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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죽음

영원히 사는 방법

영원히 사는 방법

우주의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숙명이다. 태어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죽게 되어 있다. 오직 인간들만이 그 죽음을 피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중국 진시황은 영생을 위해 불로초를 찾으려 했고, 현대 과학은 생명 연장을 위해 냉동인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삶이 아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주어진 순간 순간을 최대한 충실히 사는 삶이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If we take eternity to mean not infinite temporal duration but timelessness, then eternal life belongs to those who live in the present.

우리가 만약 영원을 시간이 무한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무시간성으로 받아들인다면, 영원한 삶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몫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산티아고 순례길 6] 무산몽환(霧山夢幻)

[산티아고 순례길 6] 무산몽환(霧山夢幻)

오리송 산장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카미노는 안개 속에 사라졌다. 꿈결에 빗소리를 들었다. 아침에 보니 어제 그 청명했던 하늘은 온데간데 없고, 산은 안개와 구름으로 덮혀 있었다.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안개 속에 사라진 카미노는 이미 이 세상 길이 아니었다.

이슬비와 안개와 구름으로 가득한 꿈같은 길. 그 길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순례자들. 안개 속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와 소들.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산티아고로 향했던 카미노는 이제 다른 세상에 닿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삶이란 안개 속의 카미노와 같은 것.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지만, 저 안개 너머에 무지개가 있을 거라 기대하며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나아가는 것.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온몸을 전율하는 것. 무산몽환(霧山夢幻).

피레네 산맥의 안개 속 카미노를 걸으면서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삶과 죽음은 본래 하나다.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이 늘 같이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것. 죽음이 삶을 가치있게 한다는 역설. 안개 속 카미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 나갔다.

안개 속의 카미노
안개 속의 카미노
소와 자전거
소와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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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
양치기와 개
양치기와 개
카페 앞의 순례자들
카페 앞의 순례자들
숲 속의 안개
숲 속의 안개
안개 속으로 사라진 길
안개 속으로 사라진 길
론세스바예스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
론세스바예스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
인간의 욕망과 운명

인간의 욕망과 운명

인간의 욕망이 바로 그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그의 욕망이 바로 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가 곧 그의 행위이며, 그의 행위가 곧 그가 받게 될 결과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인간은 그가 집착하는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죽은 다음에 그는 그가 한 행위들의 미묘한 인상을 마음에 지니고서 다음 세상으로 간다. 그리고 그의 행위들의 수확을 그곳에서 거둔 다음에 그는 이 행위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이와 같이 욕망을 가진 자는 환생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

<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사드>

임종을 맞이할 때 읽는 기도문

임종을 맞이할 때 읽는 기도문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임종을 맞이할 때 붓다와 보디사트바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진리와, 진리를 깨달은 자와, 그를 따르는 구도자들에게 임종자 자신이나 그의 가족들이 예물을 바친다. 마음으로 상상해서 예물을 바칠 수도 있다. 손에는 향기 좋은 향을 들고 마음을 모아 다음과 같이 반복해서 말한다.

아, 열 가지 방향에 있으며 더없는 자비를 갖추시고 지혜와 투시력과 사랑을 갖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보호해 주시는 붓다들과 보디사트바들이여. 자비의 힘으로 이곳에 내려오셔서 차려 놓은 공양물과 마음으로 만든 공양물을 받으소서.

아, 자비로운 이여. 당신은 무한한 지혜와 자비의 사랑과 신통력과 보호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자비로운 이여, 지금 (동진이)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려 합니다. 그는 지금 이 세상을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큰 이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는 이제 친구가 없습니다. 불행은 참으로 큽니다. 그는 이제 지켜 줄 이도 보호해 줄 이도 없으며, 아무런 능력도 동행자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빛이 져 버렸습니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갑니다. 그는 무거운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가파른 절벽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는 고독의 밀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카르마의 힘에 끌려 다닙니다. 그는 광막한 정적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다닙니다. 그는 카르마의 바람에 밀려 다닙니다. 그는 안정이 없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큰 갈등 속에 빠집니다. 그는 거대한 악귀들의 포로가 됩니다. 그는 죽음의 왕이 보낸 사자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에 빠집니다. 카르마가 그를 윤회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는 이제 혼자서 가야 할 때가 왔습니다.

아, 자비로운 이여. 지켜 주는 이 없는 (동진이)를 지켜 주소서. 보호받지 못하는 그를 보호해 주소서. 그의 힘이 되어 주시고 동행자가 되어 주소서. 사후세계의 어둠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소서. 카르마의 붉은 광풍으로부터 그를 비켜 가게 하소서. 죽음의 왕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그를 벗어나게 하소서. 사후세계의 길고 좁은 여행길로부터 그를 구하소서.

아, 자비로운 이여. 자비의 힘을 늦추지 마시고 그를 도우소서. 그를 불행한 곳으로 가게 하지 마소서. 당신의 옛 맹세를 잊지 마소서. 당신의 자비의 힘을 늦추지 마소서.

