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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신자유주의

최저임금 단상

최저임금 단상

지난 40년 간 지속된 신자유주의는 극심한 양극화를 남겼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고 주장했고, 시장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었다. 그들이 약속했던 낙수효과는 애초부터 사기였다.

2017년 대통령 선거 때 모든 후보들은 최저임금 인상을 공약했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조차도 임기 내 최저시급 1만원을 약속했다. 그랬던 그들이 문재인 정부가 지난 2년간 최저임금을 1880원을 올리자 경제를 망친다며 생난리를 치고 있다.

조중동을 비롯한 주류언론과 야당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을 들먹이면서 최저임금 공약을 철회하고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폐기하라고 연일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다. 언제부터 그들이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 편이었을까.

최저임금의 인상은 극심한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소극적인 정책이다. 말로는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사기다. 양극화 해소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증거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부담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지 않고는 양극화 해소는 가능하지 않다.

자영업자들과 소상공인들도 역시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다. 그들의 어려움은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 상황을 을대을의 대결로 몰고 가는 것은 한마디로 후안무치다. 1인당 GDP가 3만불이 넘는 나라에서 최저임금 인상이 이렇게 논란이 되는 것은 수준 낮은 언론과 정치인들 때문이며,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 나라의 기득권층은 여전히 견고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세상이 금방 바뀌는 건 아니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는 말처럼 쉽지 않다. 일단 의회권력을 교체한 후 노무현 문재인 세력이 적어도 30년 정도 집권하면 그때는 적폐청산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시장에 대하여

시장에 대하여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자기 조정이 가능한 시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Our thesis is that the idea of a self-adjusting market implied a stark utopia. Such an institution could not exist for any length of time without annihilating the human and natural substance of society; it would have physically destroyed man and transformed his surroundings into a wilderness. 자기 조정이 가능한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완전한 유토피아를 가리킨다. 사회와 인류의 멸망 없이 그러한 제도는 잠시도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인류는 파멸될 것이고 자연은 황폐해질 것이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기 조정이 가능한 시장이라는 개념은 환상이다. 그런 제도는 인간의 두뇌나 책에서만 존재하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시장은 사회의 일부이며, 인간이 (또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시장 경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는 경제학자, 자본가, 정치인들은 늘 모든 경제를 시장에 맡기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를 약육강식만이 존재하는 정글로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는 주장만큼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으며 위험한 경제 이데올로기는 없다.
빨갱이와 신자유주의

빨갱이와 신자유주의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들이 해방 이후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감추기 위해 들고 나온 무기는 “반공”이었다. 자신들의 정적을 죽이기 위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빨갱이” 딱지를 남발했다. 수많은 민족주의 인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빨갱이라는 미명으로 스러져갔다. 이성과 논리와 상식은 빨갱이 딱지 앞에 처참하게 뭉개졌다. “반공”을 국시로 50여년 간을 살았다.

수구반동 기회주의자의 전형인 박정희는 그의 정적 김대중을 빨갱이로 낙인찍어 평생을 괴롭혔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김대중이 정말 좌파 정치인인줄로만 알았다. 김대중의 <옥중서신>을 읽고서야 그가 얼마나 보수적인 정치인인지 알게 되었고, 사실 조금은 실망한 적이 있다. 남로당 군총책을 맡았던 박정희가 온건 보수정치인 김대중을 빨갱이로 몰아붙일 정도이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들이 처음으로 정권을 놓친 것이 해방 이후 52년만인 1997년이었다. 그들은 지독히도 탐욕적이지만 또한 지독히도 무능했는데 그 결과는 1997년 IMF 외환 위기였다. 이때도 김대중은 원조 수구반동 기회주의자 중 하나인 김종필과 손을 잡지 않고는 정권교체를 할 수 없었다.

2002년, 혜성과 같은 노무현의 등장은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들에게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땅 한반도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그들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단기필마로 정권을 쟁취했긴 했지만,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은 노무현을 탄핵했고, 끊임없이 흔들어댔다. 수구반동 세력들은 10년만에 정권을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 그들은 2009년 노무현과 김대중을 죽였다. 인정하지도 않았고, 인정할 수도 없었던 그 10년의 세월을 지우려고 노무현과 김대중을 죽였다.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들과는 다르게 소위 자칭 좌파라는 세력들은 김대중과 노무현 10년의 세월을 “신자유주의” 시대로 규정하고 공격했다. 지금 이 땅의 주요한 문제들은 신자유주의로부터 기인하며 그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김대중과 노무현은 공공의 적이라는 논리였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이명박보다 더 파렴치하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의 “빨갱이” 공격과 자칭 자파라는 세력들의 “신자유주의” 공격은 방향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수구반동 세력들은 무능하고 부패하고 탐욕적인 세력이고 자칭 좌파들은 몰역사적이고 독선적인 세력이지만 기회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최근 경향신문의 논설위원 이대근이 레디앙에 기고한 글을 보면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의 논리와 판박이다. 이명박 정권을 반민주 정권이라 할 수 없고, 이명박 정권이 반민주이면 김대중, 노무현도 반민주가 되어야한다는 그 논리 말이다.

