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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소요유

혹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배트맨?

혹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배트맨?

이제서야 광야에서 백마를 타고 올 초인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끝없는 절망의 나락 속에서 그여 그 희미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그 애타는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광야]

영화 Dark Knight에서 고담시의 정의로운 검사 Harvey Dent는 “영웅으로 죽든지 아니면 오래 살아남아 악당이 되는 것을 보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얘기했다.

WAYNE: Exactly. Who appointed the Batman?
DENT: We did. All of us who stood by and let scum take control of our city.
NATASCHA: But this is a democracy, Harvey.
DENT: When their enemies were at the gate, the Romans would suspend democracy and appoint one man to protect the city. It wasn’t considered an honor. It was considered public service.
RACHEL: And the last man they asked to protect the republic was named Caesar. He never gave up that power.
DENT: Well, I guess you either die a hero or you live long enough to see yourself become the villain. Look, whoever the Batman is, he doesn’t want to spend the rest of his life doing this. How could he?

사람들의 탐욕과 무관심 속에서 태어난 야만의 시대에 우리들은 절망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육사의 그토록 원했던 초인이나 Harvey가 원했던 배트맨은 과연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인가? 이 야만의 시대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

차라리 영화였으면, 차라리 영화였으면 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아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치는 세상

아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치는 세상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잘 자란다. 예쁘고 반듯하고 명랑하고 건강하게 자란다. 잠든 아이 머리맡에 있는 일기장을 펼쳐보다가 “내가 나비가 된다면”이라는 제목의 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나비가 된다면 가장 예쁜 꽃에 집을 지을 것이다. 어떻게 지을거냐면 꽃에 눕고 또다른 꽃잎을 이불로 사용할 것이다. 집을 다 완성하면 꿀을 많이 모아 친구들에게 나누어줄 것이다. 그리고 꿀벌과도 힘을 합쳐서 꿀을 모을 것이다.

여름과 가을이 지나서 겨울이 되면 그동안 꿀벌이랑 친구들과 모은 꿀들을 똑같이 나누어 가질 것이다. 친구들과 꿀벌들은 내년 봄에 다시 만날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딸아이가 쓴 너무나 따뜻하고 예쁜 글이다. 내가 간섭하지 않아도 아이는 이렇게 잘 자라고 있다. 대견하고 고마운 일이다.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좋은 선생님들과 즐겁게 공부해야 할 학교에 탐욕에 찌들은 자들은 경찰까지 밀어넣었다. 일제고사라는 시험시간에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선생님들을 자르고, 아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대한민국의 “교육현장”에서 2008년 12월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 곳곳이 전쟁터 아니면 공사판으로 변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변명을 해댈 것인가? 절반의 탐욕과 절반의 무관심으로 이 야만의 권력을 우리 손으로 만들었다고 자랑할 것인가?

성탄절을 앞두고 가장 즐거워야할 아이들의 가슴에 대한민국은 대못을 치고 있다. 예수가 와서 통곡할 일이 아닌가.

눈을 맞으며 눈물 흘리다

눈을 맞으며 눈물 흘리다

절규하지는 않더라도 가슴이 더 아려올 때가 있다. 분노하지 않더라도 가슴이 더 먹먹할 때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참으로 착한 사람들 뿐인데, 이런 사람들만 있으면 세상은 그래도 살아볼만한 곳일 것 같은데, 그것은 불행하게도 순진한 사람들의 착각일 뿐이다.

2008년은 탐욕에 찌들은 자들이 마음껏 본색을 드러낸 한해였다. 부끄러워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눈과 귀를 막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모든 것은 뒤죽박죽이었고,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오직 한줌도 안되는 무리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우왕좌왕이었다.

새천년에 되불러져온 야만은 그전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원치 않는 자들에게 알지도 못한 채 당한 폭력의 세월을 뒤로 하고, 이제는 스스로의 손으로 선출한 권력에 모든 것을 알고도 당하는 무자비함은 차라리 개그의 한장면이라 하는 것이 속편할 일일지도 모른다.

