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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소요유

전직 대통령 예우법

전직 대통령 예우법

기억을 더듬어보면 작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자들은 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는 컴맹들이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정보시스템에 어떻게 접속하는지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평생을 삽질로 살았던 자들이 21세기 정보기술 시대에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부도덕은 기본이고, 그들은 무능했다. 열등감이 뼈에 사무쳤다. 그들은 무능과 열등을 숨기기 위한 간교한 잔머리를 굴렸다. 이른바 “대통령 기록물 유출 사건”이다. 노무현이 생산해낸 수백만 건의 기록물을 봉하마을로 가져갔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물론, 그때도 검찰과 언론을 앞세웠었다. 법으로 규정된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열람 권한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협박을 하면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일제 시대부터 전해온 비법이었다. 노무현의 수족들을 하나둘씩 수사 선상에 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지시대로 움직인 사람들을 처벌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에서 노무현은 더 버틸 수 없었다. 그때 노무현은 이런 편지를 쓴다.

모두 나의 지시로 비롯된 일이니 설사 법적 절차에 들어가더라도 내가 감당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퇴직한 비서관, 행정관 7~8명을 고발하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내가 어떻게 더 버티겠습니까? 내 지시를 따랐던, 힘없는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마당이니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모두 내가 지시해서 생겨난 일입니다. 나에게 책임을 묻되, 힘없는 실무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록은 국가기록원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먼저 꺼낸 말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한 끝에 답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거듭 다짐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했으나 진심으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저번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보도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때도 전직 대통령 문화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속실장을 통해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처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서 다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를 미루고 미루고 하더니 결국 ‘담당 수석이 설명 드릴 것이다’라는 부속실장의 전갈만 받았습니다. 우리 쪽 수석비서관을 했던 사람이 담당 수석과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

편지에 따르면 이명박이 먼저 꺼낸 말이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확실히 세우겠다”는 것이었단다. 그것도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거듭해서 말했단다.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말이다.

노무현이 기록물을 반환하고 나서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마치 노무현이 국가 기밀을 모두 빼돌린양 짖어대던 언론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노무현의 수족들을 고발하겠다고 으르렁대던 검찰도 이 사건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때도 노무현을 직접 조사하겠다고 했고, 노무현은 그렇다면 내가 검찰에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검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것이 그들의 전직 대통령 예우법이었다.

그 이후, 검찰과 국세청은 노무현과 그 주변을 이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궐선거 일정에 부합하도록 어제 노무현을 검찰로 불렀다. 노무현이 돈을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상관없었다. 노무현의 부인과 조카 사위가 돈을 받았다는데 그 돈이 뇌물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정황이 그렇다고 얘기할 뿐이었다. 검찰은 노무현과 관련해서는 “정황”과 “상식”과 “포괄”을 들이댔다. 물증은 없었다. 개의치 않았다.

노무현을 검찰청으로 불러 모욕을 주고, “쇼”를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노무현은 “면목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노무현이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었다. 노무현은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 휘말리는 빌미를 미리 차단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었다. 한달 내내 검찰과 언론을 통하여 3족을 멸해야하느니, 패가망신을 시킨다느니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노무현을 모욕주고 협박했다. 심지어 대통령의 특수활동비까지 뒤졌다.

이것이 그들의 전직 대통령 예우법이었다.

노무현이 현직에 있었을 때, 선거에 관련된 말 한마디 했다고 대통령을 탄핵한 자들이었다. 정말 그들이 노무현이 뇌물을 받았다는 물증을 확보했다면 그들은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노무현을 수갑 채워 서울로 압송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을 때, 그들이 확보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박연차를 겁박하여 얻어낸 진술뿐이었다.

노무현을 구속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기소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도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어차피 입을 쓱 닦아버리면 그만일 뿐이다. 한 일주일만 지나면 사람들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노무현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노무현을 전두환, 노태우 급으로 전락시켰다고 환호작약할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

이명박이 세운 이 확실한 전통이 이명박을 비켜가지는 않을 것 같다.

