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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 불사조는 어떻게 사라지는가

이인제, 불사조는 어떻게 사라지는가

이인제는 충청이 낳은 걸출한 기회주의자다. 지금까지 13번 당적을 옮기면서 6번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2번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13번의 당적 변경은 아마 기네스북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는 가히 김종필의 뒤를 이을만한 위대한 생존능력을 지녔다.

이인제는 숱한 당적 변경에도 총선에 출마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당선이 되어 인터넷 상에서는 불사조 피닉제(피닉스+이인제)로 통한다. 심지어 무소속으로 출마할 때도 당선되었다. 그런 이인제가 이번 20대 총선에서 더민주 김종민 후보와의 대결에서 져 1천여표 차이로 아깝게 낙선한다. 그들의 대결은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전과 같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혈투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인제가 보여준 어마어마한 생존능력을 비하하거나 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10년은 사실 이인제라는 인물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김대중, 노무현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정치가들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성공은 이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이인제가 국민신당을 만들어 대선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알려진 위대한 인물이었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 김종필과 DJP 연합까지 했지만, 이인제가 출마하여 신한국당의 지지를 갈라 놓지 않았다면, 15대 대선의 승자는 신한국당의 이회창이었다.

당시 신한국당(지금의 새누리당)이 IMF 외환 위기 아니라 그 할애비를 불러왔다고 해도 김대중은 이회창을 이길 수 없었다. 이인제의 경선 불복, 탈당, 국민신당 창당, 대선 출마의 일련이 과정이 없었다면 김대중은 이회창을 이길 수 없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정치와 언론 환경이 척박했다.

16대 대선도 마찬가지다. 이인제가 새천년민주당에 들어와 유력 대선후보가 되지 않았다면 노무현은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노무현의 대선 출마 결심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바로 이인제였다. 노무현은 이인제와 같은 기회주의자를 극도로 싫어했다. 이인제가 정통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대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노무현은 2007년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결정적인 것은 이인제씨 때문이죠. 이인제씨가 2002년 대선 전에 우리 민주당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서였죠. 내가 그때부터 ‘이거 큰일 났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회창씨 쪽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내 상대는 이인제씨였어요.

“경선불복 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우리 당으로 와서 여기서 또 후보하겠다고 하는데… 그  설명할 수 없는, 이치에 닿지 않는 현상, 그리고 그 현상에 영합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임과 세력을 보면서 이게 뭐냐, 이게 정치냐, 이대로 가도 되냐고 분노했지요.”

“내가 이인제와 끝까지 맞섰던 것은 그 사람의 정책이나 기능이나 역량이나 이런 것이 나보다 훨씬 더 처진다는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칙을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3당합당 때 YS를 따라간 것이나, 경선불복한 것, 그리고 다시 보따리 싸고 당을 나와서 이전해 온 것, 이런 것들이 정치윤리상으로는 하나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노무현은 왜 대통령에 도전했나, 오마이뉴스>

이처럼 대한민국 민주정부 10년은 이인제의 결정적 역할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노무현의 대변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종민 후보에게 져서 낙선했다. 이 또한 그의 운명일지 모른다.

불사조 이인제. 그는 그렇게 정치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그가 정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 아니면 다음 총선에서 70이 넘은 노구를 끌고 또다시 부활할지 알 수 없다. 그는 불사조 피닉제니까.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편안히 남은 생을 즐기시라. 이제 그만 쉴 때도 되지 않았는가?

문재인과 리더십

문재인과 리더십

김대중과 노무현이 사라진 이후 야당은 지리멸렬했다. 거의 모든 선거에서 야당은 새누리당을 이기지 못했다. 정치, 언론 환경을 비롯한 모든 조건이 야당에게 불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더 큰 문제는 야당 내부에 있다. 그것은 ‘후단협의 추억’이라 부를만한 기회주의자들의 창궐이다.

하나로 똘똘 뭉쳐 친일과 독재 세력들과 싸워도 이기기 힘든 판에,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당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후단협의 후예들이 암세포처럼 당을 좀먹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기회주의자들의 힘은 무척 세다.

