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이 겸손해야 하는 까닭

임마뉴엘 스베덴보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튼과 어깨를 나란히할 정도로 유명한 과학자였다. 그는 57세 때부터 27년간 지상과 영계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천국과 지옥을 체험했고, 그것들을 방대한 기록으로 남겼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그가 신을 버리고 과학을 추종하는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과학은 놀라운 기적을 인류에게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만은 절대로 못합니다. 첫째 현미경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둘째 싹트는 보리알 하나도 생명을 가진 것을 창조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p.63]

인간유전자 염기서열을 판독해낸다는 인간의 과학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말처럼 생명을 가진 것은 짚신벌레 한마리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간의 과학으로는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신이기에 “신은 없다” 또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다. 과학으로 볼 수 없으면 정말 없는 것인가. 인간의 과학이 그만큼 완전한 것인가.

엄청난 발전을 이룬 과학이지만,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은 갠지즈강의 모래알 몇 개뿐이다. 진실로 인간들은 신 앞에, 그리고 신이 창조한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 인간들의 오만은 파멸을 불러온다. 신은 언제나 그것을 경고하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못들은 체 하거나 실제로 듣지 못한다. 그 소통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그리고 불교

20세기 가장 위대한 과학자 한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이 주저없이 아인슈타인을 꼽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단지 뛰어난 과학자가 아닌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소위 상대성 이론이라 불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과학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과 종교에 대한 깊은 천착이 있었던 완성된 영혼이었다.

그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The religion of the future will be a cosmic religion. It should transcend personal God and avoid dogma and theology. Covering both the natural and the spiritual, it should be based on a religious sense arising from the experience of all things natural and spiritual as a meaningful unity. Buddhism answers this description. If there is any religion that could cope with modern scientific needs it would be Buddhism.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인 종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하느님을 초월하고, 교리나 신학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를 모두 포함하면서, 자연과 정신 모두의 경험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감각에 기초를 둔 것이어야 한다. 불교가 이런 요구를 만족시키는 대답이다. 만일 현대 과학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곧 불교가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불교는 가장 과학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2500여년 전에 붓다에 의해 말씀되어진 이 진리들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여전히 진보적이고 새롭다. 참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A human being is part of the whole called by us universe, a part limited in time and space. We experience ourselves, our thoughts and feelings as something separate from the rest. A kind of optical delusion of consciousness. This delusion is a kind of prison for us, restricting us to our personal desires and to affection for a few persons nearest to us. Our task must be to free ourselves from the prison by widening our circle of compassion to embrace all living creatures and the whole of nature in its beauty. The true value of a human being is determined by the measure and the sense in which they have obtained liberation from the self. We shall require a substantially new manner of thinking if humanity is to survive.

참된 진리와 가르침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하나로 맞닿아 있다. 예수를 닮고자 하는 것과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결국 하나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야기와 간디의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져 있고, 호킨스의 주장과 상통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류는 이미 구원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것을 깨우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를 닮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책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는 예수다.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인류의 역사는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로 나뉘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한 마굿간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왔으나, 세상은 그를 견딜 수 없었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리고 세상은 그를 신의 아들로 만들었다.

그가 광야로부터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다. 사람들은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수천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온 사람들이었다. 인류의 구원자를 기다려온 사람들이 정작 그가 나타나자 그에게서 달아나려 했다. 사람들에게 그는 이방인이었고, 걸인이었고, 위험한 혁명가일 뿐이었다.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두려웠다. 그의 가르침이 두려웠다. 진리가 두려웠다. 그래서 그를 죽여야만 했다.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여야만 했다.

그가 죽었어도 그의 가르침은 남았다. 말씀으로 남아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가 죽었어도 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예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를 외면하고 싶은데, 외면해야만 하는데, 그의 말씀은 주홍글씨로 남아 사람들의 가슴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깨달았다. 그를 신의 아들로 올리고, 그의 말씀 중 견딜 수 있는 것만 골라 경전을 만들었으며, 그 경전에 대한 해석을 특권화했다. 간교한 사람들은 예수를 팔아 장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천 년이 흘렀다.

