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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김종인, 그리고 어버이연합

김성근, 김종인, 그리고 어버이연합

김성근. 올해 나이 75세. 한화 이글스 감독. 한때 야구의 신(야신)으로 불리며 한국 프로야구의 상징으로 떠오른 인물. 김성근 식 리더십으로 야구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리더들의 본보기가 된 사람. 지난 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만년 꼴찌 한화를 프로야구 최고 인기구단으로 만들어 놓았으나, 올 들어 김성근의 마법은 유통기한이 다 된 듯하다.

한화 이글스의 현재 성적은 3승 15패, 승률 1할5푼8리. 넥센의 신인 투수 신재영이 벌써 4승을 했으니, 한화 구단은 신재영보다도 적게 승리했다. 넥센 신재영의 연봉은 고작 2700만원.

김성근의 리더십은 특타와 야간 펑고로 대표되는 (될 때까지) “하면 된다”의 새마을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송창식, 권혁 등의 투수들을 혹사시킨다는 평을 받으면서도 (단기간의) 성과를 위해 무리한 선수 교체를 감행한다. 김성근 식 야구는 단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화 이글스의 미래와 선수들의 장래를 보았을 때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한화 선수들은 가장 많은 훈련을 하지만, 가장 많은 실책을 범한다. 선수들의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고, 감독과의 소통이 어려우며, 시키는 대로만 하는 장기판의 말이 되었다. 급기야는 “김성근 감독과 야구하기 싫다”며 트레이딩을 거부하는 선수들이 나왔다. 지난 해, 김성근 감독을 연호하던 팬들은 “감독님, 나가주세요”라는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시위를 한다. 이쯤 되면 김성근 식 리더십은 끝난 것이 아닐까.

김종인. 올해 나이 77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확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경제민주화의 상징처럼 군림하는 사람. 처음 더민주에 올 때, 비례대표에 전혀 뜻이 없다 얘기했으면서도, 본인을 셀프공천하여 국민들의 빈축을 산 인물. 정청래, 이해찬 등을 공천탈락시키면서 정무적 판단이라고 얼버무린 노회한 정치인이다.

그는 더민주에 남아 있는 기회주의자들을 주저앉히는데는 성공했으나, 젊고 진보적인 유권자들을 끌어모으는데는 실패했다. 총선이 끝나고 그의 주변에서 당대표 추대론이나 전당대회 연기론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는 계속 더민주에서 제왕적 당대표를 노리는 것 같다.

김종인도 소통에 문제가 있으며, 고집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경제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노욕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버이연합. 어버이라는 고귀한 말을 욕보이는 자칭 어르신으로 구성된 극우단체. 박정희와 박근혜를 숭배하며 전경련의 지원과 청와대의 지시로 끊임없이 관제데모를 주도하는 사람들.

“하루 2만원이 어디냐”며 탈북할아버지들은 어버이연합 주도로 관제데모에 나선다. 생활고에 허덕이며 극우집회에 동원되어야 하는 그들의 처지가 불쌍하다. 칠십 넘게 세상을 살았으나 여전히 지혜와는 거리가 멀고 노욕덩어리가 되어 가는 사람들. 부끄러움도 모르고 무지가 죄가 될 수 있음을 모르는 어버이연합 노인들.

김성근, 김종인, 어버이연합 노인들께 드리고 싶은 말, 떠날 때를 아는 노인만이 지혜롭고 존경받는다는 것.

나이 먹을수록 바라는 것은

나이 먹을수록 바라는 것은

17세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수녀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Lord, thou knowest better than I know myself that I am growing older and will some day be old. Keep me from the fatal habit of thinking I must say something on every subject and on every occasion. Release me from craving to straighten out everybody’s affairs. Make me thoughtful but not moody; helpful but not bossy. With my vast store of wisdom it seems a pity not to use it all, but Thou knowest Lord, that I want a few friends at the end.

Keep my mind free from the recital of endless details; give me wings to get to the point. Seal my lips on my aches and pains. They are increasing and love of rehearsing them is becoming sweeter as the years go by. I dare not ask for grace enough to enjoy the tales of other’s pains, but help me to endure them with patience. I dare not ask for improved memory, but for a growing humility and a lessening cocksureness when my memory seems to clash with the memories of others. Teach me the glorious lesson that occasionally I may be mistaken.

