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ed by
Tag: 욕망

최고의 욕망

최고의 욕망

우리나라 부모들(특히 엄마들)이 가진 최고의 욕망은 자식들의 출세이고, 그것의 첫 걸음은 자식들의 명문대 입학이다. 특권과 반칙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려면 “갑”이 되어야 하니 부모들의 욕망만을 탓할 수는 없겠으나, 그 욕망의 크기가 도를 넘었다. 그 욕망은 아이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었고, 학교는 폐허가 되었다. 아이들을 어떤 대학에 보내느냐가 교육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아이들은 숨을 쉴 수 없다.

드라마 <SKY 캐슬>이 인기를 끈 이유는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 하기 때문이다. 자식들의 명문대 입학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일상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이 드라마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바보라도 세상에는 명문대 입학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관념일 뿐, 현실은 오직 무한경쟁이요, 정글이다. 친구들과의 우정은 아름다우나 그들은 결국 경쟁자이자 적일 뿐이다. 욕망은 그렇게 세상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이런 세상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 욕망과 그 욕망의 종착역이라는 것이 모두 허상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부모들은 집단최면에 걸려 있는데, 그 최면에서 깨어나면 된다. 간단하나 쉽지는 않다. 그 욕망의 약속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들을 믿고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다. 부모들의 욕망을 아이들에게 투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만의 인생이 있다. 그 인생의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면 된다. 그것이 부모가 해야할 유일한 일이다.

드라마 <SKY 캐슬>이 끝났다. 그 드라마 속 부모들은 욕망을 내려놓았고 아이들은 지옥에서 벗어났다. 너무나 착한 결말에 많은 이들이 실망했다. 드라마 밖의 현실은 여전히 입시 지옥이고 부모들의 욕망은 나날이 커져가기 때문이다.

마음을 기르는 방법

마음을 기르는 방법

맹자는 마음을 기르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맹자가 말했다. “마음을 기르는 방법으로는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사람됨이 욕망이 적으면서도 본래의 선한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드물고, 사람됨이 욕심이 많으면서도 본래의 선한 마음을 보존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드물다.”

孟子曰, “養心莫善於寡欲, 其爲人也寡欲, 雖有不存焉者, 寡矣, 其爲人也多欲, 雖有存焉者, 寡矣.

<孟子, 盡心 下>

아무리 생각해도 욕망을 통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욕망을 줄이는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이 가능한가?

지식인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

지식인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보다 좀 길 거예요.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매달려 있으니까, 이리저리 다니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을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당신한테는 무식이 좀 필요해요. 무식, 아시겠어요?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머리가 힘이 세니까 항상 그 머리가 당신을 이겨 먹을 거라고요. 인간의 머리란 구멍가게 주인과 같은 거예요. 계속 장부에 적으며 계산을 해요.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아주 좀상스러운 소매상이지요. 가진 걸 몽땅 거는 일은 절대 없고 꼭 예비로 뭘 남겨 둬요. 머리는 줄을 자르지 않아요. 아니, 아니지! 오히려 더 단단히 매달려요, 이 잡것은! 붙잡고 있던 줄을 놓치기라도 하면 머리라는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하다가 완전 끝장나 버려요. 그런데 사람이 이 줄을 끊어 버리지 않으면 산다는 게 무슨 맛이겠어요? 노란 카밀러 맛이지. 멀건 카밀러 차 말이오. 럼주하고는 완전 다르다고요. 럼주는 인생을 확 까뒤집어 보게 만드는데!”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옮김,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p. 428>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마련해 놓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욕망과 공포에서 벗어나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블로그 10년

블로그 10년

블로그를 시작한지 10년이 되었다. 블로그를 통해 그동안 많은 말을 했다. 슬픔과 분노와 비난을 토하기도 했고,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 말들이 서로 뒤섞여 지난 10년의 흔적을 이곳에 새겼다.

흔적 없는 삶을 욕망하면서 흔적을 남기는 역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모든 욕망을 놓아버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삶을 바랄 수 있을까?

