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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청첩장

청첩장

새해 들어 두 장의 청첩장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두 장 모두 안도현의 시가 적혀 있다.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요즘 젊은이들도 사랑에 관한 안도현의 시를 많이 읽나 보다. 특히, 안도현의 <사랑한다는 것>은 결혼 전에 아내가 보내 준 시다.

청첩장을 받아 보니 풋풋했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세월이 살과 같이 흘렀다.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안도현, 사랑한다는 것 中에서>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中에서>

그 젊은이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

나는 단순하게 살고 싶다. 비가 내릴 때 창가에 앉아 시험 치지 않을 책을 읽고 싶다.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원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내 몸에 귀를 기울이고 싶고 달이 높이 떠올랐을 때 잠들어 천천히 일어나고 싶다. 급히 달려갈 곳도 없이. 나는 인류가 스스로 부과한 돈과 시간, 혹은 어떤 인위적인 제한들에 의해 지배받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존재하고 싶다. 경계 없이, 무한하게. I want to live simply. I want to sit by the window when it rains and read books I’ll never be tested on. I want to paint because I want to, not because I’ve got something to prove. I want to listen to my body, fall asleep when the moon is high and wake up slowly, with no place to rush off to. I want not to be governed by money or clocks or any of the artificial restraints that humanity imposes on itself. I just want to be, boundless and infinite. <류시화, 시로 납치하다 중에서>
신이 아이들을 보낸 이유

신이 아이들을 보낸 이유

신이 아이들을 보낸 이유는
단지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 열게 하고 우리를 덜 이기적이게 하며
더 많은 연민과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고
우리 영혼에게 더 높은 목적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밝은 얼굴, 행복한 미소,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다

God sent children for another purpose than merely to keep up the race- to enlarge our hearts; and to make us unselfish and full of kindly sympathies and affections; to give our souls higher aims; to call out all our faculties to extended enterprise and exertion; and to bring round our firesides bright faces, happy smiles, and loving, tender hearts.

<Mary Botham Howitt>

이타카, 삶은 여정이다

이타카, 삶은 여정이다

오쇼 라즈니쉬가 얘기했듯이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다. 삶은 무엇을 이루려는 목표가 아니고 경험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 순간순간의 경험이 삶이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의 삶은 거대한 신화를 만들어낸다. 이타카는 삶의 여정을 떠나게 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삶을 산다. 그 순간순간을 최대한으로 경험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법이다.

이타카로 여행을 떠날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긴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고네스와 키클롭스
분노에 찬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말라
너의 정신이 고결하고
너의 영혼과 육체에 숭고한 감정이 깃들면
그들은 너의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
네가 그들을 영혼 안에 들이지 않고
너의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만 않으면
라이스트리고네스와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그 길이 긴 여정이 되기를
큰 즐거움과 큰 기쁨을 안고
처음 본 항구로 들어가는
여름날 아침이 수없이 많기를
페니키아 시장에서 길을 멈추고
멋진 물건들을 사라
진주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종류의 감각적인 향수를
가능한 한 많은 관능적인 향수를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에 들러
그곳의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너의 최종 목표이니
그러나 결코 서두르지는 마라
여행은 여러 해 계속되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늙어서 그 섬에 도착하는 것이 더 나으니
너는 길에서 얻은 모든 것들로 이미 풍요로워져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으리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물했다
이타카가 없었다면 너는 길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설령 이타카가 보잘곳없는 곳일지라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다
너는 길 위에서 경험으로 가득한 현자가 되었으니
이타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이해했으리라

<콘스탄틴 카바니, 류시화 옮김, 이타카(Ithaka)>

시래기

시래기

시골 아주머니께서 시래기 한 다발을 보내셨다. 푸르누르스름하고 낡은 잎사귀들이 정갈하게 말라서 정성껏 묶여 있었다. 그것들에게서 햇볕과 바람과 흙과 시간의 냄새가 났다. 이제 그것들을 된장과 함께 보글보글 끓이면 추운 겨울 일용할 시래기된장국이 된다. 시래기된장국의 구수하고 푸근한 맛을 생각하며 도종환의 ‘시래기’라는 시를 읽었다.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저 헌신

<도종환, 시래기>

이 시를 읽으니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은 그가 마치 시래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한없이 부드러운 리더십의 소유자였지만, 해야할 일은 책임지고 끝까지 해내고마는 외유내강의 표본이었다. 바람 맞고 눈 맞아가며 견뎌온 그의 헌신과 시래기가 자꾸 겹쳤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시래기 같이 묵묵히 견뎌온 사람들이 세상을 지키고 바꿨다.

오늘 저녁은 시래기된장국을 먹어야겠다.

내일은 없다

내일은 없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지금뿐이다. 지금을 살지 않고는 삶을 살아낼 방법이 없다. 어제와 내일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관념의 시간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새해에는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길 바란다.

내일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내일은 없나니
…………

<윤동주, 내일은 없다>

삶의 역설

삶의 역설

삶이란 인간의 지식과 소유가 실체 없는 허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당위적 과정인데, 실제 일생 동안 그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삶의 역설이다. 따라서 삶이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관념의 허구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다 끝내버리는 고통의 연속으로 다시 정의될 수 있다. 고은의 시는 그런 사실을 건조하고 앙상하게 드러낸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고은, 삶>

덧.

이런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 고은이 성추행을 일삼는 고약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또한 삶의 역설이 아닐까.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 나는 내 아이에게 일체의 요구와 그 어떤 교육도 하지 않기로 했다 미래에서 온 내 아이 안에는 이미 그 모든 씨앗들이 심겨져 있을 것이기에 내가 부모로서 해줄 것은 단 세 가지였다 첫째는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 동물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잠자고 맘껏 해보며 그 속에서 고유한 자기 개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둘째는 ‘안 되는 건 안 된다’를 새겨주는 일이다 살생을 해서는 안 되고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되고 물자를 낭비해서는 안 되고 거짓에 침묵동조해서는 안 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 는 것을 뼛속 깊이 새겨주는 일이다 셋째는 평생 가는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습관과 채식 위주로 뭐든 잘 먹고 많이 걷는 몸생활과 늘 정돈된 몸가짐으로 예의를 지키는 습관과 아름다움을 가려보고 감동할 줄 아는 능력과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홀로 고요히 머무는 습관과 우애와 환대로 많이 웃는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 <박노해,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2010, 부분>
부모에게 자식이란 신이 주신 선물이지만,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자식은 부모를 통해 세상에 나오지만,  자기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부모의 역할은 그저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다.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단 세 가지다.
  1.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산다는 것, 자기 인생과 관련한 모든 것은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책임진다는 것.
  2.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
  3. 삶의 궁극적 목표는 ‘참나’를 깨닫는 것.
부모나 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다. 그것이 배움이자 교육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이비거나 쓸데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