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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

민주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

도널드 핀켈(Donald L. Finkel)  교수가 쓴 <침묵으로 가르치기>를 읽다가 ‘민주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장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것을 가르치든지 가르치는 사람(교사)이 민주적인 방식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탐구 활동이란 것이 본래 민주적이다. 탐구할 때는 진실을 찾기 위해 권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
  2.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 정신을 함양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교사는 민주사회에서 제몫을 톡톡히 해낼 민주시민을 길러낼 책임을 느낀다.
  3. 교사의 임무는 학생의 성격 개발에 힘쓰는 것이다. 학생의 독립심, 자신감, 자율성, 판단력, 책임감, 집단의 일원으로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을 길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런 성격 특질들이 바로 민주시민이 갖춰야 할 기본 덕성이다.
‘표현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가

‘표현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는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 표현의 자유는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나라치고 제대로된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없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가해자들이 여전히 강자이거나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 그들이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는 어느 정도 제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면 안 된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허락된 독일이지만, 그것은 금기이다.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면 안 된다. 나치가 유대인에 대해 가해자였듯, 이스라엘의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에 대해 가해자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인들도 흑인들에 대해 제한 없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 안 된다. 그들은 아직도 갚아야할 빚이 적지 않다.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기본 권리라 하더라도,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방의 언론들은 이슬람교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현대 역사를 살펴 보면,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은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 대해 가해자들이였다. (이러한 이유로 알카이다의 테러가 정당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피해자의 입장을 배려해야 한다.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먼저 주장하기 전에, 그 표현으로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결코 자기 검열이 아닌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이다.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역사적) 피해자들과 사회의 약자들이다. 이들은 지배계급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도 된다. 그들의 표현들이 해학이 넘치고 정곡을 찌를 때, 그것은 조롱도 모욕도 아닌 풍자가 된다. 따라서 풍자는 피해자들과 약자들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 따르면,

정부는 빈자들로부터 부자들을, 또는 가지지 않은 자들로부터 가진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Civil government, so far as it is instituted for the security of property, is in reality instituted for the defense of the rich against the poor, or of those who have some property against those who have none at all.

<아담 스미스, 국부론>

2014년 대한민국 박근혜 정부는 아담 스미스가 말한 이 언술에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 가진 자들을 철저히 보호하고 부족한 세수는 서민들에게서 거둔다. 이것이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다.

서민들은 부자를 보호하는 정부를 지지하고, 그리하여 그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완성된다. 이러한 정부를 지지하고 선출하는 서민들을 노예라 부른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사실상 노예제가 내재된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

가장 슬픈 코미디는 이들 노예들이 스스로 노예인지도 모르고 정부를 앞장서서 옹호하고 있으며, 그 선봉에 어버이연합과 일베충 등이 있다. 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에서 정부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과 같다고 보면 된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여전히 아담 스미스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

최선의 선택

최선의 선택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로선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5·16이 그 초석을 만들었다고 볼 때 바른 판단을 내리셨다고 본다.”

박근혜 말처럼 그의 아버지 박정희는 늘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일제시대에는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혈서를 썼고, 결국 원하던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 해방이 되자 광복군으로 기어들어갔고, 좌익이 득세하던 시기에는 남로당 군총책이 되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군 장성이 되어 호시탐탐 쿠데타의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마침내 4·19 혁명으로 이룩한 민주주의를 총칼로 무참하게 무너뜨렸다.

박정희는 최선을 다한 독재자였고, 최선을 다해 어린 여자들을 희롱하였으며, 최선을 다해 부하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등졌다. 박정희의 최선의 선택은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최악의 불행이었고, 공포였다.

박정희는 독재자이기 이전에 기회주의자였다. 식민지 시대와 해방 정국 그리고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기회만 주어지면 권력을 향해 카멜레온처럼 변신했다. 물론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지만, 그 능력은 자신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악마의 주술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민주공화국의 가장 근간이 되는 헌법 1조이다. 박정희는 헌법 1조를 어긴 범죄자일 뿐이다.

그런 박정희를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자들은 민주공화국을 부정하는 아주 위험한 사람들이고, 민주공화국에서 삶을 영위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그것은 마치 독일에서 아직도 히틀러를 추종하는 네오나치 세력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리 민주공화국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 근본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은 용인될 수 없다.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는 5·16 쿠데타가 초석이 된 것이 아니고,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이 초석이 된 것이다. 5·16 쿠데타와 유신헌법은 민주주의의 반동일 뿐 초석이 될 수 없다.

5·16 쿠데타를 최선의 선택, 바른 판단, 구국의 혁명이라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이든 간에 민주공화국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박근혜의 대통령 결격사유는 그가 독재자의 딸이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선의 선택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새누리당을 찍는다는 것

새누리당을 찍는다는 것

안철수는 진영(당)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했고, 유시민은 사람도 중요하지만 당도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정치에 있어서 사람보다도 당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에 있어서 당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이나 정당을 지지하기 전에 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그 인물이나 정당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신중히 살펴보는 일이다. 그 역사의 궤적이 바로 그 인물이 또는 그 정당이 어떤 좌표를 가지고 나아가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516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의 민주공화당(공화당)이 나온다. 공화당이 창당될 때 이승만의 자유당 잔재 세력을 흡수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자유당과도 무관하지 않다. 박정희의 공화당은 전두환의 민주정의당(민정당)으로 흡수되고, 민정당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삼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탈바꿈한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이 되고, 신한국당이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한나라당이 되며, 바로 이 한나라당이 이름을 바꿔 새누리당이 된다.

