕으로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범용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다. 앞으로 바둑뿐만 아니라 금융이나 의료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알파고가 기존의 인공지능 프로그램보다 매우 발전된 것은 사실이고, 엄청난 연산 능력과 분석 능력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는 인간보다 더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지만, 결국은 인간이 만든 알고리즘이고 인간이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알파고가 발전해도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갖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들이 그렇게 하도록 개발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낼 뿐이다. 알파고가 아무리 바둑을 잘 둔다 해도 알파고는 바둑이 뭔지 모른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 분석과 연산을 통해 이길 확률이 높은 착점을 찾아낼 수 있지만, 그것이 바둑인지 뭔지는 알 수 없다.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들은 때때로 스스로를 너무 과대 평가한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어떤 과학 도구로도 신(神)을 찾을 수 없고, 다른 하나는 어떤 과학 기술로도 생명을 만들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아무리 훌륭한 로봇이나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갖을 수 없으며 결국 그것들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할 수 없다.

만약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인공지능 스스로 세상을 지배한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인공지능을 그렇게 하도록 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두려워 해야할 것은 인공지능 알파고가 아니라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인공지능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바로 인간들이다. 그것도 아주 탐욕스러운 인간들이다.

시장에 대하여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자기 조정이 가능한 시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Our thesis is that the idea of a self-adjusting market implied a stark utopia. Such an institution could not exist for any length of time without annihilating the human and natural substance of society; it would have physically destroyed man and transformed his surroundings into a wilderness.

자기 조정이 가능한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완전한 유토피아를 가리킨다. 사회와 인류의 멸망 없이 그러한 제도는 잠시도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인류는 파멸될 것이고 자연은 황폐해질 것이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기 조정이 가능한 시장이라는 개념은 환상이다. 그런 제도는 인간의 두뇌나 책에서만 존재하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시장은 사회의 일부이며, 인간이 (또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시장 경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는 경제학자, 자본가, 정치인들은 늘 모든 경제를 시장에 맡기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를 약육강식만이 존재하는 정글로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는 주장만큼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으며 위험한 경제 이데올로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