노무현이 봉하마을에서 안식하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역사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진실을 가슴에 담고 최초로 승리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물러났어도 그는 여전히 유효하고 여전히 위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그의 얼굴을 보면,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다. 도대체 그가 감당해야할 몫이 얼마나 더 남아있을까? 왜 역사는 그의 안식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왜 나같은 놈은 그를 놓지 못하는 것일까? 얼마나 그를 더 부여잡아야 하는 것일까?

노무현은 자기를 놓아달라고, 자기를 버려달라고 말했다.

이상 더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노무현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면 과연 누가 그 상징이 될 수 있을까? 노무현이 떠나간 자리를 누가 메울 수 있을까? 그를 버리려고 해도, 뿌리치려 해도 왜 그는 또다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노무현 자신이 원하는 바는 아니겠지만, 그의 지지자들과 그의 반대자들은 끊임없이 그를 불러내고 또 불러낼 것이다. 그것이 그의 숙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가슴에 단심을 품고, 진실을 부여잡고, 역사에 당당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숙명.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들의 숙명.

그의 안식과 평안을 위해 기도한다. 그가 짊어져야할 숙명에 그리고 그와 같은 시대를 호흡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예수를 닮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책

예수를 닮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책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는 예수다.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인류의 역사는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로 나뉘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한 마굿간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왔으나, 세상은 그를 견딜 수 없었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리고 세상은 그를 신의 아들로 만들었다.

그가 광야로부터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다. 사람들은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수천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온 사람들이었다. 인류의 구원자를 기다려온 사람들이 정작 그가 나타나자 그에게서 달아나려 했다. 사람들에게 그는 이방인이었고, 걸인이었고, 위험한 혁명가일 뿐이었다.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두려웠다. 그의 가르침이 두려웠다. 진리가 두려웠다. 그래서 그를 죽여야만 했다.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여야만 했다.

그가 죽었어도 그의 가르침은 남았다. 말씀으로 남아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가 죽었어도 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예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를 외면하고 싶은데, 외면해야만 하는데, 그의 말씀은 주홍글씨로 남아 사람들의 가슴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깨달았다. 그를 신의 아들로 올리고, 그의 말씀 중 견딜 수 있는 것만 골라 경전을 만들었으며, 그 경전에 대한 해석을 특권화했다. 간교한 사람들은 예수를 팔아 장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천 년이 흘렀다.

많은 교회들이 여전히 예수를 팔았고, 사람들은 위로를 얻으러 교회에 갔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 되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거세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의 가르침은 간교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기복으로 전락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예수에게 기도를 했고, 권력을 얻기 위해 교회에 갔다. 예수는 가진 자들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주 드물게 예수의 말씀을 깨닫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영적 스승, 구도자, 신비가 등으로 불렸고,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복기하려 했다.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 복음 강의”도 그런 시도 중 하나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려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를 닮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읽어야할 책이다. 역자인 류시화는 책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를 추종하지 말고 나처럼 되라.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

[도마 복음 강의 서문 중에서]

모든 가르침이 일관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진리는 이미 수천년 전에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세상을 구원할 진리가 이미 전해졌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고,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든지 이 말씀들의 속뜻을 발견하는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리라.

[도마 복음 1절]

예수는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착한 사람 되는 방법

착한 사람 되는 방법

사람은 누구나 착한 사람이 되려 한다. 평생 거짓말을 일삼던 사기꾼들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선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망이 있다. 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야말로 착한 일을 해서 착한 사람이 되는 경우다. 이 방법은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다. 누구나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만 실제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상대방이 자기보다 악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되는 것이다. 굳이 어렵게 착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상대방이 나쁜 짓을 했다는 사실만 입증함으로써 자신은 선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 꿀릴 것이 없다”

기독교 장로인 그가 자기 자신까지, 자기 내면의 양심까지 속일 수 있다면 그는 또다른 종류의 위인이 될 것이다. 상대방이 나쁜 사람임을 증명함으로써 자기가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 상대방을 적당히 잘 골라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속인 이는 없었다.

어찌하면 노무현을 버릴 수 있을까

어찌하면 노무현을 버릴 수 있을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 어느 시대든 그렇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익을 추구한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 “경제를 살려 주세요” 하면서 눈 앞에 이익에 전전긍긍한다. 오늘날 이러한 세태는 극에 달했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대부분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한 사람들 앞에서 “정의”를 말하고, “도덕”을 말하고, “상식”을 말하면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러한 것들이 밥먹여주냐고 하면서.

