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최근 서울시 교육청이 학교에서의 체벌을 전면 금지했다.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늦은 일인데도 아직 학교에서 체벌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쓰레기 언론에서도 진보 교육감이 당선되자 아무 대책도 없이 학교에서 체벌을 금지했다고 난리법석을 피운다.

그들에게 정말 묻고 싶다. 정말 사람을 때려서 교육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게 진심인지, 아니 객관적으로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묻고 싶다. 아이들이 맞기 싫어서 말을 듣는 것이 정말 교육이라고 생각하는지, 교사라고 해서 정말 아이들을 때릴 권리가 있는지, 그것이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체벌이란 교사나 부모가 아이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붙인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어떤 이들은 “사랑의 매”는 필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지만, 그런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널 너무나 사랑하기에 널 죽도록 팬다? 너무나 웃긴 얘기다. 정의로운 전쟁이 존재하지 않듯이 사랑의 매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체벌 금지가 학교 현장을 몰라서 하는 순진한 얘기라고 몰아부친다. 체벌을 금지하면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한다. 체벌 금지 때문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사람들은 교육 현장에서 떠나야 한다. 체벌이라는 무기로 무장하지 않고 아이들 앞에 설 수 없다는 사람들은 이미 교육자가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아버지이며, 어른들의 거울이다. 아이들이 이상 증상을 보일 때는 분명 기성세대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은 거의 대부분 어른들의 책임이다. 부모의 책임이고, 교사의 책임이고, 기성세대 모두의 책임인 것이다. 그래서 때려서라도 가르치겠다? “나는 똑바로 걸을 수 없지만, 너는 똑바로 걸어야 돼”라고 울부짖는 엄마 게가 생각난다.

아이들을 때려서 가르치겠다고 하는 발상은 일본제국주의와 군부독재와 함께 사라졌어야 했다. 하긴 아직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일제잔재와 독재부역 세력들이니 학교에서 이런 기대를 하는 것이 우스운 일인지 모르겠다. 세상이 진보한다는 것,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이렇게나마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을 때리지 마라.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궤변의 달인, 노회찬

조선일보와 노회찬은 양립할 수 있을까? 얼핏 보면 이 둘의 사상이 극과 극으로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조선일보와 노회찬은 분명히 양립할 수 있다. 언젠가 노회찬이 밝혔듯이, 노회찬은 30년간 조선일보를 구독해온 애독자다. 따라서 그가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아무런 정서적 거부감이 없다.

노회찬을 아직도 진보 진영의 대표 인물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노회찬의 조선일보 생일 잔치 참석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것은 노회찬 잘못이 아니고, 노회찬을 진보인사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잘못이다. 노회찬은 본인이 밝혔듯이 조선일보의 30년 애독자이기 때문이다. 애독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신문의 창간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뭐가 대수인가.

파문이 일자 노회찬은 자신의 블로그에 궤변으로 얼룩진 변명을 늘어 놓았다. 내가 노회찬을 비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노회찬이 조선일보 창간 행사에 간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에 대한 얼토당토 않은 말들을 지껄인 것이 문제다. 노회찬은 겉으로 선명한 진보 정치인의 이미지를 지켜나가고 싶은 동시에 속으로 조선일보 30년 애독자로서의 애정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노회찬은 변명 중에 몹시 거슬리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합리화다.

일부에서 저의 그날 강연을 놓고 ‘조선일보의 30년 애독자로서 조선일보를 최고의 신문으로 고무찬양한 강연’으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평양을 방문한 한 교수가 방명록에 덕담 한마디 쓴 것에 대해 북한을 고무찬양한 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조선일보가 기사를 쓰기 전의 일입니다. 강연의 주요 내용은 온데 간데 없고 덕담 중 몇마디로 저의 철학과 소신과 강연내용을 왜곡한 것입니다. 사실과 다르다고 항의하니 ‘아니면 말고’라는 답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때 저는 우리 안에도 ‘조선일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싸우면서 닮는다는 옛말 있습니다. 제가 여전히 안타까운 것은 조선일보와 싸우면서, 싸우는 동기가 되었던 ‘조선일보식 글쓰기’를 닮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노회찬, 감사와 함께 사과드립니다]

자기 행위의 합리화를 위해서는 서슴지 않고 다른 이들을 끌어들인다. 겉으로는 조선일보식 글쓰기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조선일보를 애독한다. 그러면서도 선명한 진보 정치인인듯 행세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이중성을 몹시 싫어한다.