성탄절이 다가와도 그 흔한 캐롤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어느 누구도 예전에 누리던 그 연말연시의 들뜸을 누리지 못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성탄 전야에도 개조차 컹컹거리며 뛰어다니지 못한다. 모든 것은 경제 논리와 자본의 논리로 치환되었고,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잘려나갔다.

그 흔하디 흔하게 얘기하던 희망이라는 덕담 한마디도 이제는 쉽게 내뱉을 수 없는 어둠의 시간들. 이런 시간을 이런 노래라도 듣지 못한다면 차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문닫은 상점
길게 늘어진 카페트
갑자기 내게 말을 거네

난 중동의 소녀
방 안에 갇힌 14살
하루 1달라를 버는

난 푸른 빛 커피
향을 자세히 맡으니
익숙한 땀, 흙의 냄새

난 아프리카의 신
열매의 주인
땅의 주인

문득, 어제 산 외투
내 가슴팍에 기대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난 사람이었네
공장 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어느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자본이라는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라는 이름에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붉게 화려한 루비
벌거벗은 조명이 되어
돌처럼 굳은 손을 내밀며
내 빈 가슴 좀 보라고

난 심장이었네
탄광 속에서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난 심장이었네
어느날 문득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루시드 폴, “사람이었네”>

유투브는 여전히 진실된 “정황”을 증언하고 있다

유투브는 여전히 진실된 “정황”을 증언하고 있다

20여년 전, 지강헌이라는 탈주범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인질극을 벌이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돈 500만원을 훔쳤지만, 600억원을 횡령한 전경환(전두환의 동생) 보다도 더 감옥에 오래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자였다. 위대한 대한민국에서 감히 잡범 주제에 특권층에게 불만을 갖다니… 그는 잡범이었지만,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노건평(노무현의 형)이 “포괄적 공범”으로 구속되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그렇다고 의심할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란다. 노건평이 돈을 받았건, 받지 않았건 그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넘버 3의 송강호가 라면 먹고 뛴 선수가 “현정화”라고 하면 “현정화”인 것이다. 그 앞에서 “임춘애”라고 얘기해봤자 날아오는 것은 주먹과 발길질 뿐이다.

죄가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죄인이라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죄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들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이다. 법에 관한한 그들은 하느님이다. 설령 법에 규정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관습법까지 들고 나오는 이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노건평 같은 이는 그야말로 밥이다. 퇴임을 했어도 눈에 가시 같은 노무현을 욕보이고 잡아넣고 싶은데, 아무리 뒤져도 나오는 것이 없으니, 만만하고 어수룩한 그의 형이 걸렸다. “포괄적 공범”으로 말이다.

노건평이 구속되는 날, 이명박은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으로 달려가 배추 아주머니와 또 멋진 사진 한장을 박아 주셨다. 배추 아주머니는 자애로운 대통령의 품안에 안겨 살기 힘들다고 눈물을 지었고, 이명박은 “눈물난다. 내가 기도해야 되는데…”라고 아주머니를 위로했다. 이명박은 농민들은 다 죽어가는데 농협이 이권이나 개입한다고 강도높게 비난했다. 이 말은 노건평 관련 사건을 계속 챙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연중 드러내놓고 있다.

https://i0.wp.com/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08/1204/IE000991524_STD.jpg?w=640

이런 연출은 이명박이 얼마나 노무현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의 형이 구속되는 날, 가락동으로 달려가 이런 역겨운 사진을 찍으며 노건평과 연관이 된 농협을 비난하는 센스. 퇴임을 한 노무현에게는 하루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이명박은 쥐박이라고 놀림만 받으니 질투가 날만도 하겠지.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기 전, 도곡동 땅 문제나 BBK 문제 등으로 곤혹스런 상황에 여러 번 직면했으나, 그때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수구 언론 조중동과 추상 같은 검찰이 그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심지어 자기 입으로 BBK를 설립했다는 동영상이 나왔어도 검찰은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법치였고, 지금도 그 법치는 여전히 견고하게 유효하다.

유투브에는 아직도 이명박이 BBK를 설립했다는 동영상이 이명박과 검찰을 조롱하고 있다.

