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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자본주의

아이폰은 언제 바꾸어야 하나

아이폰은 언제 바꾸어야 하나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물건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거의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미덕이고, 가장 중요한 정책은 경제성장이다.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소비하고, 버리고, 또 만들고, 또 소비하고, 또 버리고, 이런 행위를 다람쥐 챗바퀴 돌듯 무한정 반복한다.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도덕성도, 환경에 대한 고려도 발붙일 곳이 없다. 그것이 필요에 따른 적절한 소비인지, 아니면 불필요한 낭비인지 따질 이유도 여유도 없다.

기술이 발전하고, 새로운 정보기술제품들이 매일 시장에 나온다. 스마트폰이라 불리는 휴대전화도 거의 매일 새로운 모델들이 출시된다.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을 소비자들을 꼬드겨 멀쩡한 휴대폰을 새것으로 바꾸게 만든다. 각종 광고와 마케팅 기법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많은 소비자들은 그것이 조삼모사임을 알고도 새로운 기기의 현란함에 빠져들고 만다.

2010년부터 아이폰4를 사용했다. 이 기기는 스티브 잡스의 역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잘 만들어진 전화기다. 5년을 넘게 사용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애플은 2010년 아이폰4를 출시한 이후, 거의 1년에 하나씩 새로운 아이폰 모델을 내놓았지만, 새로운 모델로 갈아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난 해, 애플이 iOS8을 내놓기 전까지는 말이다.

iOS8은 아이폰4를 지원하지 않았다. 아이폰4의 하드웨어 사양이 새로운 iOS를 제대로 구동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 해 가을부터 아이폰6로 갈아탈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이폰4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때마침 단통법이라 불리는 세상에 듣도보도 못한 흉악한 법 때문에 아이폰6로 넘어가기를 단념했다.

새해 들어 딸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휴대전화가 필요하다고 하여, 단념한 아이폰6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용하던 아이폰4를 딸아이에게 넘기고, 단통법에도 불구하고 아이폰6를 구입하기로 했다. 딸아이가 아이폰4를 땅바닥에 집어던지지 않는 한, 아마 앞으로도 몇 년은 더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폰6를 받은지 2주쯤 된다. 기존 아이폰4에 비해 달라진 것은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는 것, 화면이 많이 커지고 해상도도 높아졌는데 그에 따라 전화기도 커졌다는 것, 터치ID로 지문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클릭 한 번으로 기존 아이폰4에 있던 모든 데이터와 세팅을 저장하여 고스란히 아이폰6로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이폰6는 애플이 iOS를 업데이트해 주는 한 계속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혁신이 나오지 않는 한 10년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이렇게 반자본주의적으로 소비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충분한 것은 충분한 것이다.

아이폰6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온다…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온다…

우연히 김규항이 프레시안에 쓴 칼럼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를 읽었다. 김규항을 비롯한 좌파들의 생각이 어떤지 대강은 알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사실 이런 류의 글들은 그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명박과 한나라당, 그리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수구 극우들을 지극히 이롭게 한다. 따라서, 이런 글들은 좋은 세상을 오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좌파들의 주장은 신자유주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공공의 적이므로, 신자유주의가 없어지지 않고는 좋은 세상이 오지 않는다로 요약될 수 있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다시 말해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극복될 수 없는 모순을 갖고 있다. 필연적으로 양극화는 심해질 수밖에 없으며, 인간들은 무한 경쟁의 정글로 향하게 되고, 우리가 바라는 인간적인 삶은 도태되어 버린다. 자본주의가 극복되고, 거의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것이 사회주의일까? 이론적으로는 사회주의가 맞겠지만, 현실적으로 인간이란 종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좌파들의 또다른 주장은 이명박이나 노무현이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고 본다.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도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바마나 부시나 다를 것이 없다고 얘기한다.

