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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Life

아내의 낮잠

아내의 낮잠

점심을 먹고 감기 기운이 있다며 아내는 자리에 누웠다. 세 시간 가까이 긴 낮잠을 잔 아내는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피곤하여 잠이 쏟아지는데, 아내는 심심하다며 계속 놀아달라고 보챘다.

“제발, 불 좀 꺼 주세요. ㅠㅠ”

“안 돼. 심심해. 나랑 놀아 줘.”

이렇게 10여분 간 실랑이를 하다가 불을 켠 채 잠이 들었다. 자다가 문득 깨어 보니, 형광등이 훤하게 켜져 있고 아내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불을 끄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역시 낮잠은 오래 자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새근새근 잠을 자는 아내가 몹시 귀여웠다.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방황(Lost)

방황(Lost)

삶의 본질은 방황이다. 방황 없는 삶은 없다.

아주 가끔 검은 밤바다의 등대처럼 희미한 불빛이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삶은 방황 속에서 저마다의 길을 찾는 것이다. 그 누구도 답을 보여줄 수도, 알려줄 수도 없다. 삶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그것은 각자가 짊어진 원죄와도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방황하는 삶을 실패라고 말하지만, 방황할수록 삶은 풍부해지고 깊어진다.

방황 없는 청춘은 없다.

청춘의 방황은 서툴고 지리멸렬하다. 나이 들수록 방황은 익숙해지고 그 방황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조금씩 지혜가 찾아온다. 방황이 멈추면 청춘도 끝나고 삶도 끝난다.

그리하여 청춘의 항해는 다시 시작된다.

우린 어제, 서툰 밤에, 달에 취해
삯을 잃었네, 삯을 잃었네

어디 있냐고 찾아봐도 이미 바보같이
모두 떨어뜨렸네, 남김없이 버렸네

우린 익숙해져 삭혀버린 달에 취해
아무 맛도 없는 식은 다짐들만 마셔대네

우린 이제서야 저문 달에 깨었는데
이젠 파도들의 시체가 중천에 떠다니네

떠다니네, 봄날의 틈 속에서
흩어지네, 울며 뱉은 입김처럼

꿈에도 가질 수가 없고 꿈에도 알려주지 않던
꿈에도 다시는 시작되지 못할 우리의 항해여

<국카스텐, Lost>

국카스텐의 노래는 낯설고, 몽환적이고, 섹시하다. 이 노래를 처음 들려준 아이의 방황은 언제쯤 끝날 것인가.

미타쿠예 오야신

미타쿠예 오야신

우리 모두는 하나였지.

살아 있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였어.

어머니 대지의 생명을 느끼고,
바람이 그대의 숨결을 전할 때 우리 모두는 행복했지.

그대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고,
그대의 고통과 슬픔에 온 세상이 함께 울었어.

위대한 정령의 끝없는 사랑을 느낄 때
우리 모두는 하나였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미타쿠예 오야신(Mitákuye Oyás’iŋ).

영원히 사는 방법

영원히 사는 방법

우주의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숙명이다. 태어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죽게 되어 있다. 오직 인간들만이 그 죽음을 피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중국 진시황은 영생을 위해 불로초를 찾으려 했고, 현대 과학은 생명 연장을 위해 냉동인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삶이 아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주어진 순간 순간을 최대한 충실히 사는 삶이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If we take eternity to mean not infinite temporal duration but timelessness, then eternal life belongs to those who live in the present.

우리가 만약 영원을 시간이 무한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무시간성으로 받아들인다면, 영원한 삶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몫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어느 화가의 유언

어느 화가의 유언

“예술은 본능”이며, “예술에서의 이론은 의사의 처방전 같아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환자”라고 일갈한 프랑스 야수파 화가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ce de Vlaminck)는 죽기 전 마지막 글에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삶은 내게 모든 것을 주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으며, 내가 본 것을 그렸다.

Je n’ai jamais rien demandé, la vie m’a tout donné. J’ai fait ce que j’ai pu, j’ai peint ce que j’ai vu.

삶을 충만하게 살다 간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남긴다. 삶은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에 무엇을 바라거나 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내면 된다.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반백년이 걸렸다.

