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ed by
Category: IT & Science

하염없이 달만 바라보다

하염없이 달만 바라보다

새벽 5시에 잠을 깼다. 운동을 하러 밖으로 나갔는데 오늘 따라 뭔가 다른 에너지를 느꼈다. 밤이 길어져서 아침 해는 날마다 늦게 뜨는데, 어제보다 더 밝아진 새벽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아파트 건물 사이로 엄청나게 큰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태어나서 본 보름달 중 가장 큰 달이었다. 그 달이 쏟아내는 빛에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저렇고 크고 밝고 아름다운 달을 볼 수 있다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동이 밀려왔다. 새벽 운동을 해야된다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하염없이 달만 바라보았다.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오늘 뜬 이 달이 68년만에 가장 큰 보름달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슈퍼문(Super Moon)이라 불렀다. 달은 지구 주위를 타원으로 돌고 있는데, 지구와 가장 가까워졌을 때 볼 수 있는 보름달이란다. 달은 평소보다도 몇만 km나 지구와 가까워졌고, 30%나 더 밝은 빛을 지구로 보내고 있었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평생 가장 크고 밝은 달을 보다니 운이 몹시 좋은 날이었다. 자연에 대한 경이와 감사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68년만에 가장 큰 보름달
68년만의 가장 큰 보름달
아이패드 키보드 한영전환

아이패드 키보드 한영전환

ultrathin-keyboard-mini-gallery

아이패드 미니(iPad Mini)를 사용하다가 키보드가 필요하여 Logitech Ultrathin Keyboard Cover를 구입했다. 그런데 iOS 9으로 판올림한 후 한영전환 키가 작동을 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아이패드에 입력을 자유롭게 하려고 키보드를 사용하는 것인데, 한영전환이 자유롭지 않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 저것 구글링을 하다가 알아낸 것은 Ctrl+Space를 사용하면 된다는 것인데, 이 키보드에는 Ctrl 키가 없다. 어떤 글에는 Shift+Command+Space를 사용하면 된다고 나와 있는데, 이것도 해결책이 아니었다.

한동안 키보드를 사용하지 않다가 며칠 전 iOS 10으로 판올림한 후 다시 한 번 이 문제에 도전하였다. 그리하여 알아낸 결과는 바로 Function+Caps Lock이다. Function 키와 Caps Lock 키를 동시에 누르니 이전처럼 한영전환이 자유롭게 되었다.

이 기능을 사용하려면, iOS 10에서 Settings > General > Keyboard > Hardware Keyboard > Caps Lock Switch to/from Latin 을 켜주어야 한다. 간단한 것인데 알아내기 쉽지 않은 것들이 있다.

아이패드 미니를 위한 Logitech Ultrathin Keyboard Cover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switch-language-ipad

우리집 e서재

우리집 e서재

그동안 사모은 책들이 방안에 한가득이다. 가끔은 이 책들을 정리해서 조그마한 도서관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워낙 천성이 게을러서 엄두도 내지 못한다.

책목록을 만들 요량으로 엑셀을 열어 책의 이름과 저자, 출판사 등을 넣어 볼까 생각했는데, 책이 너무 많아 포기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국립중앙도서관 웹사이트를 가게 되었고, 우리집 e서재라는 서비스를 발견하게 되었다.

집에 있는 책의 목록을 관리할 수 있는 서비스인데, 우리나라 국립중앙도서관이 국민들을 위해 이런 서비스를 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더 기막힌 것은 국립중앙도서관 스마트폰 앱을 사용하면 바로 바코드 스캔으로 책의 정보를 입력시킬 수 있고, 나중에 엑셀 파일로 내려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시험 삼아 책상에 나뒹구는 책 몇 권을 바코드 스캔으로 입력해 보았다. ISBN을 자동으로 인식하고, 한국십진분류코드까지 생성해냈다. 스마트폰의 앱을 통해 책에 대한 서평까지 입력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서비스를 계획하고 개발한 국립중앙도서관에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이런 서비스가 꾸준히 유지되어 우리나라 독서문화 발전에 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집e서재

마음은 뇌의 산물인가

마음은 뇌의 산물인가

오늘날 많은 신경과학자(혹은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마음 또는 의식이 뇌의 활동으로 생겨난다고 믿고 있다. 뉴런과 시냅스의 패턴을 연구하면, 첨단 장비로 뇌 영상을 찍어 보면, 마음이나 의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수 있을까?