지금 새누리당의 대표가 박정희 딸인 박근혜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독재자 아버지가 원조인 당을 수십년이 지난 후에 딸이 물려받은 것은 것이다. 친일과 독재와 군사쿠데타의 피가 면면히 흐르는 정당이 바로 새누리당인 것이다.

총선이나 대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를 찍는다는 것은 친일과 독재에 부역하는 것이고, 군사쿠데타를 용인하는 것이며, 민간인 사찰과 같은 중대 범죄에 암묵적 공범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히틀러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네오나찌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새누리당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본질은 보수도 아니고, 극우도 아니다. 그 본질은 자기만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목적만 달성할 수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회주의인데, 그것들이 도를 지나쳐 이미 범죄의 수준을 넘어섰다.

새누리당을 찍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범죄자들과 한패가 된다는 것이고, 본인이 기회주의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과 한패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들을 찍어 국회의원으로 만들고, 대통령으로 만들라. 그들을 처벌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들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

새누리당은 어떤 짓을 해도 유권자 30%의 고정표가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그렇게 후안무치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름을 놔둔다고 새살이 되지 않는다. 고름은 도려내야 한다. 새누리당은 민주주의의 고름과 같은 존재다. 투표율 70%면 도려낼 수 있다.

새누리당을 찍는다는 것은 단지 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고, 서민들의 삶을 짓밟는 것이며, 우리 아들 딸들의 미래를 망치는 것이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행진곡

세상에서 가장 슬픈 행진곡

세상에서 가장 슬픈 행진곡을 들을 때면 비가 와야 한다. 하염없이 슬프게 비가 와야 한다.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고, 그들의 한이 눈물이 되어 온 산천을 적셔야 한다.

30년이 흘렀어도 그들은 눈을 감고 안식할 수 없다. 그들을 죽인 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죽어서도 죽을 수 없는 사람들, 죽어서도 쉴 수 없는 사람들, 한때는 이 땅의 민주주의의 물줄기가 되었던 광주. 비만 슬프게 내린다.

일년에 단 한 번이라도 경건하게 듣고 불러야 할 그 슬픈 행진곡은 이제 “방아타령”으로 바뀌어 버렸다. 광주 망월동 묘지의 상석을 밟았던 자, 광주의 영령들 앞에서 파안대소 했던 자가 대통령이 되자 광주의 영혼들은 다시 울어야 했다. 세상은 잔인했고, 그리고 무심했다.

전태일, 광주, 그리고 노무현. 앞서 간 사람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슬픈 행진곡을 나지막히 불러주는 것뿐이다. 산 자들은 그들을 따를 것인가. 정녕 그들을 따를 것인가.

슬픈 비만 애처로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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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백기완, 님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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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기어이 희망을 보여주겠다는 것인가

유시민, 기어이 희망을 보여주겠다는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2000년 총선 때 부산에서 낙선하고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감동적인 말이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도 않아야 하지만, 밭을 잘 알기도 해야 한다. 밭을 잘 알아야 그 밭을 어떻게 가꿀 것인지,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를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민주주의에 대한 책을 계획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가는 것 같습니다.” 노무현은 밭을 알아버렸다.

유시민이 정리한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보름 전쯤에 나는 유시민에 대해 “희망을 주지 마라”라는 글을 썼다. 노무현 대통령을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나는 나를 포함하여 우리 국민들이 그런 수준의 정치인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이다. 우리 국민들은 자격이 없다.

유시민은 김진표와의 단일화를 통해 경기도 지사가 되겠다고 했다. 어쩌겠는가. 기어이 희망을 만들어보겠다는데야. 말은 희망을 주지 말라 했지만, 유시민 펀드에 가입하고 경기도에 사는 지인들에게 전화도 했다. 그리고 그는 극적으로 경기도 지사 선거의 야권 후보가 되었다. 물론, 김진표가 성숙하고 합리적이었기에 가능했다.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노무현, 유시민 같은 정치인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돈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 돈이란 것도 어차피 2% 정도의 강부자들이 가지는 것이지만, 대부분은 그 돈에, 그리고 아파트 값에 목을 매고 있다. 4대강 죽이기로 온 강산이 초토화되어도 이명박의 지지율은 50%가 넘고, 김문수, 오세훈은 유시민, 한명숙의 지지율을 넘어선다. 온갖 거짓이 난무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이 나라는 노무현 보다는 이명박이, 유시민 보다는 김문수가, 그리고 한명숙 보다는 오세훈이 더 어울리는 나라다. 부정할 수 있을까? 노무현을 그렇게 보내고도 부정할 수 있을까? 혹시 모르겠다. 서울시민들이, 경기도민들이 갑자기 정신 못차리고 한명숙, 유시민을 선택할 지도. 하지만, 그런 일이 진정 일어나겠는가? 민주주의가 밥먹여 주냐는 사람들 천지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밭은 여전히 척박하고, 잡초들은 무성하다. 밭을 탓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역사든 국민 수준 만큼 간다. 유시민의 도전은 아름답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