예를 들어, 어떤 (말로만) 항일 독립 투사가 일본 천황의 생일 초대에 참석해서 천황의 건강과 안녕을 위한 건배를 했다면 그는 진정한 독립 투사인가, 아닌가? 사람들이 그가 천황의 생일 잔치 참석한 것을 비난하자, 그는 “천황과 대화하면서 그를 변화시키러 간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우리 안에도 ‘일본 제국주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그의 진정성을 믿어 주겠는가?

예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조선일보는 언론이 아니다. 언론을 가장한 정치집단이면서 사익추구집단이다. 그들의 이념은 보수도 아니고 오로지 “기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친일 반동 기회주의 집단의 본류 중에 하나가 조선일보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포용의 대상도 아니고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조선일보는 하나의 시금석이다. 조선일보를 인정하느냐, 하지않느냐로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 진정성을 판별받게 되는 것이다.

노회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제발 담백하게 살라는 것이다. 노회찬이 조선일보 애독자라고 해서 비난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건 노회찬의 자유다. 하지만 괜히 말도 않되는 “우리 안에도 ‘조선일보’가 있다는 생각” 따위의 변명은 정말 보기도 싫고, 견디기도 힘들다. 조선일보를 읽고 조선일보를 위해 건배하는 것 다 좋은데, (우리 인간적으로) 제발 선명한 척, 진보인 척은 하지 말자.

사실 시간 내가면서 노회찬에 대한 이런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유창선의 “조선일보 기념식 참석, 노회찬을 위한 변명” 을 읽고는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유창선, 이사람은 또 뭐냐? 안습이란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생긴 말인가 보다.

누가 그들을 “보수”라 하는가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적을 아는 것이다. 일찌기 손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적을 알고 그들을 정확하게 규정해내는 것은 모든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일 뿐더러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친일세력과 군사독재 잔재세력을 “보수”세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조중동 같은 사이비 찌라시 신문을 “보수”신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의 신간인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를 보면 시종일관 우리 정치를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진보가 다시 권력을 창출할 수 있을지를 논하고 있다. 이런 식의 논의 전개는 연구결과의 유용성과는 상관 없이 그들에게 “보수”라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렇다면 보수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을 옹호하고 유지하려는 것인데, 정치적으로 볼 때 여기에는 상식과 민족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보수란 무조건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주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유효한 범위 내에서의 변화는 수용한다. 따라서 보수란 개념에는 어느 정도 긍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이 땅에서 “보수”라 불리는 세력들의 면면을 보자. 한나라당, 조중동, 뉴라이트 등등의 세력들에게 과연 “보수”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그들의 뿌리가 어디인가? 그들은 가깝게는 군부독재의 잔재 또는 부역 세력이고 멀게는 일제시대의 친일세력이며, 조선시대 당쟁의 주류였던 노론세력이다. 이들은 수백 년간 이 땅의 권력과 부를 장악했고, 그들만의 성을 쌓아 특권 주류세력으로 부상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법, 언론, 학계 등등 이 땅의 모든 지배 기재를 장악한 세력들이다.

