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ed by
Tag: 시

삶의 역설

삶의 역설

삶이란 인간의 앎과 소유가 실체 없는 허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당위적 과정인데, 실제 일생 동안 그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삶의 역설이다. 따라서 삶이란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관념의 허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다 끝내버리는 고통의 연속으로 다시 정의될 수 있다. 고은의 시는 그런 사실을 건조하고 앙상하게 드러낸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고은, 삶>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나는 내 아이에게 일체의 요구와
그 어떤 교육도 하지 않기로 했다
미래에서 온 내 아이 안에는 이미
그 모든 씨앗들이 심겨져 있을 것이기에

내가 부모로서 해줄 것은 단 세 가지였다

첫째는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
동물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잠자고 맘껏 해보며
그 속에서 고유한 자기 개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둘째는 ‘안 되는 건 안 된다’를 새겨주는 일이다
살생을 해서는 안 되고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되고
물자를 낭비해서는 안 되고
거짓에 침묵동조해서는 안 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 는 것을
뼛속 깊이 새겨주는 일이다

셋째는 평생 가는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습관과
채식 위주로 뭐든 잘 먹고 많이 걷는 몸생활과
늘 정돈된 몸가짐으로 예의를 지키는 습관과
아름다움을 가려보고 감동할 줄 아는 능력과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홀로 고요히 머무는 습관과
우애와 환대로 많이 웃는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박노해,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2010, 부분>

부모에게 자식이란 신이 주신 선물이지만,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자식은 부모를 통해 세상에 나오지만,  자기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부모의 역할은 그저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다.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단 세 가지다.

  1.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산다는 것, 자기 인생과 관련한 모든 것은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책임진다는 것.
  2.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
  3. 삶의 궁극적 목표는 ‘참나’를 깨닫는 것.

부모나 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다. 그것이 배움이자 교육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이비거나 쓸데없는 것이다.

시가 와 닿지 않는 이유

시가 와 닿지 않는 이유

시적 외양은 다 갖춰졌는데 와 닿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 말의 꼬임이 없다.
  • 너무 복잡해서 흐름이 안 보인다.
  • 안 깎은 연필 글씨처럼 표현이 뭉툭하다.
  • 말의 드리블이 느리거나 서툴다.
  • 빌려 입은 옷처럼 멋 부린 느낌이다.
  • 세부가 없이 너무 담방하다.
  • 뻔한 말장난을 하고 있다.
  • 처음부터 하려는 얘기가 다 보인다.
  • 머릿속에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
  • 억지로 짜맞춘 느낌이다.
  • 이 시를 왜 썼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성복, 무한화서, 2015, p. 92>

쉬는 날

쉬는 날

사느라고 애들 쓴다.

오늘은 시도 읽지 말고 모두 그냥 쉬어라.

맑은 가을 하늘가에 서서

시드는 햇볕이나 발로 툭툭 차며 놀아라.

<김용택, 쉬는 날, 2016>

img_3566

길가의 활짝 핀 코스모스를 보며, 김용택의 시를 생각했다. 그래. 오늘 같은 날은 아무 일도 안 하고, 푸른 하늘 아래 한들거리는 코스모스나 보면서 놀아야겠다.

사랑은 불이어라

사랑은 불이어라

딸아 사랑은 불 같은 것이란다
높은 곳으로 타오르는 불 같은 사랑
그러니 네 사랑을 낮은 곳에 두어라

아들아 사랑은 강물 같은 것이란다
아래로 흘러내리는 강물 같은 사랑
그러니 네 눈물을 고귀한 곳에 두어라

우리 사랑은 불처럼 위험하고
강물처럼 슬픔 어린 것이란다
나를 던져 온전히 불사르는 사랑
나를 던져 남김없이 사라지는 사랑

사랑은 대가도 없고 바람도 없고
사랑은 상처 받고 무력한 것이지만
모든 걸 다 가져도 사랑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사랑이 길이란다
사랑이 힘이란다
사랑이 전부란다

언제까지나 네 가슴에
사랑의 눈물이 마르지 않기를
눈보라 치는 겨울 길에서도
우리 사랑은 불이어라

<박노해, 사랑은 불이어라, 2013>

시를 쓰는 법

시를 쓰는 법

하이쿠의 성인이라 불리는 마쓰오 바쇼는 시를 쓰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나무에 대해선 소나무에게 배우고
대나무에 대해선 대나무에게 배우라.
그대 자신이 미리 가지고 있던 주관적인 생각을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을 대상에 강요하게 되고 배우지 않게 된다.
대상과 하나가 될 때 시는 저절로 흘러나온다.
그 대상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안에 감추어져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 그 일이 일어난다.
아무리 멋진 단어들로 시를 꾸민다 해도
그대의 느낌이 자연스럽지 않고
대상과 그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면,
그때 그대의 시는 진정한 시가 아니라
단지 주관적인 위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마쓰오 바쇼, 류시화 옮김, 바쇼 하이쿠 선집>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시인 백석(白石)이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시에서 했던 말.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성탄절을 맞아 세상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안과 위로를 보낸다. 지금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사람들은 하늘이 가장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