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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새벽

화진 일출

화진 일출

저멀리 강구항의 불빛이 일렁거렸다. 파도는 끊임없이 화진 해변을 두드리며 나지막이 숨죽이며 울었다. 동쪽 하늘에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자 오리온 자리의 별들은 힘을 잃고 사위어갔다. 수평선 위에서 아스라이 집어등을 켜고 고기를 잡던 배들이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항구로 돌아오고 있었다. 일찍 일어난 새들은 힘찬 날개짓을 하며 바다로 나갔다. 방파제 위의 하얀 등대는 연신 초록빛을 반짝였다. 그 옆에서 은은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낚시꾼들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고, 그들의 어깨 위에 밤샘의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동쪽 바다와 하늘이 시나브로 붉어지더니, 바다 속에서 버얼건 불덩이가 불쑥 솟아올랐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맹렬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붉은 빛이 점점 밝아지면서 맨눈으로 쳐다보기 힘들만큼 강한 흰빛이 되었다. 오늘은 오늘의 해가 떠올랐고, 저만치 물러갔던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하염없이 달만 바라보다

하염없이 달만 바라보다

새벽 5시에 잠을 깼다. 운동을 하러 밖으로 나갔는데 오늘 따라 뭔가 다른 에너지를 느꼈다. 밤이 길어져서 아침 해는 날마다 늦게 뜨는데, 어제보다 더 밝아진 새벽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아파트 건물 사이로 엄청나게 큰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태어나서 본 보름달 중 가장 큰 달이었다. 그 달이 쏟아내는 빛에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저렇고 크고 밝고 아름다운 달을 볼 수 있다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동이 밀려왔다. 새벽 운동을 해야된다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하염없이 달만 바라보았다.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오늘 뜬 이 달이 68년만에 가장 큰 보름달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슈퍼문(Super Moon)이라 불렀다. 달은 지구 주위를 타원으로 돌고 있는데, 지구와 가장 가까워졌을 때 볼 수 있는 보름달이란다. 달은 평소보다도 몇만 km나 지구와 가까워졌고, 30%나 더 밝은 빛을 지구로 보내고 있었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평생 가장 크고 밝은 달을 보다니 운이 몹시 좋은 날이었다. 자연에 대한 경이와 감사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68년만에 가장 큰 보름달
68년만의 가장 큰 보름달
새벽 강을 보러 가다

새벽 강을 보러 가다

정태춘의 노래처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을 아주 오래도록 머무르고 맴돌아 나는 새벽 강을 보러 떠났다. 강은 아무 말없이 흐르지 않는 듯 흘렀고, 새벽 강에서는 물안개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 안갯속에서 가을은 점점 깊어졌다. 한여름 푸르름에 지쳤던 나뭇잎들은 저마다 다른 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안개는 산과 강을 구별하지 않았고, 나무와 사람을 나누지 않았다. 일찍 일어난 새 두어 마리만이 안갯속을 헤치며 날고 있었다.

강은 소리 없이 안갯속으로 흘렀다. 흐르고 흘러 그 강물은 낯선 서울에 닿을 것이며, 그곳에서 욕망의 찌꺼기들과 맞닥뜨릴 것이다. 안개는 그렇게 흘러가는 강물을 조용히 배웅하고 있었다. 그 강은 억겁의 세월을 소리 없이 흘렀고, 새벽마다 안개는 어김없이 피어올랐다. 무엇을 바라지도 않았고, 무엇을 이루고자 하지도 않았다.

정태춘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단다. 한때 그는 그의 노래로 세상을 위로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자 했다. 사실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 욕망으로 충만한 세상은 새벽 강과 같은 그의 노래를 반기지 않았다. 그는 순수했고 담백했지만 그의 노래로 세상의 탐욕을 정화할 수 없었다. 원래 탐욕이란 그런 것이다.

그가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해도 그의 노래는 영원히 내 가슴에 남았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고요한 새벽 강에 가면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세상의 그 어떤 음악도 그의 <북한강에서>처럼 새벽 강을 가슴 절절히 노래하지는 못할 것이다.

세상의 욕망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은 흐르고 흐를 것이다. 새벽마다 그 강은 안개를 피워 올리고 정태춘의 노래는 그 안개 사이로 은은히 떠오를 것이다. 위로하려 하지 말고 바꾸려고 하지 말라. 강의 일부가 되어 떠오르고 가라앉다가 그저 그렇게 흘러 가리라. 그리고 욕망이 다하지 않는 한 우울한 삶은 그렇게 지속되리라.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리를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리를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갯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했소.

강물 속으로는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히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젠 새벽 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정태춘, 북한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