노무현과 같은 사람은 늘 분란을 일으킨다. 그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가치의 중요함을 깨달은 소수는 열성 지지자가 되었고, 가치가 밥먹여주냐며 비웃는 사람들은 그를 증오한다. 특히, 기득권층에게 노무현과 같은 이들은 위험하고 치명적이다. 그의 말하는 방식과 행동 방식이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과 같은 이들은 죽어야하고, 없어져야 할 존재들이다. 그래야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사회가 편안해진다.

가치를 추구한 정치인이 드물긴 했지만, 더러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다 위와 같은 이유로 암살당하거나 거세되었다. 노무현이 가치를 추구한 최초의 정치인은 아니지만, 가치를 추구한 정치인이면서 최초로 성공한 정치인이 되었다. 이것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를 살펴보아도 몇 안되는 드문 경우였다. 이 나라의 기득권층은 불안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노무현은 죽어야했다.

노무현은 친일과 군부독재의 후예들로 이루어진 기득권층뿐만 아니라 소위 진보좌파라 불리는 민주 운동권 진영에게도 참으로 불편한 존재였다.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에도 같은 당 내부에서 노무현 끌어내리기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대통령은 커녕 후보조차 되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노무현은 어느 진영에게나 환영받지 못하는 비주류였다.

문제는 아무도 노무현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노무현 지지자들이야 그렇다쳐도, 노무현을 증오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도 노무현에게 무관심할 수 없었다. 중간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순탄할 수 없었다. 언론들은 연일 노무현을 깍아내렸고, 노무현 욕하기가 국민스포츠가 되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국회는 그를 탄핵했다. 그것은 가치를 추구한 자가 성공을 했기에 치루어야하는 댓가였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노무현은 계산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진실을 말했고,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마법같이 성공했다. 반대자들에게 그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더욱더 없어져야할 존재가 되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삶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인생은 에둘러가는 것이 아니라고. 노무현의 삶은 그것을 또렷히 보여주었다. 그는 실패와 실패를 거듭했고, 수많은 위기에 쳐했었지만 그 난관을 헤쳐나갔다. 기적이었고 마법이었다. 노무현은 그 수많은 난관을 피하거나 돌아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맞섰고, 절대 꼼수나 잔머리를 쓰지 않았다. 그것이 노무현의 힘이었고, 노무현의 가치였다.

노무현의 대통령 선거 출마 연설을 기억하는가?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눈치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육백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해본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수 있는 역사를 만들수 있다.

노무현이 있었기에 노무현이 승리했기에 우리들은 떳떳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쓸 수 있었다. 그는 역사 앞에 당당하고자 했고, 그렇게 살았던 정치인이다. 저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저런 울림은 아무나 줄 수 있는게 아니다.

노무현이 돈을 받았다 한다. 가치를 말하고 가치를 위해 산 사람이라면 돈 10억에 그 가치를 팔지는 않는다. 진짜 부정부패를 하는 자들이라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같이 한다. 단돈 10억에 자기가 추구했던 삶을 버리지는 않는다. 누가 나한테 10억을 줄테니 한나라당을 지지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 돈을 받을 것인가? 나는 받지 않는다. 나같은 필부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노무현 같은 인물이 그러하겠는가.

물론 이런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번 사건으로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노무현과 검찰의 주장이 맞설 때, 누구를 더 신뢰할 것인가. 노무현과 언론 중 누구를 더 신뢰하는가. 노무현과 한나라당 또는 이명박 중 누구를 더 신뢰하는가. 답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설령 현행법 상 불법의 소지가 있다 한다면 그 응분의 댓가를 치루면 된다. 만에 하나 검찰이 노무현을 구속시키더라도 그들은 노무현을 죽일 수 없다.

노무현이 추구했던 가치, 노무현이라는 존재가 주는 의미가 퇴색하지 않는 한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접을 생각은 없다.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노무현을 버린다면, 또 그래야 한다면 나는 그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우리 현대 정치사에 노무현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너무 공허하지 않겠는가.

