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ed by
Tag: 진중권

“파시즘이 나타났다” 진보 양치기들의 딱지붙이기 놀이

“파시즘이 나타났다” 진보 양치기들의 딱지붙이기 놀이

2002년 월드컵 때 수백만 국민들이 광장으로 나왔다. 붉은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을 했다. 대표팀은 월드컵 사상 첫 승을 거두고 내친 김에 4강까지 올랐다. 국민들은 환호했고, 기뻐했으며, 행복했다. 아마 그 때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수백만의 국민들이 떼지어 응원하는 것을 아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진보 양치기들은 말했다. “파시즘의 징후가 보인다”고.

황우석 때도 그랬지만 이번 심형래의 “디 워” 논란에도 진보 양치기들은 딱지를 붙인다. 비판막는 건 파시즘 진중권을 내버려 두라고. 네티즌의 집단 항의에 대해 진보 양치기들은 언제부턴인가 편리한 딱지를 준비했다. 자신들의 의견과 맞지 않으면 그냥 네티즌들은 파시스트가 되어 버린다.

딱지붙이기 놀이의 원조는 원래 극우 수구세력 아니었나. 지금도 내가 쓴 몇몇 글 (특히 노무현을 옹호하는 글)에는 여지없이 “빨갱이” 또는 “북조선에서 사주받았냐”라는 댓글이 붙는다. 극우들의 50년 전통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21세기 인터넷 시대에는 진보 양치기들의 네티즌들에게 “파시스트” 딱지를 붙인다. 이쪽 저쪽의 딱지로 인해 나는 “빨갱이”가 되기도 하고, “파시스트”가 되기고 한다. 웃기지 않은가.

도대체 누가 진중권의 입을 막았는가. 도대체 어떤 네티즌이 영화 주류들의 입을 막았단 말인가. 자기 하고 싶은 얘기들 다 하지 않았나. 이제 그들의 말과 글에 대해 네티즌도 한마디씩 하면 안되나? 그들의 의견이 무슨 “성역”이라도 된단 말인가.

지금 상황은 이런 것이다. 심형래라는 아이가 “SF 괴수 영화 만들기”라는 과목 시험에서 맨날 20~30점을 받아오다가 6년의 노력 끝에 40점 짜리 결과를 내 논 것이다. 이송희일이나 진중권이나 영화 평론가들은 “디 워”는 낙제이기 때문에 비평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라는 것이고, 네티즌들은 “10점”이 어디냐, 정말 열심히 했구나 격려해 주는 것이다. 왜? 그동안 심형래가 10점을 높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기 때문에. 그리고 심형래가 “우리 자식”이기 때문에.

심형래의 1차 목표는 미루어 짐작컨테 “정말 제대로 된 괴수 한 번 만들어 보자” 이것 아니었을까? 맨날 괴수 인형입고 땀 삘삘 흘리며, 넘어져 가며 찍은 조악한 공룡이나 괴수가 아니고, 정말 헐리우드 영화같은 “괴수” 같은 “괴수” 그런 것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소박한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심형래는 그 꿈을 이루었다.

정말 우리나라 영화계 주류들이 제대로 된 사람들이라면 심형래의 성취를 올바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심형래가 제작과 CG기술에 대해 이룬 성과를 시나리오 잘 쓰는 작가와 연출력이 좋은 감독과 결합시켜 한층 발전된 SF영화를 내 놓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봉준호나 박찬욱이 감독하고 심형래가 제작하면 안되는 건가? 심형래의 영화가 40점 짜리 밖에 안되기 때문에 비평조차 할 가치가 없다며 매장시킬 필요가 있는 것인가?

이 영화 이미 400만이 보았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볼 지 모른다. 당신들의 논리대로라면 비평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 영화를 본 몇 백만의 관객들은 도대체 뭐가 될까. 왜 영화계 어렵다고 찌질대면서 정작 영화를 봐 주는 네티즌과 관객들을 “적”으로 만드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스크린 쿼터만 지켜지면 된다는 건지.

하나 더. 논쟁을 할 때 논리 못지 않게 중요한 건 논쟁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진중권은 40점 짜리 쓰레기 영화를 쓰레기라 얘기하는 것에 아무 문제 없다며 쓰레기 영화 한 편에 “사회가 미쳤다”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는다. 정말 좋은 논객이 되려면 논리도 정연해야 하지만 그 표현도 절제되고 정중해야 한다. 진중권이나 이송희일 같은 태도로 논쟁에 임하면 결국은 논점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왜? 우리들은 기계가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빨갱이” 딱지로 50년간 시달렸다. 이제 대한민국 네티즌들은 진보 양치기로부터 “파시스트” 딱지를 부여받게 되었다. 딱지 붙이기 편리하지만 참으로 위험한 것이다. 왜 네티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진보 양치기들은 스스로 되돌아보기 바란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했고,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다. 세상이 진보들의 논리로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그들도 알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들의 “겸손”한 주장을 보고 싶다.

