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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더위

사나운 여름

사나운 여름

한반도의 여름은 늘 무더웠다. 그러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되면 지난 여름의 더위를 잊는다. 그걸 어찌 다 기억하겠는가. 잊어야 할 것은 잊어야 살 수 있는 법이다.

그래도 잊혀지지 않는 여름이 있다. 1994년 더위는 정말 대단했다. 그해 여름 배를 만드는 조선소에 자주 출장을 다녔는데, 그곳에서 용접하는 노동자들이 느끼는 더위는 섭씨 60도를 넘었다. 살인적이었다. 철판 위에 삼겹살도 굽고 달걀도 부쳐 먹었다.

올 여름도 1994년 못지 않다. 벌써 한달째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 누구는 가마솥 더위라고 하고, 누구는 찜통 더위, 누구는 불볕 더위라고 하는데 이런 말들이 무색할 지경이다.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운 여름이라 그러더라.

이제 입추도 지났고 조금 있으면 말복이 오니, 어차피 더위는 꺽일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장마가 지나고 비다운 비가 오지 않는다. 태풍이라도 지나가면 비가 오려나.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21세기를 산다 하지만, 하늘이 도와 주지 않으면 인간들은 살 수 없다. 그러니 이 더위 앞에 우리 인간들은 여전히 겸손해야 한다.

집에 선풍기를 대신할 냉방기를 들여놔야 되겠다고 생각한 첫 여름이다. 사나운 여름이 그렇게 지나간다.

떠나요, 제주도

떠나요, 제주도

지구별에 비가 온다.

날씨에 무슨 죄가 있다고 폭염이라는 폭력적인 단어를 서슴없이 붙이겠냐마는, 장마가 끝나고 올 여름 정말 사정없이 더웠다. 입추가 지나니 새벽녘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중국으로 간 태풍의 영향 때문인지 시원하게 비가 내린다.

비가 오니 갑자기 듣고 싶은 노래. 몇 달 전, 올레를 걸으면서 끊임없이 흥얼거렸던 노래. 그 노래가 듣고 싶다.

그 노래를 들으니 제주에 가서 올레를 걷고 싶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오름에 올라 미야자키 아저씨의 만화 영화에나 나올 법한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을 보고 싶다. 곶자왈 숲을 헤매면서 태고의 순간을 느끼고 싶다. 오솔길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조랑말의 갈기를 쓸어주고 싶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포구에 놓인 빈배를 보면서 저 멀리 밀려 오는 파도 소리를 듣고 싶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아래

이제는 더이상 얽매이긴 우린 싫어요
신문에 TV에 월급봉투에

아파트 담벼락 보다는 바달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낑깡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들이 가꿔 봐요

정말로 그대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른 밤 하늘 아래로

떠나요 둘이서 힘들게 별로 없어요
제주도 푸른 밤 그 별아래

그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지쳤잖아요
술집에 카페에 많은 사람에

도시의 침묵보다는 바다의 속삭임이 좋아요
신혼부부 밀려와 똑같은 사진찍기 구경하며

정말로 그대가 재미없다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르메가 살고 있는 곳

<최성원, 제주도 푸른 밤>

휴가철도 끝나가건만, 올 여름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