지난 번에 얘기했듯이, 과학자들은 생명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은 마음이나 의식에 대해서도 정의하지 못한다. 마음이나 의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그것이 뇌 활동의 산물인지는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

물리요법가이자 UCLA 신체운동학 교수였던 발레리 헌트(Valerie Hunt)는 인간의 두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두뇌를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중요한 요소라고 너무 지나치게 과대평가해왔다고 생각한다. 두뇌는 단지 정말 훌륭한 컴퓨터일 뿐이다. 하지만 창조성, 상상력, 영성 등의 모든 것과 관계되는 마음의 측면들을 두뇌 속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음은 두뇌가 아니다. 마음은 바로 이 에너지 장 속에 있다.”

<마이클 탤보트, 홀로그램 우주, 정신세계사, p. 273>

아무리 좋은 현미경으로 신을 볼 수 없듯이, 인간의 과학으로 뇌를 아무리 연구해도 마음이나 의식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몸이 ‘참나’가 아니 듯이, 우리의 뇌가 마음이나 의식은 아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한 유명한 생명과학자(혹은 생물학자)의 강연에 갔다가, 질문 기회를 얻어 생명이란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생물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얘기를 했다.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물질대사를 하고, 자극에 대해 반응하고 항상성을 유지하며, 발생, 생장, 생식, 유전, 적응과 진화를 하는 개체라고 말이다.

그것은 생명의 특성을 나열한 것이지, 생명의 정의는 아니다. 그가 말한 생명의 특성도 모든 생명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생명체인가? 수 년의 동면 기간 동안에 먹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않는 아르테미아 새우는? 아름다운 조직으로 성장하고 복제하는 수정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과학계에서 일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명에 대한 면밀한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생명에 대한 수십 가지의 정의를 내렸지만, 그 어느 것도 생명이 무엇인지 명쾌히 설명하지 못했다. (Tsokolov, S. A., 2009, “Why is the definition of life so elusive? Epistemological considerations,” Astrobiology, Vol. 9, No. 4, pp. 401-412.)

그러던 중,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다가 다음 구절에서 전율하였다.

우주에는 견고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양한 ‘의식의 상태’를 현상화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그리고 그 의식의 상태가 ‘티끌들의 아물거림’의 조직과 형상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모든 외적 형태란 내적 의식의 표현물이었다.

[생명]과 [의식]은 하나이고 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은 [생명]이다”라거나, “저것은 [의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식은 곧 생명이었고, 생명은 곧 의식이었다. 그리고 그 둘을 만들어낸 ‘창조적 권능‘은 우주의 배후와 그 속과 그 너머에 있는 [신성한 우주심](Divine Universal Mind)이었다.

I realized there was nothing solid in the universe, everything visible was manifesting a differing ‘state of consciousness’ which determined the composition and form of the ‘shimmer of motes’.

Therefore, all outer form was an expression of the inner consciousness.

LIFE and CONSCIOUSNESS, I realized, were one and the same thing.

It was impossible to say ‘This is LIFE’ and ‘That is CONSCIOUSNESS’.

Consciousness was Life, and Life was Consciousness and was the ‘Creative Power’ of both; DIVINE UNIVERSAL MIND’ beyond, within and behind the universe.

<그리스도의 편지, 정신세계사, p. 44>

이 책을 통해 “생명은 의식이다”는 언명이 가장 정확한 생명의 정의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물질 세계만을 다루는 과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알파고보다 더 무서운 것

알파고보다 더 무서운 것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가 이 나라에 한바탕 광풍을 일으키고 있다. 알파고는 세계 바둑 최강자 중 한 사람인 이세돌 9단과의 대결에서 4승 1패로 낙승을 거두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동안 인간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바둑의 세계가 기계에 의해 점령당했다며 충격에 빠졌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제 공상과학 영화처럼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냐며 두려움에 떨었다. 충격과 공포.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에 대해 전문가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다.

워낙 냄비근성과 호들갑에 익숙한 나라의 언론과 백성들이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길 만큼 바둑을 잘 둔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바뀌거나 망하지는 않는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우선 바둑은 서양장기 체스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게임이지만, 언젠가는 컴퓨터가 인간보다 잘 할 수 있는 게임이고, 그 날이 우리 생각보다 조금 빨리 온 것 뿐이다. 체스는 바둑보다 훨씬 단순하여 인간이 컴퓨터를 이길 여지가 없다. 컴퓨터는 체스 게임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하여 최적의 수를  계산한다.