과연 그들을 보수라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세력에게서 과연 민족이나 상식과 같은 개념을 찾아볼 수 있을까? 그들은 조선시대에는 조선의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개혁을 추구하는 군주를 서슴지 않고 독살하였다. 오로지 중국의 황제만을 추종하는 듯 하면서 자신들의 영달과 탐욕을 추구하였다. 힘의 균형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자, 이들은 앞다투어 나라를 팔았고 친일세력으로 탈바꿈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등 뒤에 숨어 “반공”이라는 무기로 무장하여 죄없는 양민들을 괴롭혔다. 이승만과 결탁하여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고,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앞장서 부역하였다.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이들이 정치 권력을 놓쳐본 것은 단 10년, 1998년부터 2007년까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이었다. 그들이 얘기하는 대로 과연 “잃어버린 10년”의 기간이었다. 물론 이 10년 동안에도 행정부의 권력만이 개혁세력에게 잠시 넘어왔을 뿐, 나머지 모든 지배 기재는 여전히 이들 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동물적인 본능은 누가 자신들의 적인지 그리고 누가 그 적의 핵심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수없이 쓰러져간 민주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 세력의 영악함과 간교함이 어떤지를 알 수 있다. 김구 선생을 시작으로 최근의 노무현까지 이들 세력들의 탄압으로 쓰러져간 인물들은 모두 그 시대의 가장 핵심적 민주개혁 인사였다. 노무현을 죽이고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한명숙을 공격하고 있다.

그들을 “보수”라 규정하고 “보수”라 대우해서는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고 그들을 넘어설 수 없다. 그들은 역사의 반동이고, 전형적인 기회주의 세력일 뿐이다. 그들은 친일세력이고 독재세력이고 부도덕한 부패세력일 뿐이다. 그들은 탐욕만을 추구하며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불구세력일 뿐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아직도 그들을 보수라 부를 것인가? 그들을 보수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그들의 전략에 말려든 것이고 게임은 해보나마나 한 것이다.

그들은 보수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달인,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다

평생 민주주의를 연구했다는 민주주의의 “달인”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면서, “달인”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가 사회의 최상층 이익만을 보장하고 서민과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며, 법의 지배와 인권보장, 권력 운영방식에서 경찰, 사법, 정보기구들이 권위주의적 양태를 보인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오늘의 정부를 보수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정부를 반민주적이라고 평하게 되면, 역으로 “민주정부”라고 생각하는 앞선 정부들은 그만큼 긍정적으로 미화될 것이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이해방식은, 소통불능을 오히려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이른바 진보세력의 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과거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문제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과거 이른바 진보적인 정부들 역시, 경제와 사회정책에서 신자유주의 성장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로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나빠졌고, 국가의 사법, 경찰기구들은 충분히 민주화되지 못했다. 또 소통이 잘 안 되었던 것은 그때도 비슷했다.

[최장집, 소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 경향신문]

이명박 정부는 보수정부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반민주정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명박이 반민주가 되면 노무현 정부가 민주정부가 되니까.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정부였고, 따라서 노동자와 서민의 삶의 조건은 악화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최”신자유주의 정부라 상관없다. 노무현 정부 때 국가 권력기구들은 충분히 민주화되지 못했다. 지금은 경찰이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고, 인터넷에서 정부 비판하면 구속되는 것은 당연하고, 광우병 관련 보도를 하는 PD들은 기소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니까. 민주정부를 비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이명박이 반민주면 노무현이 민주가 되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아마 최장집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서민들의 삶을 망쳐놓은 장본인이 자살을 했으니 속으로 만세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무현에 대한 증오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고 있는 최장집은 민주주의 “달인”이라 불릴만 하다. 배웠다는 인간의 인격이 이 정도로 이중적이라면 이명박은 양반 중의 양반이다.