노무현을 버릴 수 있는 때는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노무현을 찾지 않고도 또는 노무현의 가치가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의 세상이 되었을 때이다. 그때까지 노무현은 여전히 유효하고 여전히 위대한 정치인일 것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한마디 덧붙이자면 일희일비하지 말고, 노무현이 돌을 맞을 때 그 옆에서 같이 돌을 맞으면 될 것이다. 분노할 필요도 없다. 노무현을 죽이고자 한 화살이 결국은 다 저들에게 되돌아갈 것이기에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의연하게 그를 믿고 지켜보면 된다.

구글 애드센스의 허와 실

구글 애드센스의 허와 실

구글 애드센스를 이용한지 3년이 되었다. 처음 몇 달 간은 구글의 비즈니스 모델에 매혹되었었고, 실제로 한 달에 얼마간의 돈이 들어온다는 사실에 흥분했었다. 소규모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제법 도움이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구글에서 부정클릭에 대한 경고메일을 받고, 애드센스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선 구글과의 관계가 일방적이라는 것은 치명적이다. 실제로 광고 노출의 댓가로 왜 그만큼의 돈을 받아야 하는지 게시자는 알 길이 없다. 부정클릭 때문에 일방적으로 계정이 폐쇄되는 상황에서는 이용자들은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쌍방 간의 계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드센스 이용자들은 일종의 수혜자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 금액은 전적으로 구글이 정한다.

실제로 지난 3년간 수입 추이를 따져보니, 편차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반면에 나의 웹사이트 페이지 노출은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클릭률은 어느 정도 일정한데 비해 광고 수입이 하락하고 있다는 것은 구글이 클릭당 광고 단가를 점차 낮추고 있다는 얘기다. 구글도 이익을 추구하는 영리 기업이다보니 광고 시장이 위축되면 당연히 광고 단가를 낮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애드센스 이용자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구글 애드센스 수입 추이
3년간 구글 애드센스 수입 추이
웹사이트 페이지 노출 추이
3년간 웹사이트 페이지 노출 추이

다른 광고 프로그램들을 이용해보지 않아서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 없지만, 그들의 정책이 구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전업 블로거들이 이러한 수입만을 전적으로 의존하기는 어렵다. 한달에 수천에서 수만 불씩 벌 수 있다는 일부 극소수 블로거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일반 블로거들은 이런 광고 프로그램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블로거들이 자기 블로그에 광고를 싣는 것은 본인 자유겠지만, 블로그의 가치를 “자유”에 두고 있는 나같은 경우는 블로그에 광고를 올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돈도 되지 않을 뿐더러, 무언가에 종속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것이 “돈”이라고 했을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은 블로그가 너무 지저분해 보인다는 것이다.

싸구려 커피 같은, 그러나 결코 싸지 않은

싸구려 커피 같은, 그러나 결코 싸지 않은

장기하의 노래는 눅눅하고, 미적지근하면서 끈적끈적 달라붙는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송창식과 신중현을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고 산울림의 21세기 부활이라고도 하는데, 장기하의 노래는 자판기 커피 같은 싼티 속의 정교한 세련됨이 스타벅스의 천박한 고급스러움을 압도한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내공이 B급 위악스러움에 가려져 있다.

내 젊은 날의 초상은 김광석의 처연함이었다. 그가 읊조렸던 삶과 사랑에 기대어 청춘을 견디었다.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며 군에 다녀왔고,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서른을 넘겼다. 세상은 부조리했고, 정의는 패배했으며, 삶은 퍽퍽했다. 쓴소주를 눈물과 함께 마시던 그런 시절이었다.