많은 교회들이 여전히 예수를 팔았고, 사람들은 위로를 얻으러 교회에 갔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 되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거세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의 가르침은 간교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기복으로 전락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예수에게 기도를 했고, 권력을 얻기 위해 교회에 갔다. 예수는 가진 자들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주 드물게 예수의 말씀을 깨닫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영적 스승, 구도자, 신비가 등으로 불렸고,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복기하려 했다.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 복음 강의”도 그런 시도 중 하나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려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를 닮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읽어야할 책이다. 역자인 류시화는 책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를 추종하지 말고 나처럼 되라.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

[도마 복음 강의 서문 중에서]

모든 가르침이 일관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진리는 이미 수천년 전에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세상을 구원할 진리가 이미 전해졌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고,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든지 이 말씀들의 속뜻을 발견하는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리라.

[도마 복음 1절]

예수는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미리내 님이 권해주신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Discovery of the Presence of God)”를 읽었다.

사람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경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의식 수준이 낮은 나의 처지에서 그런 내용들은 이해는 고사하고 범접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내가 품고 있던 신과 영혼과 종교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의문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깨달음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많은 영혼들이 왜 가치있는지, 의식의 진화와 성장 단계가 무엇인지, 궁극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지향이 무엇인지, 왜 성인들은 용서와 사랑을 한결같이 강조했는지 이 책은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사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신의 본성을 설명해 놓은 부분은 그동안 내가 그 어떤 종교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가장 진보된 것이었다.

  1. 신성(Divinity)은 비선형적이고 불편부당하고 시비분별이 없으며, 편파성과 취사선택하는 편애를 넘어서 있다.
  2. 신성은 변덕스럽거나 분별하지 않으며, 추정적인 인간 감정들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신성한 사랑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이다. 한계는 에고의 귀결이다.
  3. 신의 정의는 신성의 전능과 전지의 자동적 귀결이다. 신은 ‘행’하거나, ‘작용’하거나, ‘원인’이 되지 않고 그저 ‘있을’ 뿐이다. 신성의 성질은 무한한 힘의 장으로서 방사되는데, 그 무한한 힘의 장에 의해 존재하는 전부는 있는, 그리고 되어 있는 ‘것’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렬된다. 각각의 영혼/영은 이렇듯 고유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수준을 향해 끌려가는데, 그것은 마치 바다 속의 코르크나 전자기장 속의 쇳가루의 움직임과 같다.
  4. 신성은 낮은 힘을 훨씬 넘어서 있는 무한한 힘의 고유한 성질로 말미암아 절대적 지배권이다. 낮은 힘은 위치성과 통제의 도구이며 유한하다. 힘은 무한한 세기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힘을 구할 필요가 없는 신성한 참나로서의 힘의 근원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5. 신성의 막강함과 전적인 현존 내에서, 존재하는 전부는 스스로를 정렬시킨다. 이 조정은 영적 선택의 귀결이다. 자유는 신성한 정의에 고유하다.
  6. 의식의 무한한 장으로 표현된 신성의 전지와 전능은, 실상을 가능성의 전 단계에 걸쳐 확인해 주는 의식 연구 측정 기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생각, 행위, 결정이 시간과 장소 너머에 있는 의식의 무한한 장에 각인된다. 이 각인에 의해, 정의가 보증된다.

[데이비드 호킨스,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pp. 152-153]

겸손한 삶, 내맡기는 삶,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한 삶, 결국 인류 역사상 모든 성인들과 스승들이 한결같이 가르쳤던 내용들이 진리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에게는 새로운 화두가 생겼는데, 그것은 환상으로 명명된 이 차원에서의 삶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성철 스님의 법문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았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탐욕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혼 간디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Earth provides enough to satisfy every man’s need, but not every man’s greed.