문재인은 현재 이런 야당의 대표다.

문재인은 좋은 사람이다.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 착한 사람이다. 노무현이 그렇게 죽임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문재인이 정치판에 들어올 일이 없었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얘기한 문재인의 말처럼, 그는 지금 노무현이 남긴 숙제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야당의 홍보위원장 손혜원 씨의 인터뷰 중에 문재인을 평가하는 대목이 나온다.

– 그렇게 훌륭한 면들이 유권자에게 어필하지 못 하는 건 결국 문 대표의 리더십 부재 때문 아닌가.

“그건 아니다. 다만 정치를 하려면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는데 문 대표는 남을 너무 많이 배려한다. 본인이 소신을 갖고 맞다고 생각하면 그걸 제압해서 자기 쪽으로 밀고 가야 하는데 문 대표는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 강압적으로 자기 의견으로 모으는 일들을 안 한다. 늘 표결을 해야 결론이 난다. 균형감 있는 얘기를 하는데 바로 옆에서 아니라고 반대를 하면 가만히 있는 거다. 샤이(수줍음을 타는 것)해서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 만들러 들어와 .. 재신임 안 되면 나도 떠날 것>

손혜원 씨의 평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문재인은 훌륭한 자질을 가진 좋은 사람인데, 사람이 너무 좋아 리더십이 미숙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재인이 새겨들어야 하는 말이다.

리더가 해야할 일 중 가장 힘든 일은 바로 갈등을 조정하고, 다루기 힘든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리더십의 대가 존 맥스웰(John Maxwell)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리더는 다음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 그들이 변할 능력이 있는가? (능력)
  • 그들이 변할까? (태도)

이 두 가지 질문 모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그들(부정적이고 비협조적이며 무능한 조직원들)과 함께 갈 수 없다.

당신을 따르지도, 생산적인 직원이 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당신을 더 나은 리더로 만들어 주지도 않는다. 그저 조직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직원이 있다는 뜻일 뿐이다. 누군가를 조직에서 퇴출해야 함에도 인정에 이끌리든 어떤 이유로든 조직에 잔류시키기로 결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신의 리더십이 미숙하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중략>

이처럼 어려운 결정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누군가는 그런 결정을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런 결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좋은 리더는 이런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단호하게 결단을 내린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이것이 조직에 최선일까?” 까다롭고 다루기 힘든 직원을 계속 안고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조직에 최선이 아니라면 퇴출시켜야 마땅하다.

<존 맥스웰,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다시 물어야 할 것들, pp. 215-217>

지금 문재인이 해야할 일은 야당 안에서 암세포처럼 당을 좀먹는 기회주의자들을 (정계에서) 퇴출시키는 것이다. 그 기회주의자들은 새누리당을 제외한 이 나라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족속들이다. 이 족속들을 제거하지 않는 한, 야당은 물론 이 나라에 미래는 없다.

빨갱이와 신자유주의

빨갱이와 신자유주의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들이 해방 이후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감추기 위해 들고 나온 무기는 “반공”이었다. 자신들의 정적을 죽이기 위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빨갱이” 딱지를 남발했다. 수많은 민족주의 인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빨갱이라는 미명으로 스러져갔다. 이성과 논리와 상식은 빨갱이 딱지 앞에 처참하게 뭉개졌다. “반공”을 국시로 50여년 간을 살았다.

수구반동 기회주의자의 전형인 박정희는 그의 정적 김대중을 빨갱이로 낙인찍어 평생을 괴롭혔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김대중이 정말 좌파 정치인인줄로만 알았다. 김대중의 <옥중서신>을 읽고서야 그가 얼마나 보수적인 정치인인지 알게 되었고, 사실 조금은 실망한 적이 있다. 남로당 군총책을 맡았던 박정희가 온건 보수정치인 김대중을 빨갱이로 몰아붙일 정도이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들이 처음으로 정권을 놓친 것이 해방 이후 52년만인 1997년이었다. 그들은 지독히도 탐욕적이지만 또한 지독히도 무능했는데 그 결과는 1997년 IMF 외환 위기였다. 이때도 김대중은 원조 수구반동 기회주의자 중 하나인 김종필과 손을 잡지 않고는 정권교체를 할 수 없었다.