우리 세대보다 한참 어린 장기하가 낯설지 않은 것은 그의 노래에서 우리 젊은 날의 정서를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기하의 노래가 사회 담론을 다루지는 않지만, 그가 노래하는 구질구질한 일상의 적나라함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그렇게 반복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슥 지나가도
무거운 매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의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 본다
아직 덜 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질 않다
수만 번 본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 빈 나를 잠근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하고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뭐 한 몇 년 간 세수대야에 고여있는 물 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
비가 내리면 처마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그냥 가만히 보다 보면은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
비가 그쳐도 히끄무레죽죽한 저게 하늘이라고 머리 위를 뒤덮고 있는 건지
저거는 뭔가 하늘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너무 낮게 머리카락에 거의 닿게
조금만 뛰어도 정수리를 꿍 하고 찧을거 같은데
벽장 속 제습제는 벌써 꽉 차 있으나 마나
모기 때려잡다 번진 피가 묻은 거울 볼 때마다 어우 약간 놀라
제멋대로 구부러진 칫솔 갖다 이빨을 닦다 보면은
잇몸에 피가 나게 닦아도 당최 치석은 빠져나올 줄을 몰라
언제 땄는지도 모르는 미지근한 콜라가 담긴 캔을 입에 가져가 한모금
아뿔싸 담배 꽁초가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
해가 뜨기도 전에 지는 이런 상황은 뭔가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슥 지나가도
무거운 매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의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 본다
아직 덜 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질 않다
수만 번 본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 빈 나를 잠근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하고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장기하, 싸구려 커피>

잊혀지는 것과 기억해야 하는 것

잊혀지는 것과 기억해야 하는 것

세상의 모든 일이란 잊혀지게 마련이고 잊혀져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지만, 때로는 의식적으로 기억을 되살려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워낙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사회인데다 언론이라 불리는 집단들의 의도적 여론몰이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일들이 적지 않다.

올해 초, 미네르바라고 불렸던 30대 청년이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구속되었다. 인터넷 통제의 신호탄이라 불렸던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인터넷에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힘없는 네티즌을 구속할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짜 미네르바를 인터뷰하고 두 번씩이나 사람들을 속여온 “신동아”라는 잡지는 아무일 없다는 듯 넘어가면서 유독 힘없는 네티즌만을 상대로 구속 수사하는 것은 당연히 형평성에 어긋난 것이었다. 형평성? 이 말은 너무나 사치스런 말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나서 용산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철거민들의 시위에 경찰이 과잉대응하면서 벌어진 인재였다. 6명의 사람이 불에 타서 숨졌는데, 유족들은 숨진 철거민들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다. 할 줄 아는 것이 오로지 삽질 뿐인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경찰이 견찰이 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사람이 6명이 죽었는데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아무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다만, 경찰청장이 될뻔했던 사람이 물러났을 뿐이었다. 이명박은 그 사람이 아깝다고 했다.

용산참사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때마침 연쇄살인범이 잡혔다. 그리고 권력과 언론은 여론의 관심을 용산참사에서 연쇄살인범 강호순으로 돌리려고 했다. 쓰레기 언론들은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둥, 사실상 무력화된 사형제도를 부활시켜야 된다는둥 법석을 떨었다. 간교했다. 강호순 사건으로 인해 용산참사는 잊혀졌다. 죽은지 두달이 넘도록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철거민들은 여전히 눈을 감지 못했다.

권력이 강호순 사건으로 돌려막기를 시도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전두환 시절의 보도지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용산참사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이었지만, 설령 일어났다 하더라도 정부와 경찰이 사과하고 고인들과 유족들을 달래야하는 것이 상식이다. 정권은 쓰레기 언론을 통해 여론의 관심을 다른 사건으로 의도적으로 돌리려했다. 상식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상식, 도덕 이런 말들도 역시 사치였다. 강호순 사건으로 돌려막기를 했다는 상황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으로 역시 묻혀버렸다.

모든 일이 그런 식이었다. 촛불재판에 관여했다는 신영철 대법관 사건은 어떤가? 법원들의 소장 판사가 들썩였고, 대법원장까지 조사를 해야한다는 말이 나왔다. 조사 결과, 신영철 대법관이 지난 해 있었던 촛불시위 관련 재판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이 결과 발표는 사실 의외였다.) 신영철 대법관은 공직자 윤리위원회에 회부되었고, 사람들이 신영철 대법관이 곧 사퇴할 것이라 생각했다.

신영철 대법관은 한국 야구가 살렸다. 한국 야구가 극적인 승부를 벌이면서 결승까지 진출하자 사람들은 흥분하고 환호했다. 언론도 여론도 신영철이 누구? 하면서 신경도 쓰지 않는다. 신영철 대법관은 WBC 야구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었다.