삶이 허락되는 한, 블로그는 지속될 것이고 흔적은 남을 것이다. 새로운 10년은 더 간소하고 담백하게 살아보련다. 물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인간의 욕망과 운명

인간의 욕망과 운명

인간의 욕망이 바로 그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그의 욕망이 바로 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가 곧 그의 행위이며, 그의 행위가 곧 그가 받게 될 결과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인간은 그가 집착하는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죽은 다음에 그는 그가 한 행위들의 미묘한 인상을 마음에 지니고서 다음 세상으로 간다. 그리고 그의 행위들의 수확을 그곳에서 거둔 다음에 그는 이 행위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이와 같이 욕망을 가진 자는 환생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

<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사드>

치유

치유

마하라지는 신이 베푸는 치유의 손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고통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그것을 종식시키는 것도 인간의 능력 범위 내에 있습니다.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행위의 결과(업보)와 대면하게 하고, 균형을 회복하도록 요구함으로써 도와줍니다. 카르마(Karma)는 정의를 위해 작용하는 법칙입니다. 그것이 신이 베푸는 치유의 손길이지요.

<마하리지, I AM THAT>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그것만이 궁극의 치유일 것이다.

욕망의 올림픽

욕망의 올림픽

제 30회 런던 올림픽이 화려하고 성대한 개막식을 시작으로 열전 5일째에 접어들었다. 개막식에서 선수와 심판들은 스포츠맨십의 진실된 정신을 지키겠노라고 다음과 같이 선서했다.

In the name of all the competitors I promise that we shall take part in these Olympic Games, respecting and abiding by the rules which govern them, committing ourselves to a sport without doping and without drugs, in the true spirit of sportsmanship, for the glory of sport and the honor of our teams.

모든 참가 선수들의 이름으로, 나는 스포츠맨십의 진실된 정신으로 스포츠의 영광과 우리 팀의 영예를 위해, 경기 규칙을 존경하며 따르고 도핑과 약물 투여를 하지 않으며 경기에 참여할 것을 약속합니다.

In the name of all the judges and officials, I promise that we shall officiate in these Olympic Games with complete impartiality, respecting and abiding by the rules which govern them in the true spirit of sportsmanship.

모든 심판과 위원의 이름으로, 나는 스포츠맨십의 진실된 정신으로 경기 규칙을 존경하며 따르며, 올림픽 경기를 공정하게 판정할 것을 약속합니다.

올림픽이 시작되고, 연일 심판들의 오심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심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수로 인해 오심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실수를 한 심판은 적어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사과해야 한다.

런던 올림픽에서 연일 쏟아지고 있는 오심들은 실수라기 보다는 어떤 의도가 개입된 지극히 비상식적인 오심이었다. 따라서 오심이라기 보다 편파판정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선수도 심판도 알지 못한 자유형 400m 박태환의 실격. 박태환이 왜 실격되었는지 누구도 설명하지 못하자 슬그머니 실격이 취소되었다. 이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유도를 청기백기 게임으로 전락시킨 심판위원장. 이미 심판들이 전원일치의 판정을 내렸는데 심판위원장이 개입하여 판정을 번복시킨다. 펜싱에서는 끝나지 않은 1초로 승패가 뒤바뀌어 버렸고, 4년 간 피땀을 흘린 선수는 망연자실 눈물을 흘린다.

잘 정리된 규칙이 있고, 고도로 훈련받은 심판들이 있고, 수십 대의 방송카메라가 있고, 경기를 지켜보는 수억의 관중이 있는 상황에서도 어이없고 몰상식한 판정들이 끊이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은 모든 도덕과 수치심을 억누를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스포츠에서 이 정도이면 사실 정치나 경제 같은 분야에서는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올림픽이 점점 상업화되고 정치화되어 간다는 것은 이미 상식처럼 되어 버렸다. 스포츠맨십의 진실된 정신을 위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승리해 보겠다는 게임맨십이 올림픽을 지배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돈과 권력에 대한 인간들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부조리한 욕망이 이 시대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힘이라는 사실, 그것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오쇼가 얘기했듯이, 욕망이 어떤 것도 안겨줄 수 없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 한, 스포츠맨십은 올림픽 선서에만 존재하고, 정의는 정치철학자의 베스트셀러에서만 회자될 것이다.

오심에 주눅들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수영의 박태환 선수, 유도의 조준호 선수, 그리고 펜싱의 신아람 선수 이들이야말로 자랑스런 올림픽 챔피언들이다. 그들의 노고를 위로한다.

날은 여전히 뜨겁고 매미는 정신없이 울어대고 있는 한여름이다.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장자 외편 달생(達生)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以瓦注者巧, 以鉤注者憚, 以黃金注者殙. 其巧一也, 而有所矜. 則重外也. 凡外重者內拙.

