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들은 쉬이 늙고

소년들은 쉬이 늙고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학문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년들은 쉬이 늙었다. 돌아보니 30년이 흘렀다. 30년 전에는 모두들 까까머리 소년들이었는데 이제는 삶의 무게 앞에 힘겨워하는 장년의 아재들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만 진학하면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세상은 대체로 비루하였고, 희망 따위는 너무 아득하여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하루하루를 잘 버티고 견디어 30년을 살아냈으니, 그 소년들이 어찌 대견하다 하지 않겠는가. 소년들이여, 수고 많았다. 그대들의 고단함을 위로하며 박수를 보낸다.

이제 소년들은 그들이 비판했던 기성세대가 되었고, 꼰대가 되었다. 남은 삶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꾸역꾸역 건강하게 살길 바란다. 그러다 보면 삶의 무게가 저절로 사라지는 날이 올지 누가 알겠는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세상에 태어난 이유

간밤에 내린 비로 나무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상쾌하고 촉촉한 6월의 아침, 딸아이가 생일 축하 카드를 보냈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을 지배하는 궁극의 원리가 사랑임을 깨닫고 이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은 아닌지… 딸아이가 보내 준 카드가 문득 그것을 일깨운다.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딸아!

기계가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기계가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바둑이라는 게임에서 인간이 공식적으로 기계를 이길 수 없음이 증명되자, 사람들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데카르트는 이미 380년 전에 그의 책 <방법서설(Discourse on the Method)>에서 기계가 사람처럼 이성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즉 원숭이나 이성이 없는 다른 동물들과 똑같은 기관과 모양을 가진 기계가 있다면, 이 기계가 저 동물과 동일한 본성을 갖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어떠한 수단도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 신체와 비슷하고, 우리 행동을 가능한 한 흉내낼 수 있는 기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인간일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아주 확실한 두 가지 수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그 기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우리 생각을 알게 할 때처럼, 말을 사용하거나 다른 기호를 조립하여 사용하는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기계가 말을 할 수 있도록, 나아가 그 기관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물질적 작용에 따라 어떤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수 있다. 가령 어디를 만지면 무슨 일이 일이냐고 묻는다든가, 혹은 다른 곳을 만지면 아픈 소리를 지른다든가 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그 기계는 자기 앞에서 말해지는 모든 의미에 대해 대답할 정도로 말들을 다양하게 정돈할 수 없지만,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도 그런 것을 할 수 있다. 둘째는, 그 기계가 우리 못지 않게 혹은 종종 더 잘 많은 일을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무언가 다른 일에 있어서는 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며, 이로부터 그 기계는 인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기관의 배치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것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성은 모든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구인 반면에, 이 기계가 개별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에 필요한 개별적인 배치가 기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우리 이성이 우리에게 행동하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삶의 모든 상황에서 행동하기에 충분한 다양한 배치가 한 기계 속에 있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I worked especially hard to show that if any such machines had the organs and outward shape of a monkey or of some other animal that doesn’t have reason, we couldn’t tell that they didn’t possess entirely the same nature as these animals; whereas if any such machines bore a resemblance to our bodies and imitated as many of our actions as was practically possible, we would still have two very sure signs that they were nevertheless not real men. (1) The first is that they could never use words or other constructed signs, as we do to declare our thoughts to others. We can easily conceive of a machine so constructed that it utters words, and even utters words that correspond to bodily actions that will cause a change in its organs (touch it in one spot and it asks ‘What do you mean?’, touch it in another and it cries out ‘That hurts!’, and so on); but not that such a machine should produce different sequences of words so as to give an appropriately meaningful answer to whatever is said in its presence—which is something that the dullest of men can do. (2) Secondly, even though such machines might do some things as well as we do them, or perhaps even better, they would be bound to fail in others; and that would show us that they weren’t acting through understanding but only from the disposition of their organs. For whereas reason is a universal instrument that can be used in all kinds of situations, these organs need some particular disposition for each particular action; hence it is practically impossible for a machine to have enough different organs to make it act in all the contingencies of life in the way our reason makes us act.

요즘 기계들은 사람처럼 말을 하고 사람의 말을 알아 듣는(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사람처럼 행동한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지, 그것들이 의미를 이해하고 하는 것은 아니다.

