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난만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올 무렵, 꽃들은 순서를 지키며 하나둘씩 피는데, 올해는 지난 주부터 시작된 때아닌 고온으로 모든 꽃들이 너도나도 서둘러 피어 버렸다.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 그리고 벚꽃을 3월의 끝자락에 동시에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그야말로 천지에 꽃사태가 났고, 눈이 부시다. 말로만 듣던 백화난만(百花爛漫)이 바로 이런 것이던가.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돌아왔건만, 이 봄은 그리 길지 않을 듯하다.

나무들은 서둘러 꽃을 피우고 잎을 내어, 곧 다가올 여름을 맞이할 것이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은 이제 한달 남짓 꽃으로 흔적만을 남긴다. 이제 푸르지만 무더운 여름이 올 것이고, 세월은 그렇게 흐를 것이다.

2014년 봄이 백화난만 속에서 속절없이 가고 있다.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진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 탐구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진실에 이르렀다.

  1.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죽음은 삶의 부분이며, 삶의 완성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박사가 말했듯이 죽음의 경험은 출생의 경험과 같다.
  2. 죽음은 변화이다. 마치 누에가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되듯이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죽음은 새로운 형태의 삶으로의 변화이다.
  3. 현상만을 놓고 보았을 때,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는 이유는 육신을 ‘나’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 착각에서만 벗어난다면, 그 누구도 죽음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4. 죽음으로 잃어버리는 것은 육체뿐인데, 그 대신 우리는 더 높은 의식 상태로의 변화를 얻는다. 육체가 소멸되는 이유는 더 이상 육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나비도 고치를 벗어났다고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치가 더이상 필요없기 때문이다.
  5. 따라서 진정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삶에는 긍정적인 목적이 존재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선생님

선생님을 뵌 지 올해로 꼭 삼십 년이 됩니다. 삼십 년 전, 저는 풋풋한 소년이었고, 선생님은 혈기왕성한 청년이셨지요. 세월이 살과 같이 흘러, 그때 청년이던 선생님이 벌써 정년퇴임을 하십니다.

새로 생긴 학교에 배정되었을 때, 제 부모님은 걱정을 좀 하셨습니다. 집에서도 멀었고, 학교에는 중장비가 지나다니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그때 별 생각이 없었는데,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신 후, 모든 것이 즐겁고 행복했었습니다. 아마 선생님을 만나려고 그 학교에 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먼 길을 통학하던 것도, 선생님을 도와 반장으로서 학급을 운영했던 것도, 친구들과 같이 머리 맞대며 공부하던 일들도 모두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선생님도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우리 반은 모든 분야에서 상을 받아, 교실 한쪽 벽에 상장이 수도 없이 걸렸었습니다. 정말 신나고 재미있던 시절이었고, 아마 그때가 제 소년 시절의 절정이었을 겁니다.

선생님과 같이 갔던 심천 미루나무 숲도 생각나고, 김태곤의 망부석을 멋들어지게 부르시던 모습도, 언젠가 카메라를 새로 사셨다고 우리들 사진을 찍어주시던 것도 생각납니다. 아직도 그때 사진이 제 앨범에 남아 있습니다.

공부도 공부지만, 남자답게 사나이답게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늘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셨던 선생님. 선생님과 같이 했던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제가 없었겠지요. 자주 연락도 못 드리고, 자주 찾아 뵙지도 못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청년의 모습으로 제 마음 속에 계십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

이제 삼십 년이 넘게 교단에 계시다가 정년을 맞이하게 되셨네요. 정년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여러 가지로 감개무량하고 시원섭섭하시리라 짐작해 봅니다. 정년으로 교단을 떠나시지만, 선생님께서는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시겠지요. 저는 선생님의 원조 제자로 늘 선생님의 제 2의 인생을 응원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정년을 축하하며, 선생님의 진정한 여행을 위해 제가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선물로 드립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

선생님의 진정한 여행은 이제부터일 겁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놓아버림

지난 해 읽었던 책 중 가장 좋았던 책을 꼽으라면, 단연코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놓아버림: 내 안의 위대함을 되찾는 항복의 기술>이다. 이 책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그 단순한 방법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참나’를 찾고자 애쓰는 이들과 생의 고통으로 잠못이루는 이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호킨스 박사가 말하길 “인생이란 본디 마음 속에서 겁내거나 기대하는 바를 투사해 세상에 덮어씌우고는 거기서 벗어나려고 긴 시간 동안 이리저리 애쓰는 일”이라고 했다. 두려움과 욕망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거칠 것이 없다.

다음은 <놓아버림>에서 설명하는 의식의 법칙들이다.

