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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을 “보수”라 하는가

누가 그들을 “보수”라 하는가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적을 아는 것이다. 일찌기 손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적을 알고 그들을 정확하게 규정해내는 것은 모든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일 뿐더러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친일세력과 군사독재 잔재세력을 “보수”세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조중동 같은 사이비 찌라시 신문을 “보수”신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의 신간인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를 보면 시종일관 우리 정치를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진보가 다시 권력을 창출할 수 있을지를 논하고 있다. 이런 식의 논의 전개는 연구결과의 유용성과는 상관 없이 그들에게 “보수”라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렇다면 보수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을 옹호하고 유지하려는 것인데, 정치적으로 볼 때 여기에는 상식과 민족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보수란 무조건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주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유효한 범위 내에서의 변화는 수용한다. 따라서 보수란 개념에는 어느 정도 긍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이 땅에서 “보수”라 불리는 세력들의 면면을 보자. 한나라당, 조중동, 뉴라이트 등등의 세력들에게 과연 “보수”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그들의 뿌리가 어디인가? 그들은 가깝게는 군부독재의 잔재 또는 부역 세력이고 멀게는 일제시대의 친일세력이며, 조선시대 당쟁의 주류였던 노론세력이다. 이들은 수백 년간 이 땅의 권력과 부를 장악했고, 그들만의 성을 쌓아 특권 주류세력으로 부상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법, 언론, 학계 등등 이 땅의 모든 지배 기재를 장악한 세력들이다.

과연 그들을 보수라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세력에게서 과연 민족이나 상식과 같은 개념을 찾아볼 수 있을까? 그들은 조선시대에는 조선의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개혁을 추구하는 군주를 서슴지 않고 독살하였다. 오로지 중국의 황제만을 추종하는 듯 하면서 자신들의 영달과 탐욕을 추구하였다. 힘의 균형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자, 이들은 앞다투어 나라를 팔았고 친일세력으로 탈바꿈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등 뒤에 숨어 “반공”이라는 무기로 무장하여 죄없는 양민들을 괴롭혔다. 이승만과 결탁하여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고,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앞장서 부역하였다.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이들이 정치 권력을 놓쳐본 것은 단 10년, 1998년부터 2007년까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이었다. 그들이 얘기하는 대로 과연 “잃어버린 10년”의 기간이었다. 물론 이 10년 동안에도 행정부의 권력만이 개혁세력에게 잠시 넘어왔을 뿐, 나머지 모든 지배 기재는 여전히 이들 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동물적인 본능은 누가 자신들의 적인지 그리고 누가 그 적의 핵심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수없이 쓰러져간 민주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 세력의 영악함과 간교함이 어떤지를 알 수 있다. 김구 선생을 시작으로 최근의 노무현까지 이들 세력들의 탄압으로 쓰러져간 인물들은 모두 그 시대의 가장 핵심적 민주개혁 인사였다. 노무현을 죽이고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한명숙을 공격하고 있다.

그들을 “보수”라 규정하고 “보수”라 대우해서는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고 그들을 넘어설 수 없다. 그들은 역사의 반동이고, 전형적인 기회주의 세력일 뿐이다. 그들은 친일세력이고 독재세력이고 부도덕한 부패세력일 뿐이다. 그들은 탐욕만을 추구하며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불구세력일 뿐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아직도 그들을 보수라 부를 것인가? 그들을 보수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그들의 전략에 말려든 것이고 게임은 해보나마나 한 것이다.

그들은 보수가 아니다.

한겨레신문의 살리에리 증후군

한겨레신문의 살리에리 증후군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는 19세기초 유명한 음악가 중 하나였다. 모짜르트만 없었다면 그는 비엔나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로 대접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살리에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천재인 모짜르트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는 모짜르트 때문에 열등감과 자괴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하여 그는 모짜르트에게 늘 시기와 질투를 느꼈고, 모짜르트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과정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후에 사람들은 모짜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를 바탕으로, 주위의 뛰어난 천재 때문에 극복할 수 없는 열등감, 시기, 질투를 느끼는 것을 “살리에리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자칭 진보정론지 한겨레신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민주주의2.0″이란 웹사이트가 영 불편한 모양이다. 한겨레는 “전직 대통령 토론 웹사이트 개설 유감”이라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그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 노 전 대통령 말대로, 민주주의에 긴요한 시민 토론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쓴다면 그걸 탓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전직 대통령이 직접 토론사이트를 개설해 운영하는 건,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논란을 확산시키며 정치적 ‘반목과 대립’만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직 대통령 토론 웹사이트 개설 유감”, 한겨레>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토론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해 보겠다고 한 것은 그가 퇴임하기 이전에 이미 세워둔 계획이었다. 그가 퇴임을 해서 “민주주의2.0″이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정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사이트가 개설되자마자 한겨레신문이 “전직 대통령의 정치 재개” 운운하며 새삼스럽게 유감이라는 사설을 날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중동이나 한나라당이 노무현의 행보를 주시하면서 민주주의2.0에 대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조중동이나 한나라당과 정치적 이해 관계가 사뭇 다른 (다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겨레가 노무현이 만든 토론사이트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한겨레는 노무현에 대한 살리에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아니, 한겨레 뿐만 아니고, 민노당이나 최장집, 손호철, 김근태 등 이른바 얼치기 진보들도 마찬가지로 노무현에 대한 살리에리 증후군이 있다. 그동안 이들이 보인 행보를 보면, 조중동보다도 노무현에게 더 적개심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노무현은 아는 바와 같이 운동권 내에서도 비주류에 불과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민주세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 이들은 내심 못마땅한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진보 세력이 오합지졸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노무현의 민주주의2.0은 이들의 위기의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진보와 민주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퇴임한 (고졸 출신의) 전직 대통령 따위가 어찌 그 자리를 넘보려고 하는가”하는 그 같쟎은 엘리트들의 우월의식이 노무현 살리에리 증후군의 본모습이다.

진정으로 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자들이라면 전직 대통령의 토론사이트 개설을 “열렬히” 환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트가 잘되도록 물심양면으로 협조하고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민주주의 발전은 부수적인 문제고 그것보다 노무현이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만약, 김근태가 이런 사이트를 내놓았다면 한겨레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설과 머릿기사를 동원해 그 사이트를 선전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당은 아니지만, 이런 것은 척보면 안다.

그런데, 문제는 김근태나 최장집이나 한겨레나 소위 그 잘난 엘리트 진보들은 노무현보다도 앞서서 이런 생각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은 그들이 불쌍한 것이다. 노무현보다 앞서고 싶은데 늘 뒤떨어지는 그들. 노무현보다 다들 좋은 학교 나왔는데, 언제나 여론은 노무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시기와 열등감. 전형적 살리에리 증후군이다.

무능한 한겨레신문의 삽질 중 전형적인 예를 하나 보자. 네이버가 포탈로서 지금과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그 중심에는 지식in이라는 서비스가 있다. 사실 그 아이디어는 한겨레신문이 2000년에 내놓은 “디비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디비딕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덜떨어진 잘난 진보들은 어느날 갑자기 그 서비스를 유료화해서 그 잘나가던 서비스를 말아먹고 만다. 결국 디비딕은 엠파스로 팔렸고, 네이버는 그 서비스를 흉내내어 지금과 같은 성공에 이르고 있다.

마케터 님이 지적한대로 한겨레나 소위 엘리트 진보들의 시기심 가득한 무능을 더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 인터넷을 기반한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하고, 새로운 언론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 중심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노무현이어야 한다. 왜? 그가 진보 세력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능력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노회한 살리에리 같은 한겨레에서 우리의 희망을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