일반적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반민주 독재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같은 기준으로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도 그런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명박 정권이 단순히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역시 그 차이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설정할 수 없는 것은 너무 자명하다. 사회적 시민권의 확산 정도, 사회 경제적 정책을 기준 삼아 이명박 정권을 반민주로 규정하고 싶다면 지난 10년 정권도 역시 반민주가 되어야 한다.

<이대근, “민주당-진보정당 모두 패배하는 길“, 레디앙>

이대근과 같은 사이비 좌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구반동 세력의 영구집권을 꿈꾸는 것일까? 정말 이들이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면 이명박 정권 퇴진 운동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은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이명박은 애써 두둔하거나 모른척 한다. 김대중, 노무현이 신자유주의 정부라 공격을 받아야한다면 그 잣대로 이명박은 한 100만배쯤 더 신랄하게 공격받아야 한다. 때문에 나는 이들이 정말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자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역겹다.

자칭 B급 좌파인 김규항도 이대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10여년 동안 세 개의 정권이 존재했다. 그중 두 정권은 민주주의의 껍질을 앞세워 자본 편에 섰고 하나의 정권은 그 껍질마저 팽개치고 자본 편에 서고 있다. 그리고 그 두 정권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 ‘차이’를 내세워 오늘 다시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어떠세요. 겪어보니까 그래도 옛날이 그립지요?” 근래 그들 가운데 한 주요한 인사가 강연에서 했다는 말은 그들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그들이 마치 인간이 어디까지 파렴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듯한 행태를 지속할 수 있는 건, 그들을 ‘그래도 현실적인 대안’이라 인정하는 사람들 덕이다.

<김규항, 민주주의의 씨앗, 한겨레>

김규항의 논리대로라면 노무현을 지지하는 나같은 사람은 파렴치한이다. 우스운 것은 나같은 파렴치한은 신자유주의를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노무현을 지지했을까? 노무현은 정말 신자유주의자였을까? 노무현은 정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자본의 편에만 섰을까? 노무현의 정책은 모두 신자유주의이기 때문에 내팽개쳐져야만 라는 것일까? 과연 우석훈의 말대로 “행정도시 건설”이나 “4대강 죽이기 사업”이 똑같은 토목사업일 뿐일까?

나는 궁금하다. 진보신당 지지율 1.2%로 그들은 어떻게 권력을 쟁취할 것인가? 조중동과 한나라당과 싸우지 않고 그들은 어떻게 정권을 쟁취해서 신자유주의를 몰아낼 것인가? 반노무현, 반신자유주의만으로 그들은 그들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미안하지만, 이 땅의 민주주의는 김대중 노무현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민주주의 씨앗은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이다.

민주주의의 달인,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

민주주의의 달인,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

평생 민주주의를 연구했다는 민주주의의 “달인”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면서, “달인”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가 사회의 최상층 이익만을 보장하고 서민과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며, 법의 지배와 인권보장, 권력 운영방식에서 경찰, 사법, 정보기구들이 권위주의적 양태를 보인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오늘의 정부를 보수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정부를 반민주적이라고 평하게 되면, 역으로 “민주정부”라고 생각하는 앞선 정부들은 그만큼 긍정적으로 미화될 것이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이해방식은, 소통불능을 오히려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이른바 진보세력의 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과거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문제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과거 이른바 진보적인 정부들 역시, 경제와 사회정책에서 신자유주의 성장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로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나빠졌고, 국가의 사법, 경찰기구들은 충분히 민주화되지 못했다. 또 소통이 잘 안 되었던 것은 그때도 비슷했다.