2002년, 혜성과 같은 노무현의 등장은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들에게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땅 한반도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그들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단기필마로 정권을 쟁취했긴 했지만,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은 노무현을 탄핵했고, 끊임없이 흔들어댔다. 수구반동 세력들은 10년만에 정권을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 그들은 2009년 노무현과 김대중을 죽였다. 인정하지도 않았고, 인정할 수도 없었던 그 10년의 세월을 지우려고 노무현과 김대중을 죽였다.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들과는 다르게 소위 자칭 좌파라는 세력들은 김대중과 노무현 10년의 세월을 “신자유주의” 시대로 규정하고 공격했다. 지금 이 땅의 주요한 문제들은 신자유주의로부터 기인하며 그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김대중과 노무현은 공공의 적이라는 논리였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이명박보다 더 파렴치하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의 “빨갱이” 공격과 자칭 자파라는 세력들의 “신자유주의” 공격은 방향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수구반동 세력들은 무능하고 부패하고 탐욕적인 세력이고 자칭 좌파들은 몰역사적이고 독선적인 세력이지만 기회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최근 경향신문의 논설위원 이대근이 레디앙에 기고한 글을 보면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의 논리와 판박이다. 이명박 정권을 반민주 정권이라 할 수 없고, 이명박 정권이 반민주이면 김대중, 노무현도 반민주가 되어야한다는 그 논리 말이다.

일반적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반민주 독재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같은 기준으로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도 그런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명박 정권이 단순히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역시 그 차이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설정할 수 없는 것은 너무 자명하다. 사회적 시민권의 확산 정도, 사회 경제적 정책을 기준 삼아 이명박 정권을 반민주로 규정하고 싶다면 지난 10년 정권도 역시 반민주가 되어야 한다.

[이대근, “민주당-진보정당 모두 패배하는 길“, 레디앙]

이대근과 같은 사이비 좌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구반동 세력의 영구집권을 꿈꾸는 것일까? 정말 이들이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면 이명박 정권 퇴진 운동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은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이명박은 애써 두둔하거나 모른척 한다. 김대중, 노무현이 신자유주의 정부라 공격을 받아야한다면 그 잣대로 이명박은 한 100만배쯤 더 신랄하게 공격받아야 한다. 때문에 나는 이들이 정말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자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역겹다.

자칭 B급 좌파인 김규항도 이대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10여년 동안 세 개의 정권이 존재했다. 그중 두 정권은 민주주의의 껍질을 앞세워 자본 편에 섰고 하나의 정권은 그 껍질마저 팽개치고 자본 편에 서고 있다. 그리고 그 두 정권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 ‘차이’를 내세워 오늘 다시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어떠세요. 겪어보니까 그래도 옛날이 그립지요?” 근래 그들 가운데 한 주요한 인사가 강연에서 했다는 말은 그들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그들이 마치 인간이 어디까지 파렴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듯한 행태를 지속할 수 있는 건, 그들을 ‘그래도 현실적인 대안’이라 인정하는 사람들 덕이다.

[김규항, 민주주의의 씨앗, 한겨레]

김규항의 논리대로라면 노무현을 지지하는 나같은 사람은 파렴치한이다. 우스운 것은 나같은 파렴치한은 신자유주의를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노무현을 지지했을까? 노무현은 정말 신자유주의자였을까? 노무현은 정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자본의 편에만 섰을까? 노무현의 정책은 모두 신자유주의이기 때문에 내팽개쳐져야만 라는 것일까? 과연 우석훈의 말대로 “행정도시 건설”이나 “4대강 죽이기 사업”이 똑같은 토목사업일 뿐일까?