오해는 마시라. 노건평이 죄가 있으면 당연히 구속하고 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박이 지었던 죄업이, 아니 죄를 지었다는 “정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명박의 부도덕과 무능이 다가오는 진짜 경제 위기에서 더 빛을 발할 것라는 사실이다. 그때도 사진 한 장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서민들은 왜 보수적인가, 정말 그들은 보수적인가

서민들은 왜 보수적인가, 정말 그들은 보수적인가

대한민국에는 두 종류의 서민들이 있다. 하나는 종부세 대상자이면서 스스로 서민이라 우기는, 쥐박이라 불리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서민(鼠民)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야말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서민(庶民)들이다. 물론, 경제적으로 아주 힘들게 살면서도 쥐박이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이중서민들도 꽤 존재한다.

첫번째 부류의 서민(鼠民)들이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고 한 짓이라고는 종부세 무력화와 감세, 그리고 각종 부동산 규제 철폐 뿐이다. (그리고 전봇대도 2개나 뽑았구나.) 어떻게 해서든 땅값을 올려 일하지 않고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뿐인데, 대한민국의 경제적 최상위층들이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고 지켜주는 이런 부도덕한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봐서는 당연하다. 물론, 잘사는 그들 중에도 간혹 양심을 가진 도덕적인 부자도 있겠지만, 극히 소수이겠지.

문제는 두번째 부류의 서민(庶民)이다. 이들은 도시와 농촌에서 매일매일 뼈빠지게 일을 하고도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버텨나가는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부류다. 이런 서민들의 수는 전체 국민의 50%를 넘는다. 민주주의를 한다는 대한민국에서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켜 줄 정치세력을 집권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현실은 두번째 부류의 서민들에게 자못 우울하다. 노동자, 농민, 그리고 도시빈민 등 서민들을 대변한다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지지율을 5%를 넘지 못한다.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서민인 나라에서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은 집권은 커녕 지지율 5%를 넘지 못한다. 종부세 대상자 2%만을 위하는 정당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언제나 30%를 웃돈다. 이런 현실은 정말 많은 서민(庶民)들이 이중서민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서민(庶民)들은 극우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일까? 경제학자 도스타인 분데 베블렌(Thorstein Bunde Veblen)은 그의 “유한계급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The abjectly poor, and all those persons whose energies are entirely absorbed by the struggle for daily sustenance, are conservative because they cannot afford the effort of taking thought for the day after tomorrow; just as the highly prosperous are conservative because they have small occasion to be discontented with the situation as it stands today.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보수적이요, 부자들은 오늘에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보수적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보수적이라는 얘기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정치고, 신자유주의고 자기들의 관심사가 될 확률이 아주 적다. 선거에 악착 같이 투표하는 사람들은 강남에 사는 졸부들이지, 인력시장에서 하루하루 몸을 파는 노동자들이 아니다. (지난 번, 서울 교육감 선거에서 위대한 강남은 공정택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서민들의 정치의식이 떨어지고, 정치적 무관심과 체념이 커질수록 경제적 양극화는 더 커질 것이고, 정치권력은 한나라당과 같은 극우 보수 세력에게 고스란히 넘어갈 것이다.

우리나라 서민(庶民)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할만한 정치세력을 선택하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서민들의 계급적 사고를 가로막는 숱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아주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 신문들이 언론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공영방송이라던 KBS도 이미 이명박 졸개들에게 넘어가버리고, 아직도 1950년대 반공사상에 젖어서 좌빨 타령이나 하고 있는 수구 쓰레기 알바들이 네이버를 장악하고 있으며, 우리가 남이가 한마디면 앞뒤 가리지 않고 한나라당을 찍어대는 지역감정 추종자들이 있는한 서민들의 계급적 사고는 그야말로 요원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2~3% 지지를 받고 있는 진보신당의 심상정이 한미FTA를 들이대면서 노무현을 씹어돌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신자유주의가 세계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근본 모순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서민들에게는 아무런 이슈가 되지 못한다. 결국, 이런 상식적인 토론이 가능하려면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 한다. 언론 문제, 지역감정 문제, 그리고 색깔론. 이런 문제들이 지금처럼 지속된다면 서민들의 이중서민 노릇은 지금처럼 계속된다.

