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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아주 쉽게 망치는 방법

자식을 아주 쉽게 망치는 방법

누군가가 말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라고.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거의 전부 어른들의 책임이다. 특히, 아이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가장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부모의 책임이다. 모든 아이들은 태어나길 천사로 태어났다. 지금의 어른들이 어렸을 때도 천사와 같은 맑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어른들이 탐욕에 눈이 멀게 된 것은 그 어른들의 부모 때문이며, 지금의 아이들이 못된 어른이 되는 것은 그 아이들의 부모인 우리 어른들 때문이다.

최근 외국어고등학교의 존폐 문제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사교육을 부추기고 입시 전문 학원으로 전락한 외고가 존재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외국어를 전문적으로 가르쳐 아이들을 글로벌 인재로 키우겠다는 학교가 외고인데, 사실 이런 발상 자체가 아주 웃기는 일이다. 도대체 말끝마다 글로벌 인재 운운하는 사회 풍토도 상식 이하이지만, 외국어만 잘한다고 글로벌 인재가 된다는 생각 자체는 너무 순진해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아주 웃기는 설립 취지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고 학교를 입시 학원처럼 만들어 버린 사실이다.

이런 기형적 교육기관(이라는 말을 쓰기도 민망하지만)에 자식을 보내고 있는 어떤 엄마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과 섞이게 하기 싫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부모 밑에서 아이들은 제대로 자랄 수 없다. 물론 수학 문제 하나, 영어 단어 하나 더 잘 풀고 외울지는 몰라도 그것이 공부 잘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런 부모들은 자기들의 탐욕때문에 자식의 인생을 망치고 자식의 행복을 유린하는 사람들이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과 섞이게 하기 싫다고? 그렇다면 못사는 아이들과 섞이게 하기도 싫을 것이고, 피부색이 까만 아이들과도 섞이게 하기 싫을 것이다. 참으로 반인권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반교육적 발상 아닌가. 그러면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모아놓고 그 안에서 공부하면 아주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런 이론적 실증적 증거도 없는 이런 논리는 특권의식에 젖은 부모들이 (본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식을 망치기 위해 들이대는 흉기인 것이다. 이렇게 키워진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눈물을 이해할 수 없는 절름발이 인생을 살게 된다.

자식에게서 뜨거운 가슴을 빼앗는 부모들,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자식의 삶을 망치는 부모들, “이게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거야”라고 매일 거짓말하며 공부를 강요하고 자식을 못살게구는 부모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당신 자식은 결코 당신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줘야 할 것은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네 친구를 밟고 일어서라는 정글의 법칙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어려운 친구들을 도와주고 같이 살아갈 수 있는지, 내가 어려울 때는 어떻게 도움을 받는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과 섞이게 하기 싫다”는 태도는 지극히 반인간적이고 반교육적이기에 아이들은 쉽게 감당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최근들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열을 예로 들면서 미국 사회를 자극하고 있는 모양이다. 미국의 공교육이 무너졌기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오바마가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드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오바마가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것이다.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은 유대인들조차 놀랄 정도로 높지만, 그 교육의 방향과 방법은 심히 뒤틀려있고 노력에 비하면 효과도 아주 낮은 실정이다. 아이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어버리고 무한 경쟁으로 몰아가는 한국 부모들의 실상을 오바마가 안다면 더이상 한국의 예를 들어가면서 미국의 공교육을 회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못하는 아이들과 섞여야 하고, 운동 잘하는 아이들은 못하는 아이들과 섞여야 하고, 잘사는 아이들은 못사는 아이들과 섞여야 한다. 그렇게 부딪히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를 도와주며 자라나야 한다.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외고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

종이 신문을 많이 읽으면 공부를 잘한다?

종이 신문을 많이 읽으면 공부를 잘한다?

종이 신문을 많이 읽으면 공부를 잘 한다고 조선일보가 보도했다. 최영재 한림대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보도한 이 기사는 우리나라 신문과 연구자들이 어떻게 대중을 우롱하고 호도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장사해 먹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하겠다. 기사는 “평소에 신문을 열심히 읽는 대학생은 사회지식도 많고 공부도 잘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다음과 같이 최영재 교수의 말을 인용한다.

논문에서는 “연구 결과 종이신문 읽기는 지식 습득과 민주주의 의식 향상 효과가 동시에 나타났다”면서 “종이 신문은 인터넷 등 어떤 뉴미디어 매체로도 채워질 수 없는 문화적 자산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문 읽기 운동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팀이 서울·대구·강원·전북의 대학생 12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종이신문을 하루 평균 30분 이상 읽는 중(重)이용자는 16%, 6~29분 읽는 경(輕)이용자는 22%, 5분 이하 읽는 비(非)이용자는 62%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지난 2년간 평균 학점을 비교하면 4.5점 만점에 중 이용자 3.69점, 경이용자 3.57점, 비이용자 3.55점 순이었다.

[“신문 많이 읽는 대학생, 학점도 높아”, 조선일보]

이 연구는 학생들의 종이 신문 읽는 시간과 학점의 연관성을 분석한 것인데, 연구자인 최 교수팀은 두 변수의 상관관계(correlation)을 분석해 놓고, 해석은 인과관계(causation)으로 해 버리는  아주 기가 막힌 우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종이 신문을 많이 읽으면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의 특징 중 한 가지가 신문을 상대적으로 많이 읽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전체 논문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의 과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연구의 결론은 잘못내려진 것이다.

상관관계 분석은 두 변수가 어떠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고, 인과관계 분석은 두 변수의 연관성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최영재 교수팀의 논리대로라면 “아침식사를 거르지 않으면 성적이 좋다” 또는 “머리를 단정하게 깍으면 공부를 잘한다”라는 논리도 가능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침을 거르지 않는다는 것과 머리가 단정한 것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특징일 뿐이다. 공부를 잘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다.

최영재 교수팀은 종이 신문이 인터넷등 어떠한 매체로도 채울수 없는 문화적 자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이 논문의 연구비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대강 짐작할 만하다. 종이 신문에 나오는 모든 기사들을 인터넷으로 다 볼수 있는데 종이 신문에 무슨 문화적 가치가 있을까? 지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광고 말고 무엇이 더 있는가.

최 교수팀에 딱 한 가지 동의하는 것은 종이 신문을 읽으면 민주의식이 고양된다고 한 부분이다. 조중동 같은 반민주, 반민족, 반통일 신문들을 보면 세상을 저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하는 타산지석의 교훈은 얻을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종이 신문은 되도록 보지 말자. 쓰레기 신문들이 하루에도 천만 부 이상 발행되니 그 얼마나 종이 낭비가 심각할 것인가. 하루에도 웬만한 숲이 하나씩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종이 신문들에 실리는 기사는 종이 그 자체보다도 가치가 없으니 종이를 아끼는 차원에서 종이 신문을 읽지 말자. 대신 필요하면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도록 하자.

조중동 같은 종이 신문을 많이 읽으면 사람이 이상해지게 된다. 정상적인 사고가 쉽지 않게 된다. 종이를 아끼는 차원에서도 종이 신문을 보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