<최장집, 소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 경향신문>

이명박 정부는 보수정부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반민주정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명박이 반민주가 되면 노무현 정부가 민주정부가 되니까.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정부였고, 따라서 노동자와 서민의 삶의 조건은 악화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최”신자유주의 정부라 상관없다. 노무현 정부 때 국가 권력기구들은 충분히 민주화되지 못했다. 지금은 경찰이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고, 인터넷에서 정부 비판하면 구속되는 것은 당연하고, 광우병 관련 보도를 하는 PD들은 기소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니까. 민주정부를 비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이명박이 반민주면 노무현이 민주가 되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아마 최장집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서민들의 삶을 망쳐놓은 장본인이 자살했으니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무현에 대한 증오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고 있는 최장집은 민주주의 “달인”이라 불릴만하다. 배웠다는 인간의 인격이 이 정도로 이중적이라면 이명박은 양반 중의 양반이다.

민주주의의 “달인”이 민주주의를 농락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온다…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온다…

우연히 김규항이 프레시안에 쓴 칼럼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를 읽었다. 김규항을 비롯한 좌파들의 생각이 어떤지 대강은 알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사실 이런 류의 글들은 그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명박과 한나라당, 그리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수구 극우들을 지극히 이롭게 한다. 따라서, 이런 글들은 좋은 세상을 오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좌파들의 주장은 신자유주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공공의 적이므로, 신자유주의가 없어지지 않고는 좋은 세상이 오지 않는다로 요약될 수 있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다시 말해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극복될 수 없는 모순을 갖고 있다. 필연적으로 양극화는 심해질 수밖에 없으며, 인간들은 무한 경쟁의 정글로 향하게 되고, 우리가 바라는 인간적인 삶은 도태되어 버린다. 자본주의가 극복되고, 거의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것이 사회주의일까? 이론적으로는 사회주의가 맞겠지만, 현실적으로 인간이란 종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좌파들의 또다른 주장은 이명박이나 노무현이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고 본다.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도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바마나 부시나 다를 것이 없다고 얘기한다.
이를테면 “모든 게 이명박 때문” “이명박만 없으면”이라는 ‘시대의 신학’이 목표로 하는 세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명박 이전에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훨씬 더 민주적이며 개혁적인 정권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사회 진보 운동의 목표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인가? 물론 진보적이되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야 ‘이명박이라는 짜증나는 인간’만 사라져도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대개의 사람들은 이명박이 물러나고 김대중이나 노무현 시절로 되돌아간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 [김규항,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이 지점에서 나는 좌파들과 결별할 수 밖에 없다. 김규항의 질문에 내가 답하자면, 이명박이 없어지면 이명박이 없어진만큼 좋은 세상이 온다. 한나라당이 사라지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이 된다. 조중동이 폐간되면, 우리 사회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2배쯤 좋은 사회가 된다. 물론, 그 좋은 세상이란 것이 좌파들이 얘기하는 궁극적인 사회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후진 사회는 아니란 얘기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유모차를 끌고나가 촛불을 켤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대운하 같은 정신 나간 짓거리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돈많은 부자들은 지금보다 더 세금을 많을 냈을 것이며, 복지 예산은 지금보다 조금 더 늘어났을 것이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아이들은 조금 더 행복한 세상에서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중동이 없었다면, 이명박 같은 사기꾼이 절대 대통령으로 뽑히지 않았을 것이다. 조중동이 없었다면, 지금쯤 더 이상 북한 퍼주기 얘기는 안나왔을 것이다. 좌파들이 원하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이 권력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조중동은 폐간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이명박과 한나라당과 투쟁해야 하며, 조중동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상식과 토론이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명박과 조중동을 놔두고, 신자유주의와 싸우자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이념은 반대지만, 이명박과 같은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신자유주의가 힘을 못쓰고 하려면, 일단 이명박과 조중동이 사라져야 한다. 좌파들은 이 사실을 당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노무현을 까대던 진보 학계의 거두 최장집이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별 말이 없다. 대부분의 좌파들이 그렇다. 좌파들은 왜 이명박이나 조중동보다 노무현을 더 싫어했을까? 왜 그랬을까? 노무현이나 이명박을 동일시하는 그런 좌파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좌파들의 말을 실현하는 길은 혁명을 하는 것밖에 없는데, 내가 보기에 이 지구상에서 2008년 혁명이 가능한 나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길 밖에 없지 않을까? 그들이 진정 평등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원한다면 말이다. 나는 이명박 정권보다 노무현 정권 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부시보다는 오바마가 나을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이다. 노무현이나 오바마를 성공시키고, 그 다음에는 그들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인물들을 선택해 나가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민노당이 제도권으로 들어온 것이 언제였는가? 노무현 정부 때 아니었는가? 내가 노무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단 한걸음 우리가 원하는 사회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좌파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보였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야 우리는 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미국도 흑인 대통령이 나오기까지 200년이 넘게 걸렸다. 오바마가 얼마나 진보적 인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200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비주류인 흑인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는 사실. 역사는 참 더디게 흐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좌파들이 열걸음을 원하는데 노무현은 단 한걸음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좌파들은 그 한걸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한걸음이 눈물이 나도록 소중하다. 오바마가 당선되었다고, 흑인들의 삶이 당장 나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리고 나에게는 그 오바마의 한걸음이 중요하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없어지면 우리는 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조중동이 없어지면 우리는 두걸음을 내딛을지도 모른다. 이명박과 싸우지 않고, 조중동과 싸우지 않고, 신자유주의 타파를 부르짖는 것은 거짓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파랑새를 타다