또다른 해결책은 투표를 의무화하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룰라 대통령이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이유는 브라질이 의무투표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룰라같은 노동자 출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으며, 그를 지원하는 세력이 집권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투표율이 적어도 80%만 넘어가도 한나라당이 집권할 수는 없다. 아무리 서민들이 보수화되었다고 해도, 아무리 국민들이 사기를 당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대한민국이 후진 나라라 하더라고 투표율 90%에서 이명박과 같은 사기꾼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는 없다.

정작 문제는 서민들의 보수화라기 보다는 서민들의 무관심이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의 당면 문제는 한미FTA가 아니고, 언론 문제고, 지역감정 문제고, 남북 문제다. 이들 문제가 선결되지 않고는 이명박이 아무리 깽판을 쳐도, 그 이후에는 박근혜가 정권을 잡을 것이고, 박근혜가 아무리 나라를 말아먹어도 그 이후에는 오세훈 같은 젊은 수구들이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

참으로 암울한 현실이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한 시대에 획을 긋는 음악과 노래들이 있다. 10여년 전 델리스파이스의 “챠우챠우”도 그런 노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담백하고 냉소적인 분위기가 나를 압도한다. 냉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비주류였고, 주변인이었다. 군더더기를 싫어했고 탐욕을 저주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중심이 아니고 그 주변을 맴도는, 그것도 위성이 아닌 혜성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을 그렇게 떠나버리는, 그렇다고 딱히 갈 곳이 정해져 있지도 않은.

나에게는 인생의 목표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무엇이 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냥 주어진 시간을 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힘들게 견뎌왔다. 종착역은 없었고, 운명을 개척하려 하지도 않았다. 계획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이 흐르듯 세월에 삶을 맡겼다.

그런데도 가끔은 여유로웠고, 때로는 행복했다.

네이버는 도대체 뭐하는 애들인가

네이버는 도대체 뭐하는 애들인가

네이버 블로그에서 오는 트랙백은 언제나처럼 와장창 깨져 보인다. 어제도 그런 트랙백을 하나 받았는데, 불현듯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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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를 만드는 애들은 도대체 자기 사이트에서 나가는 트랙백이 제대로 되는지조차 테스트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요즘 웹에서 UTF-8을 지원하지 않는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건 개념이 없는 것인지, 정말 게으른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사용자들에게 무관심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명색이 웹으로 밥벌어 먹고 사는 애들이, 그것도 대한민국 일등 포탈업체라는 애들이 트랙백 깨지는 것 하나를 수정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것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블로그 시작하면서 벌써 2년이 되었는데, 2년 동안 네이버 블로그 사용자들로부터 받은 트랙백은 몽땅 깨졌다. 다른 곳에서 온 트랙백은 모두 정상이었는데, 유독 네이버만 깨졌다. 네이버 블로그의 정책은 트랙백도 네이버 블로그끼리만 안깨져 보이면 그만이란 얘기인가?

네이버에서 온 트랙백은 늘 워드프레스 Akismet에 스팸으로 걸린다. 그렇기에 네이버 블로그 사용자들은 트랙백을 보내도 스팸으로 처리되어 내 블로그에는 나타나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나도 스팸인줄 알고 그냥 무심코 지웠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네이버 블로그에서 온 트랙백이었다. 이렇게 깨진 트랙백을 내가 놔둬야 하는지, 아니면 지워버려야하는지도 고민이다.

네이버 아이들은 개방성이나 표준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웹으로 밥을 먹고 사는지도 궁금하다. 네이버 블로그 사용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 왜 가만히 있는지도 몹시 궁금하다.

종부세가 합헌이었다면 그건 더 놀라운 일이다

종부세가 합헌이었다면 그건 더 놀라운 일이다

종부세에 관련된 위헌소송에서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면, 그것은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선출된 것보다도 더 놀랍고 역사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런 판결에서 합헌 결정을 바란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너무 순진한 사람이거나 또는 외계인일 가능성이 크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중 8명이 종부세 대상자다. 재판관의 90% 이상이 이해당사자라는 말이다. 이들 중 재산이 10억 미만인 사람이 두명뿐이다. 이 두명만 합헌 결정을 내렸고, 나머지 7명은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헌법이라는 잣대로 종부세를 판단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재산을 기준으로 종부세를 재단한 것이다.