민주주의의 “달인”이 민주주의를 농락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한겨레신문의 살리에리 증후군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는 19세기초 유명한 음악가 중 하나였다. 모짜르트만 없었다면 그는 비엔나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로 대접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살리에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천재인 모짜르트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는 모짜르트 때문에 열등감과 자괴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하여 그는 모짜르트에게 늘 시기와 질투를 느꼈고, 모짜르트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과정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후에 사람들은 모짜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를 바탕으로, 주위의 뛰어난 천재 때문에 극복할 수 없는 열등감, 시기, 질투를 느끼는 것을 “살리에리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자칭 진보정론지 한겨레신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민주주의2.0″이란 웹사이트가 영 불편한 모양이다. 한겨레는 “전직 대통령 토론 웹사이트 개설 유감”이라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그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 노 전 대통령 말대로, 민주주의에 긴요한 시민 토론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쓴다면 그걸 탓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전직 대통령이 직접 토론사이트를 개설해 운영하는 건,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논란을 확산시키며 정치적 ‘반목과 대립’만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직 대통령 토론 웹사이트 개설 유감", 한겨레신문]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토론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해 보겠다고 한 것은 그가 퇴임하기 이전에 이미 세워둔 계획이었다. 그가 퇴임을 해서 “민주주의2.0″이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정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사이트가 개설되자마자 한겨레신문이 “전직 대통령의 정치 재개” 운운하며 새삼스럽게 유감이라는 사설을 날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중동이나 한나라당이 노무현의 행보를 주시하면서 민주주의2.0에 대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조중동이나 한나라당과 정치적 이해 관계가 사뭇 다른 (다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겨레가 노무현이 만든 토론사이트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한겨레는 노무현에 대한 살리에르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아니, 한겨레 뿐만 아니고, 민노당이나 최장집, 손호철, 김근태 등 이른바 얼치기 진보들도 마찬가지로 노무현에 대한 살리에르 증후군이 있다. 그동안 이들이 보인 행보를 보면, 조중동보다도 노무현에게 더 적개심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노무현은 아는 바와 같이 운동권 내에서도 비주류에 불과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민주세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 이들은 내심 못마땅한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진보 세력이 오합지졸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노무현의 민주주의2.0은 이들의 위기의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진보와 민주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퇴임한 (고졸 출신의) 전직 대통령 따위가 어찌 그 자리를 넘보려고 하는가”하는 그 같쟎은 엘리트들의 우월의식이 노무현 살리에르 증후군의 본모습이다.

진정으로 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자들이라면 전직 대통령의 토론사이트 개설을 “열렬히” 환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트가 잘되도록 물심양면으로 협조하고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민주주의 발전은 부수적인 문제고 그것보다 노무현이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만약, 김근태가 이런 사이트를 내놓았다면 한겨레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설과 머릿기사를 동원해 그 사이트를 선전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당은 아니지만, 이런 것은 척보면 안다.

그런데, 문제는 김근태나 최장집이나 한겨레나 소위 그 잘난 엘리트 진보들은 노무현보다도 앞서서 이런 생각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은 그들이 불쌍한 것이다. 노무현보다 앞서고 싶은데 늘 뒤떨어지는 그들. 노무현보다 다들 좋은 학교 나왔는데, 언제나 여론은 노무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시기와 열등감. 전형적 살리에리 증후군이다.

무능한 한겨레신문의 삽질 중 전형적인 예를 하나 보자. 네이버가 포탈로서 지금과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그 중심에는 지식in이라는 서비스가 있다. 사실 그 아이디어는 한겨레신문이 2000년에 내놓은 “디비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디비딕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덜떨어진 잘난 진보들은 어느날 갑자기 그 서비스를 유료화해서 그 잘나가던 서비스를 말아먹고 만다. 결국 디비딕은 엠파스로 팔렸고, 네이버는 그 서비스를 흉내내어 지금과 같은 성공에 이르고 있다.

마케터 님이 지적한대로 한겨레나 소위 엘리트 진보들의 시기심 가득한 무능을 더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 인터넷을 기반한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하고, 새로운 언론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 중심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노무현이어야 한다. 왜? 그가 진보 세력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능력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노회한 살리에리 같은 한겨레에서 우리의 희망을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아직도 모든 것이 노무현 탓

퇴임한 지 두달이 지난 노무현 대통령은 여전히 동네북이다. 수구들은 노무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혈안이고, 좌파들은 총선의 패배를 노무현 탓으로 돌리기 위해 안달이다. 수구세력의 첫 번째 목표가 된 것은 노무현 정부의 주된 정책 중의 하나인 지방분권화와 혁신도시 정책이다.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을 기다리고 있던 지방 정부와 지방 국민들은 손가락만 빨 것이다. 예상한 일이었기에 놀랍지도 않다.