  • 감정이 쌓여 생긴 압력으로 인해 생각이 일어난다.
  • 저항 때문에 감정이 지속되는 것이다.
  • 자각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 내면에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라는 진실이 있다.
  • 내가 나를 보는 대로 세상이 나를 볼 수밖에 없다.
  • 자기에게 어떤 부정적 생각이나 믿음이 적용된다고 의식적으로 말하면, 실제로 그 영향 하에 놓인다.
  • 마음에 품은 대로 실현되기 쉽다.
  • 공포는 사랑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 보호하기 위해 똑같이 하는 일이라도, 공포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다.
  • 소유하거나 행하는 수준에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수준에서 힘과 에너지가 가장 크다.
  • 요구를 멈추면 원하는 바를 얻는다.
  • 사랑은 우주를 지배하는 궁극의 법칙이다.
  •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들면 곧바로 몸이 약해지며, 몸에 흐르는 에너지의 균형이 깨진다.
  • 우리는 스스로 마음에 품은 것에만 영향을 받는다.
  • 의식이 달라지지 않으면 스트레스는 줄지 않는다.
  • 답을 찾지 말고, 문제 이면의 감정을 놓아 버려라.
  • 놓아버림의 목표는 모든 괴로움과 아픔의 근원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 생각이나 감정을 말로 표현하거나 드러내 보여 주었는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은 항상 타인에게 영향을 주어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 인간관계는 전반적으로 마치 상대방이 내 마음속 감정을 알아차리고 있는 듯이 진행된다.

놓아버림, 데이비드 호킨스

연하장

설 명절에 아버지가 주신 연하장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가슴이 뭉클하다.

滿堂和氣生嘉祥(만당화기생가상).
집안에 화목한 기운이 가득하면 아름답고 상서로운 일만 생긴다.

연하장

우리집은 화목하나, 세상은 어지럽다. 별일 없는 한해가 되길 기도한다.

간소한 유언

삶과 죽음은 간결하고 소박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모든 군더더기를 없애고, 꼭 필요한 것만 남겨야 한다.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이 죽기 전에 남긴 몇 가지 당부는 간소하게 살고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1. 마지막 죽을 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다가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2.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 없다.

3.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따라서,

  • 주사, 심장충격, 강제 급식, 산소 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 다니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는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4. 장례 절차와 부수적인 일들.

  •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 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의 조언을 받거나 불러들여서는 안 되며,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내 몸을 처리하는 데 관여해서는 안 된다.
  •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소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 주 오번의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 어떤 장례식도 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재의 처분 사이에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 밖의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 헬렌 니어링, 만약 헬렌이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스피릿 만을 바라보는 우리 땅의 나무 아래 뿌려주기 바란다.

5.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러한 요청들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1. When it comes to my last illness I wish the death process to follow its natural course; consequently:
a. I wish to be at home not in a hospital.
b. I prefer that no doctor should officiate. The medics seem to know little about life, and next to nothing about death.
c. If at all possible, I wish to be outside near the end; in the open, not under a roof.
d. I wish to die fasting; therefore, as death approaches I would prefer to abstain from food.

2. I wish to be keenly aware of the death process; therefore, no sedatives, painkillers, or anaesthetics.

3. I wish to go quickly, and as quietly as possible. Therefore:
a. No injections, heart stimulants, forced feeding, no oxygen, and especially no blood transfusions.
b. No expressions of regret or sorrow, but rather, in the hearts and actions of those who may be present, calmness, dignity, understanding, joy, and peaceful sharing of the death experience.
c. Manifestation is a vast field of experience. As I have lived eagerly and fully, to the extent of my powers, so I pass on gladly and hopefully. Death is either a transition or an awakening. In either case it is to be welcomed, like every other aspect of the life process.

4. The funeral and other incidental details:
a. Unless the law requires, I direct that no undertaker, mortician, or other professional manipulator of corpses be consulted, be called in, or participate in any way in the disposal of my body.
b. I direct that as soon as convenient after my death my friends place my body in a plain wooden box made of spruce or pine boards; the body to be dressed in working clothes, and to be laid on my sleeping bag. There is to be no ornament or decoration of any kind in or on the box.
c. The body so dressed and laid out to be taken to the Auburn, Maine crematorium of which I am a paid member, and there cremated privately.
d. No funeral services are to be held. Under no circumstances is any preacher, priest, or other professional religionist to officiate at any time or in any way between death and the disposal of the ashes.
e. As soon as convenient after cremation, I request my wife, Helen K. Nearing, or if she predecease me or not be able to, some other friend to take the ashes and scatter them under some tree on our property facing Spirit Cove.

5. I make all these requests in full consciousness and the hope that they will be respected by those nearest to me who may survive me.

품위있게 늙는 법

조지 베일런트(George E. Vaillant)가 쓴 <행복의 조건(Aging Well)>은 하버드 대학생 268명의 70년간 인생을 추적한 인생성장보고서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품위있게 나이 드는 법”에 대한 내용은 한 번쯤 음미해 볼만하다.

  1.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보살피고, 새로운 사고에 개방적이며, 신체건강의 한계 속에서도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한다.
  2. 노년의 초라함을 기쁘게 감내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 사실을 품위있게 받아들인다.
  3.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늘 자율적으로 해결했으며, 매사에 주체적이다.
  4. 유머감각을 지니고, 놀이를 통해 삶을 즐길 줄 안다. 삶의 근본적인 즐거움을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행복을 포기할 줄 안다.
  5. 과거를 되돌아볼 줄 알고, 과거에 이루었던 성과들을 소중한 재산으로 삼는다. 호기심이 많고, 다음 세대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려고 노력한다.
  6. 오래된 친구들과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사랑의 씨앗은 영원히 거듭해 뿌려져야 한다”는 금언을 늘 가슴에 새긴다.