이를테면 “모든 게 이명박 때문” “이명박만 없으면”이라는 ‘시대의 신학’이 목표로 하는 세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명박 이전에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훨씬 더 민주적이며 개혁적인 정권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사회 진보 운동의 목표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인가? 물론 진보적이되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야 ‘이명박이라는 짜증나는 인간’만 사라져도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대개의 사람들은 이명박이 물러나고 김대중이나 노무현 시절로 되돌아간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

[김규항,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이 지점에서 나는 좌파들과 결별할 수 밖에 없다. 김규항의 질문에 내가 답하자면, 이명박이 없어지면 이명박이 없어진만큼 좋은 세상이 온다. 한나라당이 사라지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이 된다. 조중동이 폐간되면, 우리 사회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2배쯤 좋은 사회가 된다. 물론, 그 좋은 세상이란 것이 좌파들이 얘기하는 궁극적인 사회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후진 사회는 아니란 얘기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유모차를 끌고나가 촛불을 켤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대운하 같은 정신 나간 짓거리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돈많은 부자들은 지금보다 더 세금을 많을 냈을 것이며, 복지 예산은 지금보다 조금 더 늘어났을 것이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아이들은 조금 더 행복한 세상에서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중동이 없었다면, 이명박 같은 사기꾼이 절대 대통령으로 뽑히지 않았을 것이다. 조중동이 없었다면, 지금쯤 더 이상 북한 퍼주기 얘기는 안나왔을 것이다.

좌파들이 원하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이 권력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조중동은 폐간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이명박과 한나라당과 투쟁해야 하며, 조중동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상식과 토론이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명박과 조중동을 놔두고, 신자유주의와 싸우자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이념은 반대지만, 이명박과 같은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신자유주의가 힘을 못쓰고 하려면, 일단 이명박과 조중동이 사라져야 한다.

좌파들은 이 사실을 당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노무현을 까대던 진보 학계의 거두 최장집이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별 말이 없다. 대부분의 좌파들이 그렇다. 좌파들은 왜 이명박이나 조중동보다 노무현을 더 싫어했을까? 왜 그랬을까? 노무현이나 이명박을 동일시하는 그런 좌파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좌파들의 말을 실현하는 길은 혁명을 하는 것밖에 없는데, 내가 보기에 이 지구상에서 2008년 혁명이 가능한 나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길 밖에 없지 않을까? 그들이 진정 평등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원한다면 말이다.

나는 이명박 정권보다 노무현 정권 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부시보다는 오바마가 나을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이다. 노무현이나 오바마를 성공시키고, 그 다음에는 그들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인물들을 선택해 나가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민노당이 제도권으로 들어온 것이 언제였는가? 노무현 정부 때 아니었는가? 내가 노무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단 한걸음 우리가 원하는 사회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좌파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보였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야 우리는 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미국도 흑인 대통령이 나오기까지 200년이 넘게 걸렸다. 오바마가 얼마나 진보적 인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200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비주류인 흑인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는 사실. 역사는 참 더디게 흐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좌파들이 열걸음을 원하는데 노무현은 단 한걸음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좌파들은 그 한걸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한걸음이 눈물이 나도록 소중하다. 오바마가 당선되었다고, 흑인들의 삶이 당장 나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리고 나에게는 그 오바마의 한걸음이 중요하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없어지면 우리는 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조중동이 없어지면 우리는 두걸음을 내딛을지도 모른다. 이명박과 싸우지 않고, 조중동과 싸우지 않고, 신자유주의 타파를 부르짖는 것은 거짓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파랑새를 타다

파랑새를 타다

나라 안팎이 참으로 어수선하다. 세계화를 기치로 무한질주하던 신자유주의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예상보다도 빠르게 말이다. 이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목표는 무한 이윤 추구 또는 무한 성장 추구인데, 이 지구상에서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 무엇인가를 무한대로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임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기름값은 매일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며 뛰고 있다. 온실 가스 때문에 북극의 얼음은 녹고 있고, 전과 14범을 대통령으로 만든 나라에서는 미국에서 개도 먹지 않는 쇠고기를 무한대로 수입하려 하고 있다. 5월 초인데도 기온은 연일 30도 언저리를 맴돈다. 여름은 점점 빨라지고 있고, 길어지고 있으며, 무더움과 비례하여 사람들은 제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돈에 미치고 경제에 미친 어른들은 세상을 빠르게 망치고 있으며, 그것을 보다 못한 어린 학생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고 있다.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작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것이 있다. 자전거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자는 것. 작년부터 계획했던 것이라 가끔씩 자전거를 찾아보고는 했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게으름과 결벽. 나의 특기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발휘된다. 엊그제 파란 자전거를 하나 구입했다. 김훈은 자신의 자전거에 “풍륜”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였지만, 나는 내 자전거를 “파랑새”로 부르기로 했다. 파랑새를 타고 훨훨 날아갈 수 있을까?