파랑새를 타다

나라 안팎이 참으로 어수선하다. 세계화를 기치로 무한질주하던 신자유주의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예상보다도 빠르게 말이다. 이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목표는 무한 이윤 추구 또는 무한 성장 추구인데, 이 지구상에서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 무엇인가를 무한대로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임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기름값은 매일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며 뛰고 있다. 온실 가스 때문에 북극의 얼음은 녹고 있고, 전과 14범을 대통령으로 만든 나라에서는 미국에서 개도 먹지 않는 쇠고기를 무한대로 수입하려 하고 있다. 5월 초인데도 기온은 연일 30도 언저리를 맴돈다. 여름은 점점 빨라지고 있고, 길어지고 있으며, 무더움과 비례하여 사람들은 제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돈에 미치고 경제에 미친 어른들은 세상을 빠르게 망치고 있으며, 그것을 보다 못한 어린 학생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고 있다.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작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것이 있다. 자전거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자는 것. 작년부터 계획했던 것이라 가끔씩 자전거를 찾아보고는 했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게으름과 결벽. 나의 특기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발휘된다. 엊그제 파란 자전거를 하나 구입했다. 김훈은 자신의 자전거에 “풍륜”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였지만, 나는 내 자전거를 “파랑새”로 부르기로 했다. 파랑새를 타고 훨훨 날아갈 수 있을까?

파랑새를 타고 5월의 밤을 달리니, 아카시아 향기가 내내 따라와 나를 감싼다.

파랑새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왜 나쁠까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왜 나쁠까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 The Myth of Free Trade and the Secret History of Capitalism)]이라는 책은 아주 선명하게 신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198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주류가 되어 버린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황당한 이데올로기로 개발도상국과 후진국들을 속이고 있는지를 풍부한 증거로써 신랄하게 반박하고 있다.

나는 이런 류의 선명한 책들을 좋아한다. 주장이 명쾌할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수많은 논거들이 일관성이 있으며, 논리적이다. 돌려 말하지 않고 핵심을 찌르고 있고,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지 않는다. 아마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주창하거나 추종하고 있는 경제학자들이 이 책에 대해 논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책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마지막 3페이지에서 “개명된 이기주의에 대한 호소”를 통해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설득하자라고 주장한 대목이다. 이것은 저자 장하준의 한계를 드러내 놓은 대목이기도 하거니와 상당히 순진한 주장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그런 식의 호소로 설득될 사람들이라면 사실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진짜 나쁜 이유는 그들도 알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화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 속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진 한정된 자원 속에서 무한의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근본 모순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한계는 조만간 드러날 것이고, 지능을 가진 인간들이라면 새로운 대안을 생각해낼 것이다.

문제는 그 한계에 봉착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덕일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더 많이 고통 받고, 절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지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대통령의 말

나를 우울하게 만든 대통령의 말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다. 최후의 지지자라 얘기할 만큼 골수다. 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원칙에 입각한 그의 정치 행보에 감탄하곤 한다. 지금 그가 대통령이 되어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도했던가 그리고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던가. 그의 말 한마디, 일거수 일투족이 나에게는 감동이었다.