그런데, 소위 좌파 세력들이 총선 패배의 책임을 노무현한테 돌리는 듯한 발언은 도저히 참기 힘들다. 김규항은 “노회찬과 홍정욱”이란 글에서 노회찬이 패배한 책임을 노무현에게 돌린다. 노무현이 한국 국민들에게서 “가치 추구”를 빼앗았기 때문에 이명박이 당선되고, 홍정욱이 당선되었단다.

가짜 진보’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죄악은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서 ‘가치에의 추구’를 앗아가 버렸다는 것일 게다. 이명박 씨는 5년 전만 같아도 대통령 후보로서 파멸하기 충분한 도덕적 결함들을 가졌다. 그러나 그 결함들은 노무현 정권 5년을 통해 더 이상 결함이 아니게 되었다. 2007년의 한국인들은 이명박을 도덕적으로 용서한 게 아니라 이명박의 도덕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총선에서 진보신당 같은 곳의 후보가 당선되는 건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김규항, 노회찬과 홍정욱]

참으로 엿같은 소리다. 더군다나 이런 현실 인식은 좌파 세력들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만큼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정치인을 알지 못한다. 노무현이 추구한 가치는 “상식과 원칙”, 이 두가지다. 물론, 좌파들이 봤을 때는 아주 우스운 가치일 수도 있겠지. 민중들의 계급의식을 깨우쳐 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상식과 원칙이라는 가치조차 건국 이래 단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나라가 이 잘난 “대한민국”이다.

우리나라 좌파의 위기는 민중들이 자신의 계급의식을 자각하지 못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식과 원칙조차 수용되지 못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1%로 대표되는 수구언론과 재벌, 사법부, 검찰, 고위공무원들 그리고 그 1% 수구세력을 30% 지지하는 지역주의 투표들. 이러한 문제들을 노무현 정부가 만들어낸 것인가? 이 문제들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죽 있어 왔고, 오히려 그 갈등은 노무현 정부 때 더 커졌으며, 이제 그 1% 수구세력들의 면모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노무현과 수구들이 대립할 때, 좌파들은 어느 편에 있었나? 내가 알기로는 대부분 수구들의 편에 있었다. 노회찬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마자 조선일보에서 강연을 하면서 30년간 조선일보를 봐왔으며 가장 좋은 품질의 신문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인가? 친일과 군부독재 세력의 본산지 아닌가? 나는 노무현이 조선일보를 본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누가 가치를 앗아갔나?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를 제외하고 민노당은 한나라당과 손잡고 반노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도 좌파가 망하는 건 모든 게 노무현 탓이다.

좌파들은 참으로 머리가 나쁘다. 노무현보다도 나쁘고 심지어 수구들보다도 머리가 나쁘다. 문제가 뭔지를 모른다. 적이 누구인지, 동지가 누구인지, 누가 연대할 세력인지 알지 못한다. 문제가 해결하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자신들의 소멸을 노무현 탓으로만 돌리고는 그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고, 좌파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노회찬은 홍정욱보다 훌륭한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 선거처럼 뉴타운 사기극에 투표율 50% 이하일 경우에는 노회찬이 아니라 노회찬 할아버지가 와도 수구를 이길 수 없다.

노무현은 이제 무대를 내려왔다. 이제 노무현을 내버려 둘 때도 되지 않았는가? 노무현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다했다. 노무현의 문제라면, 그가 시대를 너무 앞서 나왔다는 것 밖에 없다. 하지만 상식으로 살고 싶어하는 국민들이라면 그에게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봉하마을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좌파가 진보가 되려면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