파랑새를 타고 5월의 밤을 달리니, 아카시아 향기가 내내 따라와 나를 감싼다.

파랑새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왜 나쁠까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왜 나쁠까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 The Myth of Free Trade and the Secret History of Capitalism)]이라는 책은 아주 선명하게 신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198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주류가 되어 버린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황당한 이데올로기로 개발도상국과 후진국들을 속이고 있는지를 풍부한 증거로써 신랄하게 반박하고 있다.

나는 이런 류의 선명한 책들을 좋아한다. 주장이 명쾌할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수많은 논거들이 일관성이 있으며, 논리적이다. 돌려 말하지 않고 핵심을 찌르고 있고,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지 않는다. 아마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주창하거나 추종하고 있는 경제학자들이 이 책에 대해 논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책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마지막 3페이지에서 “개명된 이기주의에 대한 호소”를 통해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설득하자라고 주장한 대목이다. 이것은 저자 장하준의 한계를 드러내 놓은 대목이기도 하거니와 상당히 순진한 주장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그런 식의 호소로 설득될 사람들이라면 사실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진짜 나쁜 이유는 그들도 알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화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 속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진 한정된 자원 속에서 무한의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근본 모순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한계는 조만간 드러날 것이고, 지능을 가진 인간들이라면 새로운 대안을 생각해낼 것이다.

문제는 그 한계에 봉착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덕일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더 많이 고통 받고, 절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지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

삼성, 또 하나의 가족?

삼성, 또 하나의 가족?

미국 생활을 오래 하다가 느낀 것 중의 하나는 미국 사람들이 “의외로” 실수를 잘 저지르지만, 여간해서는 사과를 잘 안한다는 것이다. 특히 업무에 관해서 잘못이 있을 때 그들은 냉큼 사과하지 않는다.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미국은 소송이 만능인 나라라서 한 번 잘못을 인정해 버리면 자칫 인생이 결딴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삼성중공업의 잘못으로 태안 앞바다가 죽음의 바다로 변했다. 사고가 난지 한달이 지났지만, 삼성 쪽에서는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 없이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긴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하청업체의 자본금이 5천만원이란다. 기름 유출 사고로 인한 태안 앞바다의 피해가 수조원이 넘을 것 같은데, 사과 한마디 없이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긴다? 이것이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삼성이 하고 있는 일이다.

순박한 어민들과 국민들은 연일 자원봉사로 바다의 떠있는 기름을 닦아내기에 여념이 없지만 정작 책임을 져야할 기업은 말 한마디 없다. 사과는 커녕 항해일지까지 조작했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이런 기업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이고, 이런 기업의 총수가 존경받는 나라이니 할 말 다한 것 아닌가? 삼성 입장에서는 어설프게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를 했다가 자칫 회사가 결딴날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에 몸을 사리는것 같다. 글로벌 기업답지 않은가? 미국식으로 말이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또 느낀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범죄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다는 것이다. 아주 잘나가던 기업이었던 에너지 회사 엔론과 통신 회사 월드컴은 분식 회계 때문에 망해 버렸고, 경영진은 10년 이상 감옥에서 죄값을 치루고 있다. 미국에서 탈세를 하다가 걸리면 그것은 거의 인생 종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삼성 총수의 아들은 4조의 돈을 벌면서 단 16억원의 세금을 냈고, 세금을 피하기 위해 자식들을 위장취업시킨 어떤 정치인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신자유주의를 강화해야 하며,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하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 현 상태로 보면, 우리나라가 미국보다도 훨씬 더 기업하기 좋은 나라 아닌가?

도대체 언제까지 금이나 모아가면서 나라를 살리자고, 태안 앞바다 기름을 닦으면서 바다를 살리자고 할 작정인가? 그러면서도 한나라당을 찍어주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들인가? 당신들이 살리자고 하는 경제는 도대체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한 경제인가? 분노할 때는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하고,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나 더 당해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