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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피해자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이 말은 참 편리하고 비겁하며 비루한 말이다. 가해자로 살면서 단 한 번도 떳떳하게 사과하지 않는 자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대개 후안무치한 기회주의자일 확률이 높다.

그는 국회의원이 엘시티 사건을 청와대 민석수석실에 보고하냐고 물어도 “기억이 없다”며 실실 비웃었다. 8년 전 어느 장례식장에서 동료 여검사를 성추행하고도 “술에 취해 기억이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과드린다”며 여전히 더러운 입을 놀린다.

당연히 그런 일이 있었기에 피해자는 아직도 그때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과한다고? 이게 사람의 말인가? 그가 말한 사과는 사과가 아님을 모두가 안다. 도대체 이 자들이 가진 권력이 어떤 것이기에 이리도 비열할 수 있단 말인가.

피해자들은 단 하루도 잊을 수가 없는데, 그들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인간들을 구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피해자가 되어 봐야 그 고통과 아픔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것도 너무 큰 기대일 수 있다. 애초에 이런 인간들은 구제불능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교회에서 간증을 하면서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예수도 못할 일을 하다니,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표현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가

‘표현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는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 표현의 자유는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나라치고 제대로된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없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가해자들이 여전히 강자이거나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 그들이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는 어느 정도 제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면 안 된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허락된 독일이지만, 그것은 금기이다.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면 안 된다. 나치가 유대인에 대해 가해자였듯, 이스라엘의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에 대해 가해자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인들도 흑인들에 대해 제한 없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 안 된다. 그들은 아직도 갚아야할 빚이 적지 않다.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기본 권리라 하더라도,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방의 언론들은 이슬람교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현대 역사를 살펴 보면,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은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 대해 가해자들이였다. (이러한 이유로 알카이다의 테러가 정당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피해자의 입장을 배려해야 한다.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먼저 주장하기 전에, 그 표현으로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결코 자기 검열이 아닌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이다.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역사적) 피해자들과 사회의 약자들이다. 이들은 지배계급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도 된다. 그들의 표현들이 해학이 넘치고 정곡을 찌를 때, 그것은 조롱도 모욕도 아닌 풍자가 된다. 따라서 풍자는 피해자들과 약자들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덧.

데이비드 호킨스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표현의 자유는 생각의 자유와 관점 표현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지, 감정과 유치한 행동의 과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현대인의 의식 지도, 판미동, p.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