주산지의 가뭄

주산지의 가뭄

여름은 아무도 모르게 다가와 스며들었다. 정수리 위의 태양이 연일 뜨거운 볕을 내뿜었다. 지난 2주 동안 한방울의 비도 오지 않았다. 땅이 갈라지고 작물은 메말라 농민들의 속은 타들어갔다. 몇 년 전부터 6월의 장마는 자취를 감췄다. 기상청은 마른장마라고 얘기하지만, 비가 오지 않는 것을 장마라 일컫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삼백 년 동안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던 경북 청송의 주산지도 바닥을 드러냈다. 수백 년을 물 속에 잠겨 있었던 왕버들의 무수한 잔뿌리가 하염없이 말라갔다. 신비롭고 고혹스러웠던 주산지의 풍광이 옛모습을 잃었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살 수가 없다. 더욱 겸허한 마음으로 온천지에 비를 내려달라고 빌어볼 요량이다. 그리하면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그 마음을 받아주시지 않을까. 주말에는 제법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다. 그 비로 대지의 메마름이 조금이나마 걷히길 빌어본다.

소년들은 쉬이 늙고

소년들은 쉬이 늙고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학문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년들은 쉬이 늙었다. 돌아보니 30년이 흘렀다. 30년 전에는 모두들 까까머리 소년들이었는데, 이제는 삶의 무게 앞에 힘겨워하는 장년의 아재들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만 진학하면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세상은 대체로 비루하였고, 희망 따위는 너무 아득하여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하루하루를 잘 버티고 견디어 30년을 살아냈으니, 그 소년들이 어찌 대견하다 하지 않겠는가. 소년들이여, 수고 많았다. 그대들의 고단함을 위로하며 박수를 보낸다.

이제 소년들은 그들이 비판했던 기성세대가 되었고, 꼰대가 되었다. 남은 삶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꾸역꾸역 건강하게 살길 바란다. 그러다 보면 삶의 무게가 저절로 사라지는 날이 올지 누가 알겠는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세상에 태어난 이유

간밤에 내린 비로 나무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상쾌하고 촉촉한 6월의 아침, 딸아이가 생일 축하 카드를 보냈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을 지배하는 궁극의 원리가 사랑임을 깨닫고 이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은 아닌지… 딸아이가 보내 준 카드가 문득 그것을 일깨운다.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딸아!

휘게 10계명

휘게 10계명

  1. 분위기: 조명을 조금 어둡게 한다.
  2.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충실한다. 휴대전화를 끈다.
  3. 달콤한 음식: 커피, 초콜릿, 쿠키, 케이크, 사탕. 더 주세요!
  4. 평등: ‘나’보다는 ‘우리’. 뭔가를 함께하거나 TV를 함께 본다.
  5. 감사: 만끽하라. 오늘이 인생 최고의 날일지도 모른다.
  6. 조화: 우리는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당신을 좋아한다. 당신이 무엇을 성취했든 뽐낼 필요가 없다.
  7. 편안함: 편안함을 느낀다. 휴식을 취한다. 긴장을 풀고 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8. 휴전: 감정 소모는 그만. 정치에 관해서라면 나중에 얘기한다.
  9. 화목: 추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관계를 다져보자.
  10. 보금자리: 이곳은 당신의 세계다. 평화롭고 안전한 장소다.

<마이크 비킹, 휘게 라이프, 위즈덤하우스, 2016, pp. 32-33>

덴마크 사람들의 행복은 휘게(Hygge)에서 나온다. 휘게는 간소하고 편안하고 따뜻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느낌이다.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치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느끼는 바로 그러한 아늑함이다. 모든 불필요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 그리하여 더이상 욕망할 것이 없는 상태가 휘게일 것이다. 행복한 삶이란 지금 이 순간 휘게에 빠지는 것이다.

삶의 역설

삶의 역설

삶이란 인간의 앎과 소유가 실체 없는 허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당위적 과정인데, 실제 일생 동안 그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삶의 역설이다. 따라서 삶이란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관념의 허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다 끝내버리는 고통의 연속으로 다시 정의될 수 있다. 고은의 시는 그런 사실을 건조하고 앙상하게 드러낸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고은,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