그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을 때도, 그가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도 그를 이해했다.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가 선택해야 하는 결정의 현실적 타당성에 대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늘 대통령의 말은 처음으로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제 정치생활도 지금 20년째 접어드는데, 그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 그 전제에서 우리가 농업을 과연 방어하고 보호할 수 있는가, 그 전제가 다 맞다고 하면, 보호를 해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나, 그 논리를 그대로 우리가 수용해도 방법이 없는 데 대해서 가장 큰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대로 우리가 실천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는 일본은 농지에다가 골프장을 만들게 하되 나중에 식량 비상이 생기거나 하면 다시 농지로 환원할 수 있는 조건으로 전용을 하게 하거나, 쌀 기근이 생길 때 환원한다는 조건이 있는데, 우리나라도 같은 방식을 도입할 수 있겠느냐, 그런 고민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여러 정책을 생각해봐도 논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통적으로 향수가 깃든 감상적 농업을 포함해서 우리 농업은 다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국민과 함께하는 농·어업인 업무보고 마무리 발언 중에서]

대통령은 식량안보와 농업이 가져다 주는 환경보전과 같은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농민의 아들이었고, 젊었을 때 농사도 지어본 그리하여 농민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그가 오늘 “방법이 없다” 라고 얘기할 때 나는 답답하고 슬펐다. 현재 세계 경제 질서와 국내 경제 상황, 그리고 농민과 농업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가 “방법이 없다”라고 말할 때는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농민들에게는 마치 의사가 말기암 환자에게 “이제 6개월 남았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통령에게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농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대통령의 마음은 어땠을까.

대안은 민노당과 좌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간단하다.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 그런데 대통령과 우리의 고민은 우리나라가 현재 신자유주의를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90년대 말 IMF 사태 이후로 선진국들과 세계무역기구 (WTO)가 주도하는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우리 경제가 급속도로 흡수되었다. 이제는 이들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는 우리 경제를 유지시킬 수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나라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은 농업만을 살리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 농업은 지켜져야 한다. 이 양립할 수 없는 두가지 명제는 대통령만의 고민이 될 수 없다. 농업은 우리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산업이다. 지금은 다른나라에서 사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을때 우리는 생존할 수 없게 된다. 식량은 다른 자원이나 상품과 비교될 수 없다.

정부 차원에서 나서기 힘들다면 시민단체와 농민들,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그 목표는 WTO 체제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밝히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국제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WTO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제시하는 방향으로는 이 지구와 인류가 궁극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데 있다. 따라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문제다. 왜곡된 시장을 바로잡아야 하고,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를 제어해야 한다. 거의 모든 나라의 민중들이 동참해야 풀리는 문제인 것이다.

세계화 국제 포럼에서 내놓은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 라는 책은 농업문제에 대한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1. 자립적인 식량 재배를 위한 토지 접근권은 기본적인 인권이다. 세계무역체제 또는 국제무역의 이익을 이유로 지역사회나 국가가 이런 기본권을 부인당해서는 안 된다.
  2. 소규모 토지 소유자의 농지가 고도로 집중화한 거대 기업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세계의 빈곤과 굶주림은 물론 환경파괴의 주된 원인이 된다.
  3. 사람들이 여전히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일하면서 그 땅에서 나는 것으로 살아가는 곳에서는 그들이 제 자리를 지키면서 세계 시장이 아닌 자기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과 인센티브가 실시돼야 한다.
  4.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와 같은 국제기구의 관료들이 대규모 수출지향 단작농업을 선호하는 편향은 반대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5.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게 해주는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한다.
  6. 지속가능한 농업을 실현하기 위한 궁극적인 해법은 수천 년간 실천돼온 것과 같은 비기업적이고 소규모인 유기농업이다.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 pp. 305-306]

현재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했으면 좋겠다. 혹시 대통령께서도 안 읽어 보셨다면 한 번 읽어 보셨으면 한다.

21세기 인류 경제의 화두는 더 이상 성장이 아니다. 지속가능성 (Sustainability). 이것이 우리가 생존을 위해 고민해야 할 화두다.

너무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머리가 나쁜 것인지

너무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머리가 나쁜 것인지

민노당의 간판 스타들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백만장자와 대기업으로부터 매년 20조원을 걷어 650만 빈곤층에게 연 300만원씩 지원하겠다.”

<노회찬>

“진보정당 입장에서 볼 때 대통령 4년 연임제가 될 때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더 어려울 수 있다. 만에 하나 한나라당이나 다른 당이 당선되면 8년 동안 하지 않겠나. 8년 후에 민주노동당이 안되면 어떻게 되느냐. 16년을 기다려야 하고 자칫하면 24년을 기다려야 한다.”

<권영길>

“정권교체가 아닌 시대교체를 이뤄내겠다.”