Keep me reasonably sweet; I do not want to be a saint-some of them are so hard to live with-but a sour old person is one of the crowning works of the Devil. Give me the ability to see good things in unexpected places and talents in unexpected people. And, give me, O Lord, the grace to tell them so. Amen.

<Seventeenth Century Nun’s Prayer>

나이 먹을수록 바라는 것은 겸손하고, 사려깊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따뜻하고, 너그럽고, 되도록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말수를 줄이고, 참견하지 않고, 군림하지 않고, 유연하게 타인을 받아들이고 싶다.

욕망을 줄이고, 삶을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꾸려나가길 기도한다.

품위있는 노인의 지혜

품위있는 노인의 지혜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품위있는 노인(뿐만 아니라 사람)을 찾기 쉽지 않은 시대에, 채현국 선생은 그 존재만으로도 빛을 발한다. 채현국 선생이 1년마다 인터뷰 형식으로 전하는 말씀은 품위있는 노인의 잠언이라 할만하다.

“농경사회에는 나이 먹을수록 지혜로워지는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지혜보다는 노욕의 덩어리가 될 염려가 더 크다는 겁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욕망이 커봤자 뻔한 욕망밖에 안 되거든. 지가 날 수도 없고 기차 탈 수도 없고 자동차도 못 타니까 그랬는지 확실히 농경사회의 노인네는 경험이 중요했지. 지금은 경험이 다 고정관념이고 경험이 다 틀린 시대입니다. 먼저 안 건 전부 오류가 되는 시대입니다. 정보도 지식도 먼저 것은 다 틀리게 되죠. 이게 작동을 해서 그런지 나이 먹은 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하고 점점 더 욕구만 남는 노욕 덩어리가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들, 점점 더 노욕 덩어리 되어가”, 오마이뉴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이후, 채현국 선생은 또 한 번의 죽비와 같은 말씀으로 노욕으로 눈 먼 사회를 질타하신다.

선생의 건강과 무탈을 기도한다.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그 말씀으로 세상을 일깨워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틀리다는 말도 없다. 다른 게 있을 뿐이다. 정답은 없다. 해답이 있을 뿐이다.”

“죽음이 불안과 공포라는데, 사는 것 자체가 불안과 공포 아닌가? 죽음이란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쉰다는 것이다.”

품위있게 늙는 법

품위있게 늙는 법

조지 베일런트(George E. Vaillant)가 쓴 <행복의 조건(Aging Well)>은 하버드 대학생 268명의 70년간 인생을 추적한 인생성장보고서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품위있게 나이 드는 법”에 대한 내용은 한 번쯤 음미해 볼만하다.

  1.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보살피고, 새로운 사고에 개방적이며, 신체건강의 한계 속에서도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한다.
  2. 노년의 초라함을 기쁘게 감내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 사실을 품위있게 받아들인다.
  3.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늘 자율적으로 해결했으며, 매사에 주체적이다.
  4. 유머감각을 지니고, 놀이를 통해 삶을 즐길 줄 안다. 삶의 근본적인 즐거움을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행복을 포기할 줄 안다.
  5. 과거를 되돌아볼 줄 알고, 과거에 이루었던 성과들을 소중한 재산으로 삼는다. 호기심이 많고, 다음 세대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려고 노력한다.
  6. 오래된 친구들과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사랑의 씨앗은 영원히 거듭해 뿌려져야 한다”는 금언을 늘 가슴에 새긴다.

이 땅의 품위있는 노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품위있는 노인들을 보고 싶다.

노인과 소

노인과 소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노인은 소를 몰고 들로 나갔다. 그들에게 삶은 퍽이나 고달픈 것이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논밭에 엎드려 그 힘든 노동을 견디어야 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과 40년을 살어버린 소는 발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그렇게 30년을 살았다.

30년을 함께 한 소와 노인은 얼굴이 닮았고, 눈이 닮았고, 발걸음이 닮았다. 말하지 않고 눈빛만 봐도 노인과 소는 서로를 훤히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소를 먹이기 위해 언제나 꼴을 베러 다녔고, 소를 위해 농약 한 번 치지 않았다. 소는 늘 노인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들어 하면서도 늘 노인과 함께 들에 나갔다.

