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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에게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있을까

달라이 라마에게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있을까

달라이 라마의 <용서>를 읽었을 때, 나는 그에게 무한한 존경의 마음이 일었다. 그는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고,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며,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그가 의미하는 바를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말한 것은 예수나 부처가 수천 년 전에 이미 가르친 것들이고, 그것을 몰라서 용서를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게 늘 따라다니는 화두는 “도대체 내가 과연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진정한 용서란 어떤 것인가”라는 그런 문제들이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과연 내가 그 상황에 맞닥드렸을 때 달라이 라마가 말한대로 그렇게 용서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훌륭한 성인들은 한 번도 분노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면서 용서할 수 있을까?

정호승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있지
용서에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한 가지 용서하면
신은 나의 잘못을 두 가지나 용서한다고
살면서 얼마나 많이 남을 용서했느냐에 따라
신이 나를 용서한다고
불쌍한 내 귀에 아무리 속삭여도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슬픔이 있지
용서만이 인간의 최선의 아름다움이 아닐 때가 있지
내가 내 상처의 뒷골목을 휘청거리며 걸어갈 때
내가 내 분노의 산을 헉헉거리며 올라가
기어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때
아버지처럼 다정히 내 어깨를 감싸안고
용서하는 일보다 용서를 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용서할 수 없으면 차라리 잊기라도 하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셔도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분노가 있지
히말라야의 새벽보다 먼저 일어나
설산에 홀로 뜬 초승달을 바라보며
문득 외로움에 젖을 때가 있지
야윈 부처님의 어깨에 기대어
용서보다 먼저 눈물에 젖을 때가 있지

<정호승, 용서>

나약하지만, 용서보다도 먼저 분노하고 슬퍼하고 눈물 흘리지만, 그렇게 불완전하기에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것이 인간일 거라는 사실. 정호승은 그것을 일깨워 주었다.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중국은 1950년 티벳을 침략한 이후 현재까지 티벳을 강제 점령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티벳 사람들이 당한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민족도 일제 치하 36년이라는 긴 시간을 같은 고통으로 아파했으니까.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마오쩌뚱의 ‘인간 해방’이라는 이념은 티벳 사람들에게는 구속이었고, 절망이었다. 중국이 티벳을 물리적으로 점령하고 구속할 수는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마오쩌뚱의 이념은 달라이 라마의 용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달라이 라마는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에서 중국을 진심으로 용서한다고 말한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움이나 나쁜 감정을 키워 나간다면, 내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 깨어질 뿐이다. 하지만 그를 용서한다면 내 마음은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용서는 단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는 상관없이, 세상 모든 존재는 우리 자신이 그렇듯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를 상처 입힌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용서를 베풀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스승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내면의 힘을 시험한다. 용서와 인내심은 우리가 절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힘이다.

미움은 강인함이 아닌 나약함의 다른 모습이다. 미움을 통해 얻어진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미움이나 분노를 통해서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 용서를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국가적, 국제적인 차원에서든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에 이르게 된다.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다.

<달라이 라마, 용서, 오래된 미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도 그의 제자 베드로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마태복음 18:21-22>

그렇다면, 나도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예수도, 달라이 라마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는 회개와 반성을 전제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