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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진리

논어(論語) 한줄 정리

논어(論語) 한줄 정리

논어는 알다시피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는 공자의 가르침을 집약한 구절이 나온다.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된다.” 증자는 “예”하고 주저 없이 대답하였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증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논어 이인:15>

충(忠)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고, 서(恕)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충은 정성스럽고 진실된 마음을 뜻하며,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것(盡己之謂忠)이다. 서는 황금률에서도 얘기했듯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주자는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이 바라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 서(推己之謂恕)”라고 하였다.

세상이 복잡해 보여도 진리는 이렇게 단순하다.

신(神)의 본성 그리고 인간의 본질

신(神)의 본성 그리고 인간의 본질

결국, 야보 선사의 흔적없는 삶은 나를 라마나 마하리쉬와 성철 스님에게 인도했다. 성자들의 가르침은 그 뿌리가 어느 종교에 닿아있든지 상관없이 꼭 닮아 있었다. 또한, 라마나 마하리쉬의 신에 대한 가르침은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정의와 다르지 않았다.

신은 형상이 없이 어디에나 있습니다.

신은 순수한 존재이며, 순수한 의식입니다.

세상은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의 힘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은 세상의 창조자가 아닙니다.
신은 결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신은 그저 있습니다.
신에게는 의지도 욕망도 없습니다.

개별성이란 자신이 신과 같지 않다는 환영입니다.
이 환영이 사라질 때 남아 있는 것이 신입니다.

신, 구루, 참나는 동일합니다. 구루는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신입니다. 동시에 구루는 헌신자의 가슴에 있는 참나입니다.

신은 있습니다.
신은 그대 안에 있습니다.
신은 언제나 일인칭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불멸의 의식>, p. 124>

진리는 깨달은 성자들의 의해 이미 드러나 있었다. 세상은 이미 구원되어 있었다. ‘나’를 버리고 ‘참나’를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대로 인간의 본질은 신(神)일진데, 우리의 욕망과 카르마가 그 본질을 가리고 있다.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그것에 있다.

예수를 닮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책

예수를 닮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책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는 예수다.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인류의 역사는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로 나뉘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한 마굿간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왔으나, 세상은 그를 견딜 수 없었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리고 세상은 그를 신의 아들로 만들었다.

그가 광야로부터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다. 사람들은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수천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온 사람들이었다. 인류의 구원자를 기다려온 사람들이 정작 그가 나타나자 그에게서 달아나려 했다. 사람들에게 그는 이방인이었고, 걸인이었고, 위험한 혁명가일 뿐이었다.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두려웠다. 그의 가르침이 두려웠다. 진리가 두려웠다. 그래서 그를 죽여야만 했다.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여야만 했다.

그가 죽었어도 그의 가르침은 남았다. 말씀으로 남아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가 죽었어도 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예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를 외면하고 싶은데, 외면해야만 하는데, 그의 말씀은 주홍글씨로 남아 사람들의 가슴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깨달았다. 그를 신의 아들로 올리고, 그의 말씀 중 견딜 수 있는 것만 골라 경전을 만들었으며, 그 경전에 대한 해석을 특권화했다. 간교한 사람들은 예수를 팔아 장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천 년이 흘렀다.

많은 교회들이 여전히 예수를 팔았고, 사람들은 위로를 얻으러 교회에 갔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 되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거세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의 가르침은 간교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기복으로 전락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예수에게 기도를 했고, 권력을 얻기 위해 교회에 갔다. 예수는 가진 자들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주 드물게 예수의 말씀을 깨닫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영적 스승, 구도자, 신비가 등으로 불렸고,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복기하려 했다.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 복음 강의”도 그런 시도 중 하나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려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를 닮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읽어야할 책이다. 역자인 류시화는 책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를 추종하지 말고 나처럼 되라.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

[도마 복음 강의 서문 중에서]

모든 가르침이 일관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진리는 이미 수천년 전에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세상을 구원할 진리가 이미 전해졌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고,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든지 이 말씀들의 속뜻을 발견하는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리라.

[도마 복음 1절]

예수는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인생을 쉽게 사는 방법

인생을 쉽게 사는 방법

내 책상 컴퓨터 자판 옆에 있는 조그마한 책 한 권. 불교 초기 경전 중의 하나인 법구경이다. 일을 하다가 좀 시간이 나면 무심코 들춰 보면서 한 구절씩 읽곤 하는데, 그때마다 잔잔한 감동을 얻는다. 법구경의 ‘더러움’ 편에 있는 구절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두터워 수치를 모르고
뻔뻔스럽고 어리석고 무모하고
마음이 때묻은 사람에게
인생은 살아가기 쉽다

수치를 알고 항상 깨끗함을 생각하고
집착을 떠나 조심성이 많고
진리를 보고 조촐히 지내는 사람에게
인생은 살아가기 힘들다

<법구경, 244-245>

부끄러움을 모르고 뻔뻔하게 살면, 삶은 참 쉬워진다. 서너 달 사이 대한민국은 참 쉽게 사는 사람들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견디기 힘들다. 이 조그마한 땅에 무슨 업보가 그렇게 많은 것일까? 반만년 동안 아니 해방 이후만 보더라도 이 동쪽의 조그마한 땅은 참 편안하게 지낸 적이 없는 것 같다. 늘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날뛰는 세상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사람이 이 척박하고 황폐했던 나라의 제 16대 대통령이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그를 추억하면서 견딜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그를 잇겠다고 나설 것인가? 그가 우리의 희망이 될 것이다.

내 아이들에게는 어떤 삶을 보여 줄 것인가. 어떤 삶을 살라고 말할 것인가. 쉽고 살라고? 힘들게 살라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인 것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몇년은 참으로 고단한 시간이 될 것이다. 고단하고 힘들더라도 그것이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알고 싶으면

사랑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과 세상을 행복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이다. 단정적으로 말하지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신약 성경 고린도전서를 펼쳐보면 사도 바울이 사랑에 대해 적어 놓은 구절이 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소망하며, 모든 것을 견뎌 냅니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구절을 읽으면 된다. 그리고 행하면 된다. 이 구절만큼 명확하게 사랑을 정의한 것을 보지 못했다.

진리는 수천년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명백히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너무도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진리를 행하기는 쉽지 않다.

진리

진리

성경이나 불경, 그 밖의 다른 종교의 경전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모든 경전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이며, 그것을 가르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유대교의 여호와나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이슬람교의 알라는 모두 같은 이의 다른 이름이다. 이미 수천 년 전 힌두교의 경전, 리그 베다는 이것을 분명히 못박았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리그 베다 1:164:46>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 존중하지 않고 자기의 신앙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독선은 대개 사이비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