위헌 판결을 내린 7명의 재판관은 강만수보다도 더 교활하다. 이들은 종부세의 취지는 합헌이라고 박아놓고, 세대별 합산과 1가구 1주택 세부과에 대해 위헌과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림으로써 사실상 종부세를 빈 껍데기로 만들었다. 차라리 강만수처럼 종부세는 징벌적 과세 운운하는 것이 더 순진하고 착해보인다.

종부세는 관습헌법으로도 위헌이다. 관습헌법.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몇년 전에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법률이 관습헌법에 의해 위헌판결 났던 것을 기억하는가? 관습헌법에는 서울이 수도로 규정되어 있기에 관습헌법을 고치지 않고는 수도를 옮길 수 없다고 주장했던 헌법재판소의 노친네들을 기억하는가? 마찬가지다. 종부세 같은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있는 세금이다. 감히 가진자에게 세금을 물리다니. 세금은 원래 천한 아랫것들이나 내는 것이었다. 그런 세금을 상위 2%에게 물리다니 노무현은 그들에게 (오바마가 아닌) 오사마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만약 종부세가 헌재의 노친네들에 의해 합헌 판결이 났다면, 나는 정말 놀랐을 것이다. “내가 아는 대한민국이 이 정도 수준이 아닌데, 내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주류의 파렴치함이 이 정도가 아닌데” 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들은 그들의 저렴한 수준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말았다.

종부세, 행정수도 이전, 간통죄 등등의 문제를 헌재의 노친네들에게 물어본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을만한 삶을 살지도 않았고, 그들의 도덕성이 일반인들보다도 딱히 낫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기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런 가치관과 관련된 문제의 판결을 맡기고, 그 판단이 최종이 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매트릭스의 오라클이 아니다. 그들은 선출된 권력도 아니고, 9명의 출신 성분이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표할 수 정도로 분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헌법재판소의 이런 시스템이 계속되는 한, 수도이전이나 종부세 판결과 같은 파렴치한 결과가 계속될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가 강화되지 않고는 이런 문제들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 선거 참여가 의무화되어야 하며, 국민투표는 대통령뿐만 아니라 다수의 국민들에 의해서도 발의되어야 한다. 브라질이나 호주처럼 투표가 의무화된다면, 이명박 같은 자가 대통령으로 뽑힐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지고, 오늘과 같은 헌재의 교활한 판결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가진 자들이 무엇을 해주길 기대하지 말라. 주류들에게 무엇을 나누어 받기를 기대하지 말라. 당신이 강부자나 고소영이 아닌 한, 이명박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당신이 등신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과시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냥 견디든지, 견딜 수 없으면 싸우든지, 선택은 둘 중에 하나뿐이다.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온다…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온다…

우연히 김규항이 프레시안에 쓴 칼럼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를 읽었다. 김규항을 비롯한 좌파들의 생각이 어떤지 대강은 알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사실 이런 류의 글들은 그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명박과 한나라당, 그리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수구 극우들을 지극히 이롭게 한다. 따라서, 이런 글들은 좋은 세상을 오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좌파들의 주장은 신자유주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공공의 적이므로, 신자유주의가 없어지지 않고는 좋은 세상이 오지 않는다로 요약될 수 있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다시 말해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극복될 수 없는 모순을 갖고 있다. 필연적으로 양극화는 심해질 수밖에 없으며, 인간들은 무한 경쟁의 정글로 향하게 되고, 우리가 바라는 인간적인 삶은 도태되어 버린다. 자본주의가 극복되고, 거의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것이 사회주의일까? 이론적으로는 사회주의가 맞겠지만, 현실적으로 인간이란 종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좌파들의 또다른 주장은 이명박이나 노무현이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고 본다.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도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바마나 부시나 다를 것이 없다고 얘기한다.

