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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집회

미필적 고의를 넘어

미필적 고의를 넘어

“이 집회는 100명 규모이고 실제 집회 시간도 신고된 것보다 짧은 4~5시간 정도로 예상된다. 예방 조치를 적절히 취한다면 감염병 확산 우려가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예상된다고 보이지 않는다.”

<박형순, 815 광화문 집회 허가 이유>

이 판결은 다음과 같은 가정에서 출발한다. 집회 규모가 100명일 것이고, 집회 시간도 짧을 것이며, 주최 측이 적절한 예방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가정. 이런 모든 가정이 다 만족했을 경우에 확산 우려가 예상되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무구한(?) 판결.

만약 집회 규모가 훨씬 커지고, 집회 시간도 예상보다 길어지고, 주최 측이 예방 조치를 적절히 취하지 않는다면 감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는 생각은 못 한 것인가, 안 한 것인가. 오히려 집회를 신청한 사람들의 면면을 봤을 때,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생각은 안 한 것인가, 못 한 것인가.

초등 교육을 받은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할 수 있는 생각을, 판결로 밥 먹고 사는 판사가 이렇게 판결을 했다는 것은 미필적 고의를 넘어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와 온 국민이 7개월 넘게 고생하면서 지켜온 방역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위험을 분명히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안일한 또는 순진한 또는 의도적인 판결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5월 해고노동자들이 신청한 집회는 감염병 확산 위험을 이유로 불허한 재판부가 말이다.

코로나 감염병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는데, 같은 사안에 대해 다른 판결을 내렸다면 분명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짐작하는 이유.

안중근 의사가 되고 싶었던 의사 선생님

안중근 의사가 되고 싶었던 의사 선생님

“사회주의 주사파 의료법을 깨부수자”며 모인 의사 선생님들의 집회에서 한 의사 선생님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정말 훈훈한 미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의료법 개정안에 대한 비난 열기가 높아지는 가운데 서울시의사회 소속 한 의사가 할복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날 집회에서 경과보고를 하기로 돼 있던 좌훈정 서울시의사회 홍보이사는 연단에 오르지도 않은 채 즉석에서 테이블과 수술칼을 준비해 “혈서를 쓰겠다”며 할복했다.
좌훈정 의사 선생님은 할복한 후 손바닥에 피를 묻혀 흰 천에 도장을 찍었다. 혹시 안중근 의사를 본받기 위해 한 시도였을까. 안중근 의사의 그 의사는 좌훈정 의사의 그 의사가 아닐텐데 말이다. 진정 안중근 의사를 따라 할 요량이었으면, 어설픈 할복보다는 왼손 약지 한마디를 끊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가 도대체 흰 천에 쓰려고 했던 혈서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 의사들이 국민의 건강권을 볼모로 밥그릇 지키려 하는 것, 지난 의약분업 때 신물이 나도록 보아왔다. 진정 국민의 건강을 생각하는 의사들이라면 지금 현대의학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어떻게 하면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지 연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안중근 의사와 병 고치는 의사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분야를 막론하고 우리나라의 기득권층이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는 것. 이 집회에 참석한 의사 선생님들이 그렇고, IMF를 불러오고도 참여정부가 경제 파탄의 책임을 지라는 한나라당이 그렇고, 친일과 독재 부역으로 점철된 조중동의 적반하장이 그렇고, 전시 작전 통제권 환수를 반대하는 전직 장성들이 그렇고… 한국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따지는 것만큼 공허한 일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