자연은 모든 인간의 “필요”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의 “탐욕”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라는 이 간결한 말은 지금 우리가 처한 경제 위기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결국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는 끝없는 탐욕의 추구에 있다. 문제의 근본 원인이 간단하게 진단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인간들은 그 탐욕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청빈하고 간소하게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들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규범이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시작되는 이 경제 위기 속에서 인간들이 삶의 방법을 보다 현명하게 배워나가기를 바란다. 지능이 있는 생명체라면 그렇게 진화해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런 피눈물나는 댓가를 치루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다.

인간들은 신과 자연 앞에 겸손해야하며,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모든 종교가 인간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http://www.languageinindia.com/dec2002/gandhi1.jpg

황금률이 사라진 종교

예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말씀과 행적들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지켜야 될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한 진리들이다. 그 진리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것을 실천하기란 만만치 않다. 황금률이라 알려진 다음의 말씀도 그 중 하나이다.

너희는 다른 사람이 네게 해 주길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 주어라.

[누가복음 6:31]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해 주었으면 하는 대로,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다.

[마태복음 7:12]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그 높은 경지를 따라갈 수는 없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이 네게 해 주길 바라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이다. 그런데, 예수가 이런 말씀을 하시기 500년 전쯤, 중국의 공자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子貢 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공이 여쭈었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논어 위령공:23]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야기되어 왔고, 기독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가르쳐왔다. 문제는 그런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고, 그 종교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의 행태이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한 목사가 “스님들이 빨리 예수를 믿어야 한다”며 설레발을 쳤다. 이런 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고, 예수를 모욕하고,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자들이다.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한 자가 대통령이 되는 나라이니, 저런 목사같지 않은 목사들이 날뛰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만약, 어느 유명한 스님이 우리나라 목사들은 빨리 부처를 믿어야 한다,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산다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면 이 땅의 개신교도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사찰마다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 아닌가.

성숙한 종교인들은 다른 이들의 종교도 부정하지 않는다. 올라가는 길은 조금씩 다르지만 (많이 다른 것도 아니다) 그 정상에서는 다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다른 이들의 종교를 부정하는 자들은 자신의 종교도 부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이고, 부처의 가르침이며, 공자의 가르침이다.

지역과 이념과 계급 갈등으로 시달려온 이 한반도에 종교 갈등이라는 또다른 갈등이 추가되었다. 불과 6개월만에 이 나라는 끝모를 나락으로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다.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라 놀랍지도 않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다시 희망을 세워나가냐는 것이다. 절망이 깊어지면, 다시 희망이 찾아 올 것인가.

경건한 공항

자히르는 무릎을 꿇었다. 눈을 감고 기도했고, 메카를 향해 절을 했다. 공항 활주로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독실한 무슬림인 그는 자기 종교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묵묵히 메카를 향해 기도할 뿐이었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은 단지 공항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공항에서 기도한 것 뿐이었다.

평범하면서도 엄숙한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공항을 모스크로 만들었다. 종교는 그렇게 스스로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강요하고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내어 찬송하지도 간구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겸손하고 경건한 자세는 나를 그리고 공항 전체를 압도했다. 그레고리안 성가가 은은하게 들리는 그 어떤 성당 보다도 더 성스러운 그의 모습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중앙아시아의 비단길을 가기 전 자히르가 머문 공항은 그렇게 경건하게 변해갔다.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납치되었다 한다. 그 젊은이들은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러 그 위험한 지역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추측컨대 그들 대부분은 착하고 순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일게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슬람 지역 같이 다른 종교를 믿는 곳에서의 선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종교가 있지만, 그 중 기독교의 배타성은 으뜸이라 하겠다. 다른 모든 종교를 우상 숭배라고 폄하하면서 하나님만이 모든 죄를 사하고 구원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도 천국에 갈 수도 없다고 한다.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형제 종교들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나 유대교의 여호와나 이슬람교의 알라는 부르는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신이다. 그들이 인정하는 선지자들이 다를 뿐 그 뿌리는 한군데이다.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유대교를 믿는다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들이 얘기하는 신은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자신들의 종교만이 옳은 종교이고, 다른 종교들은 모두 이단이고 사교이고 우상 숭배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은 계속될 것 같다. 물론 납치가 옳다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의 종교 활동 자유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에 대한 예의는 갖추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겨레신문의 ‘한국=기독교 선교’ 인식 탓 피해 가능성이란 기사를 보고 나는 정말 놀랐다.