기만적 민주주의와 수구세력의 힘

우선 글을 시작하기 전에 두어 가지 사실을 바로잡아야겠다. 우리나라의 잘난 수구 언론들이 총선이 끝나고 나팔을 불어대는 것 중의 하나가 “민심이 보수화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투표를 한 46%의 표심은 보수화된 것이 아니고 “수구” 또는 “극우” 그 자체였다. 수구세력이라 할 수 있는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차지했고, 또 다른 정통 수구인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 (진짜 이름 웃기지 않은가) 그리고 친박 무소속을 합하면 50여석이 넘는다. 수구 세력이 의회 권력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다. 언론이 진보로 분류하는 통합민주당이나 창조한국당 등은 사실 보수라고 보는 것이 맞고, 진보세력이라 불리울 수 있는 정당은 민노당과 진보신당 정도이다. 진보신당은 당선자를 내지 못했고, 민노당은 5석 정도의 명맥만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은 국회의 1.67% 만을 차지한 것이다.

수구 언론들이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 또 지껄이는 이야기는 “절묘한 민심의 선택”이라는 말이다. 이건 그냥 “수구” 투표를 해버린 46% 유권자들에 대한 감사의 립서비스이다. 수구 세력이 개헌선을 가져가 버렸는데 무슨 민심의 절묘한 선택? 한나라당이 턱걸이 과반을 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너무 좋아서 웃자고 하는 소리인가?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뭐가 다른가. 그들은 다 한 뱃속에서 나온 일란성 샴쌍둥이일 뿐이다.

20여년 전, 그 지긋지긋한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많은 국민들은 권력을 국민의 손으로 선출하면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정말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87년도 전두환이 물러가고도 전두환의 친구인 노태우가 국민의 손에 의해 뽑혔고, 92년에는 이들과 손을 잡은 김영삼이 다시 선출되었다. 97년에 와서야 수구세력에서 보수세력으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데, 수구세력이 나라를 말아먹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고 아니 나라를 말아먹었다 해도 김대중이 또다른 수구인 김종필과 손잡지 않았다면 역시 불가능했다. 첫번째 정권교체는 외환위기로 인한 나라 망한 댓가로 받은 절반의 정권교체였다.

2002년은 어떠했는가? 그때는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정치인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무현은 정말 1세기 한번 나올까 말까한 정치인이다. 수구세력이 노무현을 그렇게 미워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무현과 더불어 인터넷이라는 또다른 무기가 국민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의 기적이었고, 신이 대한민국을 보살폈다고 밖에 얘기할 수 없는 세계 정치사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민주화 이후 20여년의 짧은 역사를 살펴봐도 친일과 독재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수구들의 힘은 정말 막강하다. 우리나라 언론, 입법, 사법, 행정 모든 분야에서 수구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현재 90% 이상이다. 이들은 자기들 입맛에 맞게 여론을 호도하거나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기만한다. 투표 성향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 중 이런 수구들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30% 정도 되는 것 같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구세력들은 계급적 이익 때문이건 (이 부분은 5%도 안되는 것 같고) 지역주의 때문이건 아니면 반공 때문이건 간에 언제나 한나라당에 투표를 한다. 이 30% 는 거의 언제나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국회의원 선거이든, 대선이든, 보궐선거이든 간에 말이다.

따라서 전체 투표율이 60% 이하가 되면 수구세력을 이길 방도가 없다. 참여정부 때 재보선에서 40 대 0으로 열린우리당이 졌고, 그때 정치권은 참여정부의 실정때문이라고 노무현을 몰아세웠지만, 이건 노무현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대통령이 되었어도 이길 수 없는 선거였다. 투표율 30% 정도인 재보선에서 수구세력이 아니고는 이길 방법이 없다. 이번 총선도 마찬가지다. 투표율 46%로는 수구세력이 아닌 보수, 진보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선거였다. 적어도 민주당이나 민노당이 한나라당과 대등하게 경쟁을 하려면 적어도 70% 이상의 투표율이 나와야 한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악순환이 발생하는데 정치권의 수구세력들은 그들의 명성에 걸맞게 정치 혐오를 불러 일으키고 (부정부패든, 성추행이든, 개싸움이든 간에) 유권자들은 점점 그 행태를 보고 욕을 해대면서 선거에 관심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바뀌는 것이 없고, 그렇게 욕을 먹어도 그놈들이 또 뽑히니까.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증폭되면서, 투표율은 점점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정치 권력은 점점 수구화되어 간다. 이것은 수구 세력들의 또다른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할수록 자신들이 득세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정치 혐오를 불러 일으킨다.