나는 궁금하다. 진보신당 지지율 1.2%로 그들은 어떻게 권력을 쟁취할 것인가? 조중동과 한나라당과 싸우지 않고 그들은 어떻게 정권을 쟁취해서 신자유주의를 몰아낼 것인가? 반노무현, 반신자유주의만으로 그들은 그들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미안하지만, 이 땅의 민주주의는 김대중 노무현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민주주의 씨앗은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이다.

누가 그들을 “보수”라 하는가

누가 그들을 “보수”라 하는가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적을 아는 것이다. 일찌기 손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적을 알고 그들을 정확하게 규정해내는 것은 모든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일 뿐더러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친일세력과 군사독재 잔재세력을 “보수”세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조중동 같은 사이비 찌라시 신문을 “보수”신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의 신간인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를 보면 시종일관 우리 정치를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진보가 다시 권력을 창출할 수 있을지를 논하고 있다. 이런 식의 논의 전개는 연구결과의 유용성과는 상관 없이 그들에게 “보수”라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렇다면 보수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을 옹호하고 유지하려는 것인데, 정치적으로 볼 때 여기에는 상식과 민족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보수란 무조건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주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유효한 범위 내에서의 변화는 수용한다. 따라서 보수란 개념에는 어느 정도 긍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이 땅에서 “보수”라 불리는 세력들의 면면을 보자. 한나라당, 조중동, 뉴라이트 등등의 세력들에게 과연 “보수”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그들의 뿌리가 어디인가? 그들은 가깝게는 군부독재의 잔재 또는 부역 세력이고 멀게는 일제시대의 친일세력이며, 조선시대 당쟁의 주류였던 노론세력이다. 이들은 수백 년간 이 땅의 권력과 부를 장악했고, 그들만의 성을 쌓아 특권 주류세력으로 부상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법, 언론, 학계 등등 이 땅의 모든 지배 기재를 장악한 세력들이다.

과연 그들을 보수라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세력에게서 과연 민족이나 상식과 같은 개념을 찾아볼 수 있을까? 그들은 조선시대에는 조선의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개혁을 추구하는 군주를 서슴지 않고 독살하였다. 오로지 중국의 황제만을 추종하는 듯 하면서 자신들의 영달과 탐욕을 추구하였다. 힘의 균형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자, 이들은 앞다투어 나라를 팔았고 친일세력으로 탈바꿈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등 뒤에 숨어 “반공”이라는 무기로 무장하여 죄없는 양민들을 괴롭혔다. 이승만과 결탁하여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고,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앞장서 부역하였다.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이들이 정치 권력을 놓쳐본 것은 단 10년, 1998년부터 2007년까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이었다. 그들이 얘기하는 대로 과연 “잃어버린 10년”의 기간이었다. 물론 이 10년 동안에도 행정부의 권력만이 개혁세력에게 잠시 넘어왔을 뿐, 나머지 모든 지배 기재는 여전히 이들 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동물적인 본능은 누가 자신들의 적인지 그리고 누가 그 적의 핵심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수없이 쓰러져간 민주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 세력의 영악함과 간교함이 어떤지를 알 수 있다. 김구 선생을 시작으로 최근의 노무현까지 이들 세력들의 탄압으로 쓰러져간 인물들은 모두 그 시대의 가장 핵심적 민주개혁 인사였다. 노무현을 죽이고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한명숙을 공격하고 있다.

그들을 “보수”라 규정하고 “보수”라 대우해서는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고 그들을 넘어설 수 없다. 그들은 역사의 반동이고, 전형적인 기회주의 세력일 뿐이다. 그들은 친일세력이고 독재세력이고 부도덕한 부패세력일 뿐이다. 그들은 탐욕만을 추구하며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불구세력일 뿐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아직도 그들을 보수라 부를 것인가? 그들을 보수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그들의 전략에 말려든 것이고 게임은 해보나마나 한 것이다.