한국 개신교 신자 1300여명은 지난해 8월 아프간에서 축제를 벌이려다가, 추방 직전에 행사를 취소한 바 있다. 당시 아프간 대통령까지 나서 추방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2002년부터 3년 동안 카불에서 봉사했던, 한국제이티에스의 유정길씨는 “선교단체들이 심지어 무슬림사원에서 통성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을 공표하기도 했다”며 “이를 통해 한국인들이 모두 개신교 선교사로 인식돼 한국인들이 테러의 표적이 떠올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무슬림 사원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통성 기도를 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그 나라 사람들은 어떤 눈으로 보았을까. 정말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러 온 사도들로 보았을까? 아닐 것이다. 자신들의 종교를 부정하고 파괴하러 온 침략자들로 보았을 것이다.

다른 종교를 부정하고 오직 기독교만이 유일 정통 종교라고 주장하고 위와 같은 양식없는 행동을 한다면 기독교만 고립되고 인정받지 못하며 지탄을 받을 뿐이다. 절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고, 무슬림 사원에서 통성 기도를 하는 기독교인들. 종교에 대한 천착이 너무나 부족한 무늬만 종교인들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기총도 그렇고, 이랜드도 그렇고, 초대형 교회들도 그렇고, 이명박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욕심을 버리고 회개하길 바란다.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인들은 진정한 종교인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납치된 젊은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뭔가를 깨달았으면 한다.

왜 이랜드의 예수는 나의 예수와 다른가

이랜드라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기업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량해고했고, 해고된 노동자들은 그에 맞서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말인데, 도대체 그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란 말인가. 이랜드는 이익 6%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한다고 한다. 정말 예수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할까.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언제나 약자 편에 섰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고, 그들의 아픔을 달래 주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세상에는 내가 알고 예수 이외에 또 다른 예수가 있나 보다.

그 또 다른 예수는 가진 자 편에서 물질의 축복을 내리며, 부자는 더 부자가 되게 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만드는 그런 예수인가 보다. 그 또 다른 예수는 비정규직은 아무 때나 해고하고 그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만드는 그런 예수인가 보다. 그 또 다른 예수는 이랜드의 예수이고, 초대형 교회 목사들의 예수이고, 사립학교 이사장들의 예수이고, 한기총의 예수이고, 재벌들의 예수이고, 서울을 봉헌하겠다던 이명박의 예수인가 보다.

팔레스타인 그 척박한 땅에서 2000년 전에 태어나 세상을 바꾸고 하나님의 나라 지상낙원을 이루고자 했던 그 예수가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땅 한반도 서울에서 그 또 다른 예수로 변신한 것인가. 천박한 자본주의를 비호하고 축복하는 예수로 전락한 것인가.

이랜드여! 당신들이 돈을 버는 것은 좋은데 제발 예수를 팔지 말라. 자본의 논리로 비정규직을 해고하더라도 예수를 들먹이지 말라. 당신들은 위선자들이고 독사의 자식들이다. 이것이 당신들의 기도에 대한 내가 아는 예수의 응답이다.

더 이상 나의 예수를 욕되게 하지 말라.

부자되기를 기도하고 축원하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물질적 축복을 기원하는 것은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그것을 구하러 교회나 절에 다니는 사람은 진정한 종교인이 아니다. 예수나 부처도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이다. 물질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물질이 많고 부자가 될수록 우리는 오히려 행복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가진 사람들은 왜 나누기를 거부하는가. 왜 세금조차 낼 수 없다고 항변하는가. 지금 우리 사회의 가치 전도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반증이다.

법정 스님의 잠언집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에 다다르는 길인지를 잘 알려준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애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법정, 행복의 비결]

예수님의 말씀 중에도 부자를 경계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매우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재산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매우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19:21-25]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