<심상정>

이들의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로 느껴지는 것은 과연 나 뿐일까? 이명박의 “한반도 대운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의 주장도 그에 버금갈 정도로 허탈하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양극화도 상당히 심각한 문제지만 우리나라는 그것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언론과 남북 문제.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생산적인 논쟁을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진정으로 민노당이 수권의 의지가 있다면, 상식의 땅에 두 발을 디뎌야 할 것이다.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말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역겨운 얼치기 진보보다는 차라리 김용갑이 담백하다

역겨운 얼치기 진보보다는 차라리 김용갑이 담백하다

한나라당 의원 김용갑은 소위 수구꼴통의 대명사다. 그가 살아온 이력이 그렇고, 그가 주장하는 바가 그러하며 그가 행동하는 바 역시 그러하다.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사람 중 하나임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를 보면 눈쌀 찌푸려지고 밥맛 없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역겹지는 않다. 이유는 그가 겉과 속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겨레에 실린 진보 지식인 손호철의 변명은 수구꼴통 김용갑의 주장과 행동을 훨씬 담백하게 만들 정도로 어처구니 없다. 지난 달 최장집의 한겨레 인터뷰의 완성판이라 할 것이다. 이들이 역겨운 이유는 반신자유주의를 외치면서 한나라당의 집권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어떤 당인가. 신자유주의를 가장 신봉하고 전파하는 정치세력 아닌가. 이 정도면 거의 자가당착의 기네스북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중도우파 정도의 보수 정권이다. 해방 이후 친일 독재 세력의 50년 집권이후 보수세력 김대중, 노무현 정부 집권 이제 겨우 10년째다. 그나마 IMF 사태가 아니었다면 개혁 보수 세력의 정권 교체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지난 60년간 한국이 이루어온 정치적인 성과다. 절차적 민주주의 완성에 60여년이 걸린 것이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의 집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친일 독재를 기반으로 했던 우리나라 특권 주류들에게 정권을 넘긴다는 얘기다. 반신자유주의가 핵심이라는 떠드는 (얼치기) 진보들이 말하는 “한나라당으로 정권교체가 당연하다, 어쩔 수 없다”라는 얘기는 시계를 꺼꾸로 돌리자는 주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볼 때, 이들 진보들은 가장 교묘한 반노세력일 뿐이다. 우리 정치의 새로운 대안이 될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노회찬이 떠들고 있는 민노당도 마찬가지다. 진정으로 신자유주의가 문제라면 이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어떻게 하면 집권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왜 여론이 이렇게 왜곡되어 있는지 그 문제점을 성찰해야 되는데, 이들은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어쩔 수 없다며 노무현만을 반대하고 있다. 이념만 다를 뿐, 이들 얼치기 진보들도 특권과 자만으로 범벅되어 있다. 반동이며 표리부동이다. 신자유주의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것 맞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 사회의 주요 의제로 공론화할 만큼 우리 사회의 수준이나 여건이 열악한 것 또한 사실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오는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 문제이지만 이것보다는 더 시급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첫째 제대로 된 언론의 부재다. 조중동을 비롯한 거의 모든 언론이 사회의 의제와 여론을 왜곡시키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의제의 토론도 무의미하다. 조폭언론과 싸우지 않으면서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둘째 북핵 문제를 비롯한 남북, 북미 문제의 해결이다. 이것이 선행되고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북이 평화체제를 구축하면서 자유왕래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이념을 가지고 토론하기는 쉽지 않다. 국가보안법도 철폐할 수 없는 수준의 나라라는 것 알고 있지 않은가. 자꾸 진보들은 노무현 정부가 실패했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지난 4년간 노무현 대통령이 이루어 놓은 것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대통령이 해 놓은 일보다도 더 많고 성과도 상당하다. 나는 노무현 정도 (사실 노무현 보다 나은 정치인이 보수 진보를 통틀어 한사람도 없지만) 의 개혁 보수 정치인이 적어도 10년이상 더 집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상식이 지켜지는 사회로 정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 되면 우리도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고, 양극화를 줄이기 위해 국민이 합의하고 같이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수준에서 얼치기 진보들이 얘기하는 것은 공허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한나라당으로의 정권교체 운운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반신자유주의가 얼마나 진정성이 없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지금 진보세력, 민노당이 집권한다 해도 노무현 만큼 잘 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노무현을 욕해도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국민은 훌륭한 국민이다. 노무현은 21세기 초 대한민국이 찾아낸 가장 소중한 존재다. 지금은 그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 소위 진보 지식인들에게 바란다. 최소한 김용갑보다는 담백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