그들은 보수가 아니다.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이라도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이라도

김대중 대통령의 615선언 9주년 기념 연설 중, 가장 뼈 아프게 다가왔던 부분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관련된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만일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명 문상객 중 10분지 1인 50만명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럴 순 없다, 매일 같이 혐의 흘리면서 정신적 타격을 주고, 스트레스 주고, 그럴 수는 없다, 50만명만 그렇게 나섰어도 노 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억울하고, 희생자들에 대해 가슴 아프겠습니까.

[“이대로 가면 MB도 국민도 불행해질 것 행동하는 양심 돼야… 방관하는 자, 악의 편”, 오마이뉴스]

그가 옳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슬퍼하고 조문한 사람이 500백만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이라도 나섰더라면 우리는 그를 지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탄핵 때 우리가 노무현을 지켰던 것처럼 그렇게 나섰더라라면 노무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뼈에 사무친다. 우리는 그의 무고함을 알고 있었는데, 그가 그렇게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간악한 언론과 검찰이 잔인하게 그를 짓누를 때에도 우리는 방관자였다. 결국 그는 우리 곁을 쓸쓸히 떠났다. 우리는 그와 함께 할 자격이 없었다. 그와 같은 위대한 인물은 이 척박한 반도땅을 오래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이 운명이었을까?

그가 떠나고 한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슬픔이 가슴 깊이 침잠했다. 까닭 모를 눈물이 때를 가리지 않고 흘렀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노무현의 뜻을 잇고자 하는 모임들이 속속 등장했다. 국민참여정당과 시민주권모임이 출범했고, 노무현재단이 설립되었다. 너무나 크고 위대한 소를 잃었기에 이 볼품없고 척박하고 탐욕스럽기까지한 외양간을 버려두고 싶기도 하지만, 그건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리라. 하여 나는 국민참여정당과 시민주권모임에 가입했고, 노무현재단의 후원인이 되었다.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한 500만명의 사람들 중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인 5만명만 나서준다면 우리는 노무현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노무현은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여기에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조직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제2, 제3의 노무현을 만들어낼 수 없고, 설령 그런 인물들이 나타난다 해도 그들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정신을 살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행동할 때이다.

노무현과 김대중, 그리고 카르마

노무현과 김대중, 그리고 카르마

불과 석달 사이에 우리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인 두 명을 연달아 여의었다. 떳떳하게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고, 대통령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단 두 명의 정치인이 그렇게 스러져 갔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서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대통령도 이렇게 쉽게 떠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공개된 일기 속에서 그는 적어도 5월 초까지는 소소한 일상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었다.

2009년 5월 2일

종일 집에서 독서, TV, 아내와의 대화로 소일.
조용하고 기분 좋은 5월의 초여름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아내와 좋은 사이라는 것이 행복이고
건강도 괜찮은 편인 것이 행복이다.

생활에 특별한 고통이 없는 것이
옛날 청장년 때의 빈궁시대에 비하면 행복하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

인생은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 관계다.
어느쪽을 택하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마지막 일기 중에서]

노무현의 죽음을 가장 슬퍼했던 사람이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20년이나 어린 후배를 먼저 보내야하는 노 정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나 같은 민초도 슬픔을 감당하지 못했는데, 그는 얼마나 비통했을까.

노무현은 유서에서 모든 것은 “운명”이라고 했다. 두 명의 위대한 정치인이 그렇게 떠나간 것은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다. 그것은 그 두 사람의 운명뿐만이 아닌 이 나라, 이 민족의 운명이었다.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하고 독재의 부역자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는 이 현실에다, 무지한 백성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최소한의 도덕성조차 팽개치는 상황에서, 운명은 가장 위대한 두 명의 정치인의 목숨을 요구했다.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통곡했다. 감히 말하건데 노무현의 죽음을 그렇게 서럽게 울어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고, 그 휠체어에는 KARMA(카르마)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이 민족이 지은 업보를 두 명의 위대한 정치인이 지고 떠났다.