위키피디아의 성공, 한 명의 진중권보다 4백만의 관객이 낫다

위키피디아의 성공, 한 명의 진중권보다 4백만의 관객이 낫다

2001년 짐 웨일스가 위키피디아라는 온라인 백과사전을 시작했을 때 아무도 그 성공을 예측하지 못했다. 일반 네티즌들이 백과사전을 쓰다니, 게다가 아무런 통제도 없고 편집자도 없이. 이건 거의 21세기형 돈키호테 프로젝트라 여겨졌다. 그런데 돈키호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비아냥거리던 지식인들조차 그제서야 “집단 지성” 운운하면서 위키피디아 현상을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몇몇은 위키피디아에는 쓰레기 정보만 가득하다면서 여전히 찌질댔다.

작년 네이처에서 위키피디아와 기존의 최강 백과사전이었던 브리태니커의 정확성을 비교했는데, 결과는 막상막하였다. 4000여명의 박사들이 저술한 브리태니커와 이름 모를 네티즌들이 아무 보수도 없이 “자기가 그냥 하고 싶어서” 만든 위키피디아가 거의 동등한 질의 정보를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게다가 위키피디아는 브리태니커보다 15배쯤 많은 양의 정보를 가지고 있고, 지금도 끊임없이 추가되고 갱신되고 있다. 브리태니커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면 적어도 2년이 걸리는데, 위키피디아의 잘못된 정보는 거의 실시간으로 수정된다.

유명한 미학자이자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백분토론에서 심형래의 영화의 “형편없음”을 다시 강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곡론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까지 들이대면서 “디 워”의 허술함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진중권이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더라도 관객들도 알만큼 안다. 심형래의 영화가 훌륭한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 중고등학생 정도만 되도 다 안다.

관객들은 7000원의 입장료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영화를 “쓰레기” 취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객들은 심형래가 지난 20여년간 보여준 열정을 이해하고 성취를 평가하기 때문에 설령 영화 구조가 허술하더라도 눈감아줄만큼은 관대하다. 개봉된 지 2주만에 400백만명이 찾았고 계속 흥행을 한다는 사실은 “디 워”가 관객들에게 7000원 이상의 뭔가를 주고 있는 것 아닌가.

누구든 영화에 대해 좋고 나쁨을 얘기할 수 있다. 영화 평론가든, 관객이든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서 영화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관객들과 네티즌들이 화가 난 것은 영화의 주류 집단 (충무로와 몇몇 감독들 그리고 평론가들) 의 태도 때문이다. 겸손하지 못하고 오만하며 관객들의 가르치려 할 뿐만 아니라 심형래의 영화에 대한 이중적 태도 (그들은 심형래를 같은 영화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등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스토리의 구조는 다소 허술하지만 심형래 감독의 초기작에 비한다면 현저한 발전을 이루었다”라는 것과 “300억짜리 루즈를 바르다고 예뻐지나”라고 하는 것은 천양지차다. “디 워”에 대해 심형래가 홍보에 들어갔을 때 언론이 떠들었던 것은 심형래의 “학력 위조” 주장이었다. 심형래가 20여년간 이룬 성취는 그냥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순간이었다.

사실 심형래의 영화보다 더 허접한 영화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계는 심형래의 성공을 반겨야 하는 것 아닌가? 올해 한국 영화가 죽을 쓰고 있다니 울상지우면서 왜 심형래의 영화를 옹호하고 열광하는 관객들을 “적”으로 돌리는가? 스크린 쿼터만 사수하면 한국 영화가 지켜지나? 홍상수, 이창동의 영화가 필요하다면 심형래의 영화도 필요한 것이다.

위키피디아의 성공은 과거 지식인들이 누렸던 권위를 추락시켰다. 네티즌들의 집단 지성은 4000여명의 박사보다도 훨씬 창조적이고 방대한 지식을 생산해냈다. 세상이 변했고,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우리나라의 진중권들은 이 점을 알아야 한다. 이제 네티즌들은 예전의 수동적으로 지식을 받아들이고 소비하는 계층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더욱 생산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건 지식인들이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는 진중권들은 결국은 도태될 수 밖에 없다.

한국 영화계에 필요한 것은 한 명의 진중권이 아니라 400백만명의 관객이다. 관객들에게 감사하라 그리고 관객들을 믿어라. 결국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은 무모해 보이는, 바보같이 보이는 돈키호테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