할머니와 자식들의 성화에 못이겨 노인은 소를 팔러 우시장에 갔다. 소는 눈물을 흘렸고, 노인도 눈물을 흘렸다. 30년의 세월이었다. 소를 얼마에 팔겠냐는 사람들의 말에 노인은 5백만원을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런 소는 거저 줘도 안가져간다며 소를 비웃었고, 노인을 비웃었다. 그 5백만원은 30년 세월을 같이 한 소에 대한 노인의 마지막 예의였다.

노인은 소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았고, 소는 자기의 주검이 노인의 손에 거두어지기를 바랬다. 소의 숨이 끊어지기 전, 노인은 소의 코뚜레를 풀었고 워낭을 떼어냈다. 소는 비로소 눈을 감았다. 노인은 죽은 소를 밭 한가운데에 묻었다. 소의 무덤을 바라보며, 노인은 워낭을 흔들었다. 바람을 타고, 워낭소리가 소의 영혼을 달래주었다.

삶과 죽음으로 30년의 세월이 나누어졌음에도 워낭소리는 노인과 소를 이어주고 있었다. 노인도 곧 소의 뒤를 따를 것이고 워낭소리는 저세상에서도 노인과 소를 이어줄 것이다. 노인에게는 소가 있었고, 소에게는 노인이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삶은 참으로 퍽퍽했지만,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그 삶을 견뎌냈고, 그들은 성자가 되었다.

난생 처음 부모님과 같이 극장에 가서 본 영화 “워낭소리”. 가슴이 먹먹했다.

또다시 길을 떠나며

또다시 길을 떠나며

일흔을 넘긴 늙은 시인은 또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한다. 칠십 평생 수많은 길을 떠나 왔지만, 그 길들은 언제나 세상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고, 그 누군가를 스치게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 길은 그가 떠나온 그 수많은 길과는 다른 길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관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자, 시인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 젊었을 때의 그 혈기왕성한 힘과 날카로움, 그리고 세상을 향한 분노가 사그러들었지만, 시인은 조용한 안식을 얻었다. 삶은 그렇게 공평한 것이었다.

세상은 전혀 평화로와지지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시인은 그 악다구니 속에서도 평화를 보았다. 아니 그는 자기가 떠나야 할 시간을 알고는 더 이상 그 팍팍한 삶에 간섭하지 않으려는지도 모른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이제는 던져버리고 그는 그 원초적 기원으로 떠날 것이다.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있는 그 순수의 세계로.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신경림, 낙타>

한 평생 살고 나서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을 제대로 살아냈음을 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시는 신경림만이 쓸 수 있는 시다.

떠날 때를 아는 노인은 지혜롭다

떠날 때를 아는 노인은 지혜롭다

건조하고 황량한 세상을 쉼없이 살았다고 해서 누구나 혜안을 갖는 것은 아니다. 견고하고 치밀한 부조리를 복기하고 예언한다고 해서 모두가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진정 지혜로운 노인들은 자신이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책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다.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그 본능을 체득했다면 그는 주어진 자신의 삶을 미련없이 제대로 살아낸 것이다. 예수 이전에도 이후에도 세상은 언제나 말세였다. 세상은 늘 버릇없는 새로운 세대들 때문에 번민했고, 노인들은 그들의 싸가지 없음을 한탄했다. 하지만, 자신의 세대가 이미 지나갔음을 깨닫고 조용히 떠나는 노인들은 흔치 않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고 유유히 사라져야 하는데도 말이다. 자신들이 어쩌지 못하는 세상을 부여잡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세상의 법칙이 아니다. 물 위를 흘러가는 배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삶은 그런 것이다. 미련없이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 악당이든 보안관이든 누구든 이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가 악당이든 보안관이든 지혜롭게 무대를 내려올 것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담백하게 자신의 삶을 털고 일어난다. 물론 쓸쓸하다. 하지만 삶의 뒤안은 누구에게나 쓸쓸한 법이다. 그것만이 위안이 될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러한 삶의 쓸쓸한 뒤안을 조용히 보여준다. 영화에서 인상깊었던 부분 중 하나였던 동전던지기 장면이다.
Chigurh: You need to call it. I can’t call it for you. It wouldn’t be fair. It wouldn’t even be right. Proprietor: I didn’t put nothin up. Chigurh: Yes you did. You been putting it up your whole life. You just didn’t know it.
자기 삶을 모두 걸어 놓고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그리고 선택은 언제나 본인의 몫이다. Anton Chigurh는 잔인하지만 참 매력적인 악당이다. 그의 머리 모양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