우울증으로 자살한 줄로만 알았던 여배우 장자연 사건은 또 어떤가? 의외의 거물들이 연관이 되자 이 사건이 수사당국과 언론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고, 박연차 리스트가 다시 등장했다. 박연차는 정권의 곶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둘씩 빼먹는 재미. 노무현 조카 사위가 등장하는 것을 보니, 이제 보궐선거가 다가왔음을 알아채야 한다.

이 많은 일들이 불과 지난 석달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연연해하지 않는 것은 장점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늘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은 힘없는 서민이라는 사실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 대법관들이 웃을 얘기다. 이런 일들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만, 카르마는 절대 잊지 않는다는 것, 반드시 기억해야할 진리는 이것이 아닐까?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미리내 님이 권해주신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Discovery of the Presence of God)”를 읽었다.

사람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경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의식 수준이 낮은 나의 처지에서 그런 내용들은 이해는 고사하고 범접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내가 품고 있던 신과 영혼과 종교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의문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깨달음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많은 영혼들이 왜 가치있는지, 의식의 진화와 성장 단계가 무엇인지, 궁극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지향이 무엇인지, 왜 성인들은 용서와 사랑을 한결같이 강조했는지 이 책은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사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신의 본성을 설명해 놓은 부분은 그동안 내가 그 어떤 종교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가장 진보된 것이었다.

  1. 신성(Divinity)은 비선형적이고 불편부당하고 시비분별이 없으며, 편파성과 취사선택하는 편애를 넘어서 있다.
  2. 신성은 변덕스럽거나 분별하지 않으며, 추정적인 인간 감정들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신성한 사랑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이다. 한계는 에고의 귀결이다.
  3. 신의 정의는 신성의 전능과 전지의 자동적 귀결이다. 신은 ‘행’하거나, ‘작용’하거나, ‘원인’이 되지 않고 그저 ‘있을’ 뿐이다. 신성의 성질은 무한한 힘의 장으로서 방사되는데, 그 무한한 힘의 장에 의해 존재하는 전부는 있는, 그리고 되어 있는 ‘것’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렬된다. 각각의 영혼/영은 이렇듯 고유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수준을 향해 끌려가는데, 그것은 마치 바다 속의 코르크나 전자기장 속의 쇳가루의 움직임과 같다.
  4. 신성은 낮은 힘을 훨씬 넘어서 있는 무한한 힘의 고유한 성질로 말미암아 절대적 지배권이다. 낮은 힘은 위치성과 통제의 도구이며 유한하다. 힘은 무한한 세기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힘을 구할 필요가 없는 신성한 참나로서의 힘의 근원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5. 신성의 막강함과 전적인 현존 내에서, 존재하는 전부는 스스로를 정렬시킨다. 이 조정은 영적 선택의 귀결이다. 자유는 신성한 정의에 고유하다.
  6. 의식의 무한한 장으로 표현된 신성의 전지와 전능은, 실상을 가능성의 전 단계에 걸쳐 확인해 주는 의식 연구 측정 기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생각, 행위, 결정이 시간과 장소 너머에 있는 의식의 무한한 장에 각인된다. 이 각인에 의해, 정의가 보증된다.

<데이비드 호킨스,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pp. 152-153>

겸손한 삶, 내맡기는 삶,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한 삶, 결국 인류 역사상 모든 성인들과 스승들이 한결같이 가르쳤던 내용들이 진리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에게는 새로운 화두가 생겼는데, 그것은 환상으로 명명된 이 차원에서의 삶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성철 스님의 법문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았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나에게 소중한 블로그들

나에게 소중한 블로그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 하늘에 별같이 수많은 블로그들 중 어떤 인연에 의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다가온 블로그들이 있다.  나는 그 블로그들을 통해 또다른 세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각을 배웠다.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들이 내게 전해졌으며, 나는 그들을 알기 전보다 조금은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들과의 인연을 늘 감사한다.