바둑이 체스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컴퓨터의 연산 속도가 빨라지고 알고리즘이 더욱 효율적으로 발전한다면 컴퓨터가 인간과의 대결에서 충분히 우위를 보일 수 있다.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대결에서 그것을 보여준 것이다. 때문에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다고 해서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알파고는 몇 가지 알고리즘과 빅데이터 분석을 바탕으로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범용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다. 앞으로 바둑뿐만 아니라 금융이나 의료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알파고가 기존의 인공지능 프로그램보다 매우 발전된 것은 사실이고, 엄청난 연산 능력과 분석 능력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는 인간보다 더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지만, 결국은 인간이 만든 알고리즘이고 인간이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알파고가 발전해도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갖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들이 그렇게 하도록 개발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낼 뿐이다. 알파고가 아무리 바둑을 잘 둔다 해도 알파고는 바둑이 뭔지 모른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 분석과 연산을 통해 이길 확률이 높은 착점을 찾아낼 수 있지만, 그것이 바둑인지 뭔지는 알 수 없다.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들은 때때로 스스로를 너무 과대 평가한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어떤 과학 도구로도 신(神)을 찾을 수 없고, 다른 하나는 어떤 과학 기술로도 생명을 만들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아무리 훌륭한 로봇이나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갖을 수 없으며 결국 그것들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할 수 없다.

만약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인공지능 스스로 세상을 지배한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인공지능을 그렇게 하도록 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두려워 해야할 것은 인공지능 알파고가 아니라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인공지능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바로 인간들이다. 그것도 아주 탐욕스러운 인간들이다.

아이폰은 언제 바꾸어야 하나

아이폰은 언제 바꾸어야 하나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물건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거의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미덕이고, 가장 중요한 정책은 경제성장이다.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소비하고, 버리고, 또 만들고, 또 소비하고, 또 버리고, 이런 행위를 다람쥐 챗바퀴 돌듯 무한정 반복한다.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도덕성도, 환경에 대한 고려도 발붙일 곳이 없다. 그것이 필요에 따른 적절한 소비인지, 아니면 불필요한 낭비인지 따질 이유도 여유도 없다.

기술이 발전하고, 새로운 정보기술제품들이 매일 시장에 나온다. 스마트폰이라 불리는 휴대전화도 거의 매일 새로운 모델들이 출시된다.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을 소비자들을 꼬드겨 멀쩡한 휴대폰을 새것으로 바꾸게 만든다. 각종 광고와 마케팅 기법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많은 소비자들은 그것이 조삼모사임을 알고도 새로운 기기의 현란함에 빠져들고 만다.

2010년부터 아이폰4를 사용했다. 이 기기는 스티브 잡스의 역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잘 만들어진 전화기다. 5년을 넘게 사용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애플은 2010년 아이폰4를 출시한 이후, 거의 1년에 하나씩 새로운 아이폰 모델을 내놓았지만, 새로운 모델로 갈아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난 해, 애플이 iOS8을 내놓기 전까지는 말이다.

iOS8은 아이폰4를 지원하지 않았다. 아이폰4의 하드웨어 사양이 새로운 iOS를 제대로 구동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 해 가을부터 아이폰6로 갈아탈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이폰4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때마침 단통법이라 불리는 세상에 듣도보도 못한 흉악한 법 때문에 아이폰6로 넘어가기를 단념했다.

새해 들어 딸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휴대전화가 필요하다고 하여, 단념한 아이폰6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용하던 아이폰4를 딸아이에게 넘기고, 단통법에도 불구하고 아이폰6를 구입하기로 했다. 딸아이가 아이폰4를 땅바닥에 집어던지지 않는 한, 아마 앞으로도 몇 년은 더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폰6를 받은지 2주쯤 된다. 기존 아이폰4에 비해 달라진 것은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는 것, 화면이 많이 커지고 해상도도 높아졌는데 그에 따라 전화기도 커졌다는 것, 터치ID로 지문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클릭 한 번으로 기존 아이폰4에 있던 모든 데이터와 세팅을 저장하여 고스란히 아이폰6로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이폰6는 애플이 iOS를 업데이트해 주는 한 계속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혁신이 나오지 않는 한 10년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이렇게 반자본주의적으로 소비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충분한 것은 충분한 것이다.

아이폰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