알파고가 이세돌이나 커제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램되었기 때문이다. 알파고가 바둑이라는 놀이가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인간의 특정 부분을 흉내낼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는 있지만, 인간과 같은 기계를 만들 수는 없다. 현재까지의 결론은 진정한 의미의 튜링 기계(인공지능)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시민일 뿐입니다

한 사람의 시민일 뿐입니다

I am not a client, a customer, nor a service user. I am not a shirker, a scrounger, a beggar nor a thief.

I am not a national insurance number, nor a blip on a screen. I paid my dues, never a penny short, and was proud to do so.

I don’t tug the forelock but look my neighbour in the eye. I don’t accept or seek charity.

My name is Daniel Blake, I am a man, not a dog. As such I demand my rights. I demand you treat me with respect.

I, Daniel Blake, am a citizen, nothing more, nothing less. Thank you.

<“I, Daniel Blake”, 2016>

개가 아닌 사람으로, 그것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존중받고 살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시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사람 사는 세상”이다. 소박하지만 아직은 원대한 꿈.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니엘 블레이크일 뿐이다.

노무현입니다

노무현입니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 노무현입니다.”하고 인사하며 악수하는 그의 뒷모습이 오래오래 가슴에 남는다. 그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었고,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여한은 없지만,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해 가슴 아프다. 영화를 보면서 그는 하늘이 주신 선물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늦게나마 많은 이들이 그를 다시 찾아 주어 마음이 놓인다.

보고 싶은 사람, 그리운 사람, 자랑스런 사람, 노무현. 하늘나라에서는 평안하시길…

노무현, 당신의 흔적

노무현, 당신의 흔적

노무현은 슬픔이다. 그것도 아주 깊은, 너무나 깊어 끝이 보이지 않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 아련해진 그런 슬픔이다. 그것은 가슴먹먹함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아니 잊혀질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저린 가슴 속의 비통이다. 아픔이고, 눈물이다. 그의 따뜻한 미소를 생각하면 멈출 수 없는 눈물이 흐르다 고요한 침묵만 남는다.

8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문재인을 친구로 두었기에 대통령감이 된다고 자랑스럽게 외쳤던 당신이 떠나고, 그 문재인은 대통령이 되었다. 당신이 마지막 글에서 말한 운명, 그 운명이 문재인을 꼼짝 못하게 했다. 문재인은 노무현의 부활이다. 그가 노무현의 가치를 완성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무현은 그리움이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아니 채울 수 없는 보고싶음이다. 당신의 정의로움, 용기, 수줍음, 재치, 순발력, 포효, 그리고 발가락 양말. 그 모든 것이 그립고 보고 싶지만, 당신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그리움이 사무치면 꽃이 핀다고 했던가.

해마다 5월이면 당신의 꽃이 필 것이고, 우리는 당신의 흔적을 찾아 헤맬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견뎌야할 천형인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존경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저 세상에서는 부디 안식하시길 기도합니다.

공감, 위로, 감동 그리고 대통령

공감, 위로, 감동 그리고 대통령

“[…] 철 없었을 때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와 엄마는 지금도 참 행복하게 살아 계셨을 텐데. 하지만 한번도 당신을 보지 못한 이제 당신보다 더 큰 아이가 되고나서 비로소 당신을 이렇게 부를 수 있게 됐습니다. 아버지! 당신이 제게 사랑이었음을, 당신을 비롯한 37년 전의 모든 아버지들이 우리가 행복하게 걸어갈 내일의 밝은 길을 열어주셨음을. 사랑합니다, 아버지.”

딸이 태어난 날, 아버지는 딸을 보기 위해 병원을 가다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딸은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37년이 지난 후, 그날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 먹은 딸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아버지를 부르며 흐느낀다. 사랑한다고. 편지를 읽던 딸도 울고, 수화통역사도 울고, 기념식장에 참석한 이들도 울고, TV를 보던 시청자들도 울고, 대통령도 울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용히 다가가 그 흐느끼던 딸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공감이 위로가 되고, 위로가 감동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는 대통령이 아니라 다시 돌아온 아버지였다. 깊은 슬픔이 깊은 위안으로 승화되었다. 편지를 읽은 그 딸뿐만 아니라, 그 광경을 지켜본 모든 이들이 위로와 감동을 받았다.

문재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참여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이던 성경륭은 그를 “침착한 노무현”이라고 했지만, 오늘 그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노무현”이었다.

15년 전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이 나라는 다시 한 번 로또를 맞았다. 노무현의 소중함을 몰랐던 국민들이 이제는 알 것이다. 노무현의 뒤를 잇는 문재인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를.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라니, 하늘이 이 나라를 버리지는 않은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