아, 붓다들과 보디사트바들이여. 이 사람을 향한 자비의 힘을 거두지 마소서. 당신의 자비의 밧줄로 그를 붙잡으소서. 악한 카르마의 힘에 이 생명 가진 자가 굴복하게 하지 마소서.

아, 진리와 진리를 깨달은 자와 그를 따르는 구도자들이여. 사후세계의 불행으로부터 이 사람을 보호하소서.

<티벳 사자의 서, pp. 457-459>

겸허하고 강한 믿음을 갖고 이렇게 기도하고 모든 참석자들이 그것을 세 번 반복해 읽는다.

사후세계

사후세계

<티벳 사자의 서>에서 얘기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바르도(Bardo)는 글자 그대로 ‘사이(Bar)’와 둘(do)’을 뜻한다. 두 상태 사이, 다시 말해 죽음과 환생 사이가 바르도이다.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3일 반이나 때로는 4일 동안, 대부분의 경우 의식체는 자신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기절 상태 또는 수면 상태에 빠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간이 첫번째 바르도이며 그것은 치카이 바르도(Hchikhahi Bardo), 곧 ‘죽음 순간의 바르도’라고 부른다. 이때 최초의 투명한 빛이 사자 앞에 나타난다. 그 빛은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밝아 오는 순수한 빛이다. 그러나 사자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다시 말해 그 빛이 상징하는 마음 본래의 초월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자신의 카르마 때문에 그것을 흐릿하게 인식한다.

첫번째 바르도가 끝났을 때 자신에게 죽음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자는 두번째 바르도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초에니 바르도(Chösnyid Bardo), 곧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바르도’라고 부른다. 이 상태는 곧이어 세번째 바르도의 상태로 흘러들어간다. 그것이 시드파 바르도(Sridpahi Bardo), 곧 ‘환생의 길을 찾는 바르도’이다. 이 바르도는 의식체가 인간계나 다른 세계, 또는 천상의 극락세계에 환생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티벳 사자의 서, p. 80>

죽음 너머의 세계

죽음 너머의 세계

죽음을 체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은 대개 유사하고 일관되다. 임마뉴엘 스베덴보리, 이븐 알렉산더 등 이름난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소위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으로 불리는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그들의 증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이 공중에 떠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잠시 후 그는 암흑, 혹은 터널 속을 굉장한 속도로 지나간다. 그는 눈부신 빛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최근에 죽은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는다. 보통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리고 지상에서 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광경 – 구릉진 목장, 꽃이 만발한 계곡, 반짝이는 시냇물 등 – 을 본다. 이 빛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는 아무런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으며 밀려오는 환희와 사랑과 평화의 느낌에 휩싸인다. 그는 무한한 자비의 느낌을 방사하는 ‘빛의 존재(혹은 존재들)’를 만난다. 그 존재는 그에게 자신의 지난 삶이 파노라마처럼 다시 펼쳐지는 ‘인생복습(life review)’을 경험하게 한다. 그는 이 광대한 현실의 경험에 압도되어 그곳에 한없이 머무르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존재는 그에게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다시 육체로 들어가 지상의 삶으로 돌아가게 한다.

<마이클 탤보트, 홀로그램 우주, p. 337-338>

사람들이 자기의 몸이 “참나”가 아님을 깨닫게 되면 이러한 증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그리고 알고 있는 세계는 진리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열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살다 보면 점점 더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천지간에는 자네의 지혜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있다네.

<세익스피어, 햄릿, 1막5장>

또 하나의 증거

또 하나의 증거

죽음에 대해 선지자(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이븐 알렉산더 등)들이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수호천사>를 쓴 로나 번도 죽음에 관한 진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우리 대부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의 순간에 고통과 불편함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두려움도 불안도 없다. 당신은 자유롭게 간다. 죽음은 탄생과 같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난다. 당신은 실제로 죽지 않는다. 당신이 떠나는 것은 단지 이 물질적인 껍질뿐이다. 마치 텅 빈 계란 껍질처럼. <중략>

많은 시간 우리는 정의와 복수를 찾는다. 그런 우리가 이해하기란 매우 힘들겠지만, 죽음 이후 신 앞에 서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너무도 큰 사랑은 물론 신과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을 느껴 그곳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매우 깊이 그리고 진정한 방식으로 용서를 구한다. 인간 조건의 연약함에서 기인해 이 지구에서 행한 모든 것에 대한 용서를. 그러면 신은 무한한 자비로 자신의 자녀들을 용서한다. 우리 모두는 신의 현존 안에 있는 아이들일 뿐이다.

당신의 영혼은 완전하다. 당신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그 영혼은 우주를 통과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장소들로 여행한다. 얼마나 황홀한 기분일지 당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달리 표현할 방법은 없다. 당신 자신이 그것을 경험하기 전에는 말해 줄 방법도 없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로나 번, 수호천사, pp. 286-287>

이런 증거들이 계속 쌓이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