이를테면 “모든 게 이명박 때문” “이명박만 없으면”이라는 ‘시대의 신학’이 목표로 하는 세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명박 이전에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훨씬 더 민주적이며 개혁적인 정권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사회 진보 운동의 목표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인가? 물론 진보적이되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야 ‘이명박이라는 짜증나는 인간’만 사라져도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대개의 사람들은 이명박이 물러나고 김대중이나 노무현 시절로 되돌아간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

[김규항,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이 지점에서 나는 좌파들과 결별할 수 밖에 없다. 김규항의 질문에 내가 답하자면, 이명박이 없어지면 이명박이 없어진만큼 좋은 세상이 온다. 한나라당이 사라지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이 된다. 조중동이 폐간되면, 우리 사회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2배쯤 좋은 사회가 된다. 물론, 그 좋은 세상이란 것이 좌파들이 얘기하는 궁극적인 사회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후진 사회는 아니란 얘기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유모차를 끌고나가 촛불을 켤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대운하 같은 정신 나간 짓거리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돈많은 부자들은 지금보다 더 세금을 많을 냈을 것이며, 복지 예산은 지금보다 조금 더 늘어났을 것이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아이들은 조금 더 행복한 세상에서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중동이 없었다면, 이명박 같은 사기꾼이 절대 대통령으로 뽑히지 않았을 것이다. 조중동이 없었다면, 지금쯤 더 이상 북한 퍼주기 얘기는 안나왔을 것이다.

좌파들이 원하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이 권력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조중동은 폐간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이명박과 한나라당과 투쟁해야 하며, 조중동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상식과 토론이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명박과 조중동을 놔두고, 신자유주의와 싸우자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이념은 반대지만, 이명박과 같은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신자유주의가 힘을 못쓰고 하려면, 일단 이명박과 조중동이 사라져야 한다.

좌파들은 이 사실을 당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노무현을 까대던 진보 학계의 거두 최장집이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별 말이 없다. 대부분의 좌파들이 그렇다. 좌파들은 왜 이명박이나 조중동보다 노무현을 더 싫어했을까? 왜 그랬을까? 노무현이나 이명박을 동일시하는 그런 좌파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좌파들의 말을 실현하는 길은 혁명을 하는 것밖에 없는데, 내가 보기에 이 지구상에서 2008년 혁명이 가능한 나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길 밖에 없지 않을까? 그들이 진정 평등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원한다면 말이다.

나는 이명박 정권보다 노무현 정권 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부시보다는 오바마가 나을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이다. 노무현이나 오바마를 성공시키고, 그 다음에는 그들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인물들을 선택해 나가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민노당이 제도권으로 들어온 것이 언제였는가? 노무현 정부 때 아니었는가? 내가 노무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단 한걸음 우리가 원하는 사회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좌파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보였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야 우리는 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미국도 흑인 대통령이 나오기까지 200년이 넘게 걸렸다. 오바마가 얼마나 진보적 인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200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비주류인 흑인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는 사실. 역사는 참 더디게 흐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좌파들이 열걸음을 원하는데 노무현은 단 한걸음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좌파들은 그 한걸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한걸음이 눈물이 나도록 소중하다. 오바마가 당선되었다고, 흑인들의 삶이 당장 나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리고 나에게는 그 오바마의 한걸음이 중요하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없어지면 우리는 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조중동이 없어지면 우리는 두걸음을 내딛을지도 모른다. 이명박과 싸우지 않고, 조중동과 싸우지 않고, 신자유주의 타파를 부르짖는 것은 거짓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오늘 같은 날 듣고 싶은 노래

오늘 같은 날 듣고 싶은 노래

11월 늦가을의 햇살은 여전히 따사롭고,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푸르다. 모과나무에 노란 모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오렌지색으로 물드는 메타세콰이어 나무와 노란 은행나무들이 바람에 한들거린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미국은 오바마의 당선으로 변화와 희망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한국은 여전히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을은 조용히 깊어가고 있다. 문득 듣고 싶어지는 노래. 요즈음 나의 화두는 “꿈”이 되어버렸다. 가을날의 평화로운 꿈. 맑고 소박하고 가벼웁게 살자는 꿈.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John Lennon, Imag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