이 땅의 품위있는 노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품위있는 노인들을 보고 싶다.

주례사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나이가 되었지만, 결혼 주례를 맡기에는 아직 삶의 경륜과 깊이가 모자라 주저하였다. 하지만, 이미 2년 전에 처음 주례를 했었고, 신랑, 신부를 모두 잘 아는 처지라 거절할 수 없었다.

신랑, 신부는 슬기롭고 신의있는 친구들이라 별 얘기를 하지 않아도 평생 행복하게 잘 살 거라 생각했지만, 결혼이란 것이 보통 일생에 한 번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니, 그 순간을 특별하게 기억할 수 있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전략>

결혼식에 가보면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곤 합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로 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사는 부부는 많지 않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 사랑하고 결혼했지만, 30년 가까이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갑자기 부부가 되었다고 한마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아니 일심동체로 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이제 막 남편과 아내로 시작하는 신랑 신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자신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기 바랍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두 사람은 닮아있을 겁니다. 겉모습도 닮을 것이고, 마음 씀씀이도 닮을 것이며, 인생의 목표도 닮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바라는 일심동체의 부부가 되겠지요. 하지만, 그 시작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단편 중에 <세 가지 질문>이라는 짧은 우화가 있습니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화두가 나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첫 번째 질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가불하지 마십시오. 행복의 시작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 없이 즐기고 누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두 번째 질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신랑에게는 신부가, 신부에게는 신랑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부모님께는 섭섭하게 들릴지 몰라도, 오늘부터 두 사람에게는 서로가 서로에게 부모님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마지막 질문에 답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바로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는 오늘부터 늘 함께 하면서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리하여 그 사랑과 행복이 널리 퍼져, 다른 사람들도 신랑 신부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파랑새입니다.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결혼하는 신랑 신부는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후회 없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깨닫고, 서로에게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리하면 두 사람의 인생은 행복으로 가득 차리라 확신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사랑과 결혼에 관한 시 한 편을 신랑 신부에게 선물하며, 이 주례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길가에 민들레 한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신랑과 신부는 서로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로운 삶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저를 포함한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은 신랑 신부가 걸어갈 삶의 여정에 늘 건강과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길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겨울 안개

오늘처럼 겨울 안개가 자욱한 아침에는 김승옥을 읽어야 한다. 사는 곳이 무진(霧津)은 아니지만, 아니 무진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지만, 겨울 안개는 바로 여기 이곳을 무진으로 만들었다.

안개는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들을 감쌌고, 건물 사이의 횡한 공간들을 채웠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오갔지만, 그들은 이내 안개와 섞여 버렸다.

시공간은 측량할 길 없었고, 존재하지만 동시에 사라져버린, 양립할 수 없지만 눈 앞에 존재하는, 그러나 모든 구별과 경계는 사라졌다.

판단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누군가를 사로잡았던 욕망과 두려움도 안개 속에 숨어 버렸다. 안개는 혼돈 속의 평화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김승옥, 무진기행, 1964>

이정남 할머니

올해 아흔넷의 이정남 할머니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전라북도 순창의 한 시골 마을, 따가운 햇볕에 고추가 붉게 익어가고 있었지만, 인적은 드물었다. 교회 마당에 노인 몇이 모였고, 그 중 이정남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지팡이 없이는 밖에 나올 수도 없었고, 지팡이를 짚고도 허리를 펼 수 없었다. 한 세기 가까운 노동으로 할머니의 뼈마디는 오그라들었다. 한쪽 눈꺼풀은 아예 떠지지가 않았고, 나머지 한쪽 눈도 성하지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혼자 몸을 건사하며 살아간다. 아침 저녁을 손수 차려 먹지만, 입맛도 없고 혼자 먹는 밥이 맛있을리 없다. 자식들은 모두 도회지로 나갔다.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가려는 자식들이 있지만, 할머니는 서울 생활이 마땅치 않다. 혼자이지만, 평생을 산 고향이 훨씬 마음 편하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고단한 삶이었다. 가난 속에서도 많은 자식을 낳았고, 어렵사리 고추농사로 그 자식들을 키워냈다. 더러는 성공한 자식도 있었고, 더러는 힘든 자식도 있었으리라. 남편은 앞서서 먼저 세상을 떠났고, 가끔씩은 그 남편이 보고 싶기도 했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꽤 큰 마을이었지만,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젊은이들은 도회지로 떠나고, 이제는 팔십이 넘은 노인들만 몇 남아서 뙤약볕 밑에서 고추를 말리고 있다. 할머니는 그들 중 제일 나이가 많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는 말에 할머니는 손사래를 친다. 어느 누구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할머니는 잘 알고 계신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그저 평안하게 지내다 가면 그뿐, 더 바랄 일도 없다.

남겨진 고향은 할머니와 함께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