  • 일체유심조: 미리내 님의 초대를 받게 된 것은 나에게는 더없는 영광이자 행운이었다. 그의 블로그를 통해서 알게된 마음 공부와 의식의 성장은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것 같지만, 아직은 내 수준이 일천하여 많은 것을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한다.
  • SoandSo.net: 소소한 일상 속에 번득이는 촌철살인이 배어있는 블로그다. 일상의 평범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깨닫게 해주는 블로그일 뿐더러, 그 단순한 디자인이 나를 사로잡았다.
  • 도아의 세상사는 이야기: (도아 님이 들으시면 기분나쁘실지는 모르겠지만) 블로그계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시각을 가진 블로거를 꼽으라면 현재까지는 도아 님인 것 같다. (이것이 칭찬인지, 욕인지는 나도 헷갈린다.) 나와 비슷한 연배에, 비슷한 청년기를 거치고, 지금도 비슷한 의식을 지니신 듯한 도아 님의 블로그는 늘 유쾌함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 민노씨.네: 블로거 중에 민노씨 님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유명한 분이다. 내가 아는 블로거 중 가장 에너지가 충만한 분이 아닐까 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울 양이면, 언제나 나를 흔들어 깨운다. 민노씨 님이 없는 블로그계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다.
  • 아거: 지금은 심원의 고요 속에 칩거하고 계신 아거 님. 사실 아거 님은 나를 잘 모를 것이다. 내가 아거 님 블로그를 처음 찾은 것은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블로그에 관심은 있었지만 삶에 여유가 없어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시절, 아거 님의 블로그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블로그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었다.
조선일보 추종자들에게 바치는 노래

조선일보 추종자들에게 바치는 노래

신문을 발행한다고 해서 모두 “언론”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해다. 조선일보가 자칭 “일등 신문”이라 떠든다고 해서 조선일보를 가장 좋은 언론이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1% 특권층에 속하든지, 그 특권층에 속하고 싶어 안달이든지, 그도 저도 아니면 대개 무뇌아라 불릴 정도로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다.

조선일보는 언론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정치집단이다. 그것도 친일과 독재, 극우와 반공을 밑천 삼아 돈벌이를 하는 수구 정치 집단이며, 천민 매판 자본이다. 일제 시대에는 친일을 했고, 군부 독재 시대에는 독재에 앞장서서 부역을 한 집단이 형식적 민주주의가 도래하자 “언론 자유”의 과실을 앞장 서서 누린다. 자신들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거짓과 왜곡은 기본이다.

파렴치하고 몰상식하지만, 더욱 나쁜 것은 이들이 몰라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이 거짓과 왜곡인줄 알면서도 아무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권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

이런 조선일보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또는 외면하면서, 편집이 어떠느니, 종이 질이 어떠느니 하면서 애독자인척 추종하는 자들은 조선일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옛말에 유유상종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들 속에 조선일보와 같은 파렴치함과 위선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신문을 아무 꺼리낌없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루시드 폴의 조윤석이 “미선이” 라는 밴드 활동을 할 때 부른 “치질” 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런 노래는 조선일보 추종자들이 한 번쯤 들어볼 필요가 있다. 이 노래를 듣는다고 그들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혹시 본인의 “치질”이 어디에서 왔는지 추측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매일 아침처럼 문 밖에 놓인 신문을 들고
무슨일이 있었나 살펴보려 변기에 앉았네
볼일이 끝날 무렵 다 떨어진 휴지걸이 위로
황당하게 비친 내 모습 불쌍하게 웃네

한장 찢어서 곱게 구겨 부드럽게 만들고
찝찝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대충 처리를 했네
며칠이 지나고 조금 아프긴 했지만 설마라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휴지보다 못한 너희들 종이 사지 않겠어
아무리 급해도 닦지 않겠어 쓰지 않겠어

너희들의 거짓말 듣지 않겠어 믿지 않겠어
단돈 300원도 주지 않겠어 보지 않겠어

<미선이, 치질>

덧. 이 글은 민노씨 님의 언어의 투명성: 내가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이유라는 글에 대해 트랙백을 보내기 위해 쓴 글인데, 정작 트랙백은 가지 않아 뜬금없는 글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덧. 민노씨 님의 블로그와 트랙백이 되지 않는군요. 왜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