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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소설

하염없이

하염없이

국어사전에는 ‘하염없이’라는 말이 ‘시름에 싸여 멍하니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이’ 또는 ‘어떤 행동이나 심리 상태 따위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는 상태로’라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다가 ‘하염없이’라는 말에 꽂혔다.

“군사독재 정권 밑에서 교련선생이 뭐냐, 교련선생이. 죽은 느그 성이 무덤서 벌떡 일어나겄다.”

속엣말을 감추는 법이 없는 아버지가 만날 때마다 쏘아붙였더니 어느 날 박선생이 느닷없이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상욱아. 너 하염없다는 말이 먼 말인 중 아냐?”

아버지는 말문이 막혔고 박선생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먹은 소주가 죄 눈물이 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고. 생전 처음 취했던 아버지가 비틀비틀, 내 몸에 기대 걸으며 해준 말이다. 고2 겨울이었다. 자기 손으로 형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안고 사는 이에게 하염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열일곱 여린 감수성에 새겨진 무늬는 세월 속에서 더욱 또렷해져 나는 간혹 하염없다는 말을 떠올리곤 했다. 아직도 나는 박선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하염없이 남은 인생을 견디고 있을, 만난 적 없는 아버지 친구의 하염없는 인생이 불쑥불쑥 내 삶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2022, pp. 49-50>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새들은 진짜 비상을 위해 이곳으로 와서 자신들의 몸뚱이를 던져버리는 것일까. 피가 식기 시작해 이곳까지 날아올 힘 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차갑고 헐벗은 바위뿐인 조분석 섬을 떠나 부드럽고 따뜻한 모래가 있는 이곳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설명들로 만족해야 하리라. 모든 것에는 항상 과학적인 설명이 있게 마련이다. 시에서 설명을 구할 수도 있고, 바다와 우정을 맺어 바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자연의 신비를 줄곧 믿을 수도 있다.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문학동네, 2001, p. 12>
6살 딸아이의 첫 소설 최초 공개

6살 딸아이의 첫 소설 최초 공개

6살 짜리 딸아이가 불쑥 내민 초단편 미니 소설. 혼자 보기가 너무 아까워 블로그에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주가 키우는 고양이”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총 7페이지로 되어 있고, 군데군데 딸아이가 직접 그린 삽화가 들어있다.

내 딸이라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소설의 기본 얼개를 제대로 갖춘 이야기인 것 같다. 😉 발단, 전개, 위기, 결정, 결말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고양이가 임신했다라는 장면에서 나와 아내는 뒤집어졌다.

국내 최초 아니 세계 최초로 공개되는 딸아이의 초단편 미니 소설을 감상해 보시라.

공주가 키우는 고양이, 페이지 1

공주가 키우는 고양이, 페이지 2

공주가 키우는 고양이, 페이지 3

공주가 키우는 고양이, 페이지 4

공주가 키우는 고양이, 페이지 5

공주가 키우는 고양이, 페이지 6

공주가 키우는 고양이, 페이지 7

김훈, 천박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김훈, 천박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소설가 김훈이 몇몇 인터뷰에서 드러낸 역사 인식과 사회 의식은 천박한 것이었다. 그토록 얇은 인식을 그토록 두텁게 말할 수 있는 그의 위악과 용기가 흥미로웠고, 그 두터움 속에 언듯언듯 비치는 그의 여림이 좋았다.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그의 독특한 무의식적 확신에는 그냥 외면해 버리기는 쉽지 않은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안팎을 일관되게 살지 못하는 회색지대 사람들의 죄의식일 수도 있고, 열등감일 수도 있는데, 나도 그 지대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므로 (생각은 다르지만, 삶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끄러우면서도 웃기는 일이다.

문장으로 보면 김훈은 황석영, 조정래와 더불어 우리 시대 최고라 할 만하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면서 날카롭지만, 그 문장들이 섞이면 때로는 맞서면서 부딪히기도 하고, 때로는 멀미가 날 정도로 현란하게 휘돌기도 하며, 때로는 너무 건조하여 바스러지기도 한다. 또한 문장과 문장들이 뱀같이 서로의 꼬리를 물어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한다. 특히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 같은 역사 소설에서 그의 섬뜻한 문장은 더욱 빛이 난다.

그가 기자를 그만두고 소설가가 된 것이 우리 문학을 위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그의 소설은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문장을 지닌 소설가의 역사 인식이 지극히 얇은 것은 신이 너무도 공평하거나 아니면 신이 인간을 질투한다는 사실의 반증일 것이다.

그가 한겨레신문 기자 때 쓴 “밥에 대한 단상”은 내가 신문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칼럼이었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 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관찰자인 기자가 써낼 수 있는 모든 요소가 짧은 글 속에 다 들어가 있다.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칼럼이다. 이 칼럼에서 묘사된 장면은 후에 <배웅>이라는 단편 소설의 한 장면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소설보다 이 칼럼이 훨씬 낫다.

그가 보여준 문장들은 계속되어야 한다. 감당하지도 못하는 말을 줄이고,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 같은 문장들을 보여 달라. 그의 인식에는 동의하지도 않고 동의할 수도 없지만, 그의 문장은 계속 보고 싶다. 그의 건필을 기원한다.

<덧글> 김훈의 한겨레 쾌도난담에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리나라는요, 언론이 탄압을 받아서 문제가 생기는 건 절대 아니고, 그 반대야. 너무 붙어먹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언론의 자유? 말도 안 돼. 내가 엠네스티 언론인위원회 위원장이거든. 그 발족식에 가서 내가 물었어. 언론인위원회가 도대체 뭐하는 곳이냐. 그러니까 기자들이 보도에 관해 박해받을 때 연대해서 정권과 싸우는 게 목적 중 하나라는 거야. 너희들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어. 누가 박해를 받아. 그때 밀가루 파동 나서 박해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더라고. (웃음) 문제는 붙어먹어 생긴 거야.

기자에 대한 그의 인식에는 동의한다. 현 시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