또 하나 웃긴 것은 친일에 앞장서고 독재에 부역을 했던 신문들이 민주화 이후에 언론 자유를 외친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를 찬양하고 전두환을 옹호했던 수구세력들은 민주화 이후에 줄기차게 투표를 해댄다는 사실이다. 민주화 과정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았던 아니 오히려 민주화의 적이었던 세력들이 민주화의 열매를 가져간다. 이거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군부 독재 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지금의 수구세력들은 선거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 정당성(그것이 비록 기만적이라 할지라도)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때는 거리로 나가 싸우면서 위안이라도 얻고 희망이라도 얻었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뽑았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왜 투표 안했냐고 하면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사실 상황은 20여년 전보다 더 비참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

  1. 투표를 의무화해야 한다. 지금처럼 50% 이하의 투표율로는 선출된 권력도 정당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투표를 의무화한 호주는 투표율이 90%를 넘고 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우리는 민심을 운운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기권할 자유도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2. 투표 용지에 기권란을 넣어야 한다. 뽑고 싶지 않은 후보가 당연히 있을 수 있으므로 기권란을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
  3. 기권이 50%가 넘으면 그 선거는 무효로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정당은 해산해야 하고, 다시 처음부터 정치 지형을 다시 짜야 한다.
  4. 선출된 권력에 대한 소환의 권리를 국민들에게 주어야 한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잘못 선출되었을 때는 소환되어야 하고 탄핵되어야 한다. 그러한 권리가 국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
  5. 국민들에게도 입법청원권과 입법권 그리고 국민투표에 부의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한다.
  6. 이러한 절차를 간소화하고 투표를 쉽게 하기 위해서 전자투표(인터넷 투표나 휴대전화 투표) 등을 도입해야 한다.

이 정도 되면, 민주주의의 기만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거 제도의 변경은 헌법이나 선거법 등 관련 법률을 개정해야 하는데, 수구 세력이 3분의 2나 들어가 있는 국회에서 국민들의 선거 참여를 위해 법률을 개정할 리 만무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 선거로 정권을 교체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국민들의 정치에 더욱 혐오감을 느낄 것이고, 그에 비례하여 투표율은 계속 50%를 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수구 세력의 장기 집권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97년의 경우처럼 나라가 망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노무현과 같은 매력적인 정치인이 나와 국민들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주는 것이다. 이메가와 한나라당의 국정운영 능력을 보았을 때, 외환 위기와 같은 경우가 멀지 않아 다시 올 것 같지만, 그 때도 박근혜가 눈물 한두 번 흘리면 수구 세력은 다시 뭉칠 것이다. 즉, 나라가 망해도 정권교체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노무현과 같은 정치인이 다시 나와 주어서 국민들의 관심을 높여야 하고 정치 참여를 높여야 하는데, 이 부분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내가 유시민을 지켜 보는 이유는 바로 두번 째 가능성 때문이다. 유시민 정도되면 노무현의 뒤를 이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다시 한 번 신이 대한민국을 보살피시고,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는다면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적어도 70% 아니 80% 이상의 국민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메가가 운하를 파든, 사기를 치든, 나라를 말아 먹든, 팔아 먹든, 뭘 해도 수구의 집권을 막을 길이 없다. 수구 언론들과 선관위와 검찰과 사법부 등은 지속적으로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좌절시킬 것이다. 지금처럼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한다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나라의 앞날은 상당히 어둡고, 민주주의는 서민과 노동자들을 더욱 기만할 것이다.

한줌도 안되는 친일과 독재 세력을 단죄하지 못한 것이 나라의 원죄가 되어 버렸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희망의 근거를 마련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의 고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