질그릇으로 내기 활을 쏘면 솜씨가 좋아 잘 맞는다. 띠쇠로 내기 활을 쏘면 주저하여 잘 안 맞게 된다. 황금으로 내기 활을 쏘면 마음이 혼란하여 전혀 안 맞게 된다. 그 재주는 마찬가지인데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 외물만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모두 외물만 소중히 한다면 안에 있는 정신은 옹졸해지고 만다.

오쇼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시로 번역했다.

궁수가 재미로 활을 쏠 때는
그의 온 기술을 다해서 쏜다.
만일 그가 청동으로 된 상패를 얻기 위해 활을 쏜다면
그는 어느새 신경이 예민해진다.
만일 그가 금상을 받기 위해 활을 쏜다면
그는 눈이 멀게 된다.
아니면 두 개의 과녁을 본다.
그는 그의 마음에서 이미 빗나가 있다.

그의 기술은 변함이 없으나
상이 그를 분열시킨다.
그는 근심한다.
그는 활 쏘는 일보다
이기는 일을 더 많이 생각한다.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
그의 힘을 다 고갈시켜 버린다.

<오쇼, 이겨야 할 필요>

이규혁 선수의 인터뷰를 보면서 이 구절이 떠올랐다. 지난 20년간 스케이팅은 그에게 기쁨이었고, 자유였고, 삶이었다. 그는 수많은 대회에 나가 때로는 우승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떨어지기도 했다.

삶은 그런 것이다. 언제나 이길 수도 없는 것이고, 때로는 이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스케이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 20년간의 과정을 즐겼다면 결과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 눈물을 흘릴 이유도 없다. 그는 이미 승리한 것이고, 언제나 승리한 삶이었다. 그걸 깨닫기만 한다면 금메달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기는 일보다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활을 쏘는 일이다. 무엇이 본질인지 깨닫게 되면 삶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 된다.

[이어 글쓰기] 소원을 말해봐

[이어 글쓰기] 소원을 말해봐

아침에 민노씨 님과 트위터를 하다가 “이어 글쓰기”를 하겠다고 덜컥 약속을 해버렸다. 지난 번에도 어떤 주제에 대해서 민노씨 님이 바통을 넘겼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냥 잊어버렸다. 나의 게으름과 결벽은 나도 어찌할 수 없으니 민노씨 님이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민노씨 님은 이런 일로 삐질 그런 밴댕이 같은 남자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김구 선생님은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그의 소원으로,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보다 나이가 더 적었을 때, 예를 들어 만약 작년에 이런 주제를 받았다면 나는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1) 조중동 폐간, (2) 정치 검찰 추방, (3) 한나라당 해산, (4) 이명박 퇴진 등등등, 이런 것이 나의 소원이라고. 지금 나의 소원을 얘기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것,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나의 욕망을 버리고 자족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물처럼, 바람처럼, 나무처럼 그렇게 사는 것,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이런 얘기조차 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자연은 스스로 완전하다. 자연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이미 완전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핀다. 그것들은 신이 내린 법칙 안에서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하다. 법정 스님은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만 제외하고 모든 것들은 행복하다. 한때는 자연의 한 부분이었던 인간들이 이제 자연에서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행하다. 그들은 욕망으로 가득차 있고,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매일매일 싸운다. 그 욕망이 이루어지면 또다른 욕망이 그들을 엄습한다. 그들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겨워 시름한다. 인간들이 욕망을 버리고 자연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모든 것은 부질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궁금한 것은 과연 소녀시대가 이 소원을 들어줄까요? 민노씨 님. 😉 덧. 이어 글쓰기는 규칙이 있군요. 제가 이런 것을 해보지 않아서 서툽니다. 이번 이어 글쓰기는 추적해보니 김우재 님이 시작하신 것 같은데, 김우재 님이 다음과 같이 규칙을 적어 놓으셨네요.
간단하게 자신이 릴레이를 받은 주자와 릴레이를 전달할 주자 3명만 명기하고, 이 페이지로 트랙백을 건다. 기한은 소녀시대가 활동을 접을 때까지 하고 싶지만…7월 30일까지. 소녀시대를 사랑하고 가카를 혼내주고 싶은 블로거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바라며.
제 글을 보고 이어 글쓰기를 하고 싶은 분은 7월 30일까지 쓰시고,  http://heterosis.tistory.com/trackback/211 로 트랙백하시면 됩니다. 누가 하시려나? 미리내 님? 아거 님? 도아 님? 아니면 로망롤랑 님? 아니면 CeeKay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