©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이 민족의 카르마는 또 어떤 댓가를 요구할 것인가? 삼천리 금수강산을 내놓으라 할 것인가? 그 정도 댓가를 치루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나 있는 것일까? 카르마에는 에누리가 없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다.

미디어오늘의 이용호 화백은 “지팡이와 밀짚모자”라는 만평에서 이 세상을 떠난 두 정치인의 다정한 모습을 아련히 그려 놓았다.


© 미디어오늘 이용호 화백

슬픔은 이제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정치적 고아가 되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정치적 고아가 되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 라디오 속보로 흘러나오는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했다. 목이 메였다. 지난 달부터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려왔기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서거 소식은 여전히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다.

김대중이 누구던가. 박정희, 전두환 독재 시절, 온몸으로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그리하여 그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디면서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 아니던가.

오늘 그가 갔다. 노무현 대통령이 떠난지 100일도 안되어 김대중 대통령도 떠났다. 해방 이후, 대통령이라 부를 수 있었던 단 두 명의 정치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갔다.

죽기 직전까지 독재에 대해 걱정해야 했고, 민주주의에 대해 걱정해야 했고,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대해 노심초사해야 했던 대통령이 그렇게 갔다. 도덕이 밥먹여주냐며,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며 아무 생각없이, 아니 너무나 탐욕스럽게 이명박을 찍은 국민들을 뒤로 하고 그가 세상을 떠났다.

김대중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없었다. 국민들은 여전히 박정희, 전두환 같은 군부독재자들에게 짓밟히고 있었을 것이고, 정권 교체도 없었을 것이고, 노무현 대통령도 없었을 것이다. 민주주의 상징이자 민주주의 그 자체였던 그가 그렇게 갔다.

노무현이 가고, 김대중이 갔다. 이제 누구에게 기대겠는가? 이 땅의 힘없는 백성들은 이제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절망 안에 또다른 절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두달 전 김대중 대통령이 615 선언 9주년에 했던 연설이 우리에게 들려준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나는 오랜 정치 경험으로, 감각으로, 만일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가 현재와 같은 길로 나간다면 국민도 불행하고, 이명박 정부도 불행하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리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큰 결단 내리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더불어서 여러분께도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정권이) 백 수십명 죽이고, 인혁당도 죽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 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위해서 우리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양심, 행동할 때 누구든지 사람은 마음 속에 양심이 있습니다. 행동하면 그것이 옳은 일 인줄 알면서도 무서우니까, 시끄러우니까, 손해보니까 회피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국민의 태도 때문에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죄 없이 세상을 뜨고 여러 가지 수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는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 양심에 합당한 일입니까.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만일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명 문상객 중 10분지 1인 50만명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럴 순 없다, 매일 같이 혐의 흘리면서 정신적 타격을 주고, 스트레스 주고, 그럴 수는 없다, 50만명만 그렇게 나섰어도 노 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억울하고, 희생자들에 대해 가슴 아프겠습니까.

나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게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돼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그리고 독재자에 고개를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간 화해 협력을 이룩하는 모든 조건은 우리가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그렇게 해서 온 국민들이 바른 생각도 갖고, 표현이나 행동해야 합니다. 선거 때는 나쁜 정당 말고 좋은 정당 투표해야 하고, 여론조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4700만 국민이 모두 양심을 갖고 서로 충고하고 비판하고 격려한다면 어디서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일어나고, 어디서 소수 사람들만 영화를 누리고, 다수 사람들이 힘든 이런 사회가 되겠습니까.

[“이대로 가면 MB도 국민도 불행해질 것 행동하는 양심 돼야… 방관하는 자, 악의 편”, 오마이뉴스]

그는 85세의 고령에도 마지막까지 피맺힌 목소리로 절규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그의 정치 역정은 끝까지 이 땅의 독재와 맞붙는 것으로 끝났다. 목이 메인다.

노무현이 가고 김대중이 갔다. 우리들은 정치적 고아가 되었다. 이제 우리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 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님 만나 두 분이 못다한 정 나누십시오. 저희들은 두 분이 사무치게 그리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