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친구

겨울비, 친구

모처럼 겨울비가 촉촉히 내렸다. 매캐했던 미세먼지가 가라앉고 공기는 상쾌했다. 설 연휴, 고향에 내려온 친구들을 충북 영동에서 만났다. 생전 처음 와본 낯선 곳이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다.

우리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으니 벌써 35년이 된 사이다. 그 긴 세월 동안 우리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꿋꿋이 버텨왔다. 언제나 한결 같은, 보석 같은 친구들이다. 이런 인연을 계속 이어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영동의 맛집은 몹시 붐볐다. 이런 시골에서도 맛집으로 방송을 타게 되면 어디선가 사람들이 몰려온다. 한참을 기다려 먹은 탕수육과 짜장면은 소문 만큼 엄청난 것은 아니었다. 그 맛집을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새로 생긴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들은 못다 한 얘기를 나눴다. 다들 이제 직장에서 자리를 잡아 어엿한 중산층이 되어 있었다. 한 녀석은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고 기러기 생활을 시작했고, 다른 녀석은 어린 아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다.

삶을 누구에게나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고, 화장실에 가고…… 누구나 그런 삶을 산다. 차이는 그런 일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이다. 다들 지혜로운 녀석들이라 잘들 헤쳐나가리라 믿는다.

창 밖의 겨울비는 추적추적 소리 없이 내리고, 우리들은 또다른 만남을 기약했다.

북한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북한산 둘레길을 걷고 있다. 제주 올레에서 시작한 둘레길 열풍으로 우리나라 지자체들은 여기저기 길을 만들었다.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에 좋은 길들을 호젓이 걸을 수 있어서 좋다. 걷는 것 만큼 좋은 것은 없다. 특히 혼자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면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걷는 것은 명상이 될 수 있다.

북한산 둘레길 수첩(패스포트)를 구입하여 하나의 코스를 끝낼 때마다 도장을 받으면 더욱 즐겁다. 4코스까지 걸었는데 어렵지 않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는다. 산 정상에 오르는 것과는 또다른 재미를 느끼고 있다. 서울에 갈 때마다 걷고 싶은데 언제 완주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고의 욕망

최고의 욕망

우리나라 부모들(특히 엄마들)이 가진 최고의 욕망은 자식들의 출세이고, 그것의 첫 걸음은 자식들의 명문대 입학이다. 특권과 반칙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려면 “갑”이 되어야 하니 부모들의 욕망만을 탓할 수는 없겠으나, 그 욕망의 크기가 도를 넘었다. 그 욕망은 아이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었고, 학교는 폐허가 되었다. 아이들을 어떤 대학에 보내느냐가 교육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아이들은 숨을 쉴 수 없다.

드라마 <SKY 캐슬>이 인기를 끈 이유는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 하기 때문이다. 자식들의 명문대 입학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일상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이 드라마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바보라도 세상에는 명문대 입학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관념일 뿐, 현실은 오직 무한경쟁이요, 정글이다. 친구들과의 우정은 아름다우나 그들은 결국 경쟁자이자 적일 뿐이다. 욕망은 그렇게 세상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이런 세상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 욕망과 그 욕망의 종착역이라는 것이 모두 허상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부모들은 집단최면에 걸려 있는데, 그 최면에서 깨어나면 된다. 간단하나 쉽지는 않다. 그 욕망의 약속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들을 믿고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다. 부모들의 욕망을 아이들에게 투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만의 인생이 있다. 그 인생의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면 된다. 그것이 부모가 해야할 유일한 일이다.

드라마 <SKY 캐슬>이 끝났다. 그 드라마 속 부모들은 욕망을 내려놓았고 아이들은 지옥에서 벗어났다. 너무나 착한 결말에 많은 이들이 실망했다. 드라마 밖의 현실은 여전히 입시 지옥이고 부모들의 욕망은 나날이 커져가기 때문이다.

더 많이 도와줄게

더 많이 도와줄게

좋은 남편들이 아내가 힘들 때 하는 말.

“내가 더 많이 도와줄게.”

남편들의 선의는 알겠는데, 이 말의 속뜻을 알게 되면 남편은 역시 남의 편이라는 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일을 도와준다는 것은 “그 일이 본래 당신 일이지만 마음씨 착한 내가 당신이 힘들지 않도록 협조하겠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일은 본래 당신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내의 집안 일을 돕는 남편은 언제나 착하고 좋은 남자들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대개의 남편들은 집안 일을 돕는다고 얘기하지, 그 집안 일이 자기 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아내가 전업주부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맞벌이 부부인 경우에도 남편들은 집안 일을 돕는다고 얘기한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이제 곧 설 명절이다. 명절증후군을 앓는 이 땅의 모든 아내와 며느리들을 치유하려면 남편들은 집안 일을 도와줄 것이 아니라 그 일이 바로 자신의 일임을, 자기가 해야할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생활은 바로 남편들의 정확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번 설에는 진실로 철든 남편들이 되시길 그리하여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적폐의 역습?!

적폐의 역습?!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구속되었다. 드루킹이라는 정치브로커와 함께 인터넷 여론 조작에 가담했다는 혐의가 모두 인정되었다. 이 사건의 1심 선고는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 한다.

특검은 처음부터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드루킹 일당들의 진술은 엇갈렸다. 김경수의 구속영장은 기각되었다. 영장판사는 다툼에 여지가 있고 도주 우려가 없는 현직 도지사 신분임을 감안해 영장을 기각했는데, 1심 판사는 드루킹의 진술을 100% 받아들여 김경수에게 실형을 선고했으며 가차없이 구속했다.

김경수가 받고 있는 컴퓨터 등 장애 업무 방해죄 혐의로는 최초의 실형이고, 형량도 최고 양형 기준인 1년 6개월보다 긴 2년이며, 현직 도지사의 법정 구속도 처음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이례적인데, 이런 이례적인 것이 연속으로 겹쳐 일어났다.

1심 판사는 양승태의 비서실장 출신이고 이번 사법농단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피의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김경수에 대한 선고 기일을 양승태의 구속영장 실질 심사 이후로 갑자기 미뤘다. 양승태는 구속되었고, 양승태 비서 출신의 판사는 김경수를 구속했다.

사법농단과 연루된 자를 이런 중요한 정치 사건의 재판관으로 배정했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적폐들은 꼼꼼하게 언제든지 역습할 수 있다. 방심은 금물이고 조그마한 실수도 치명적이다.

문재인의 위로

문재인의 위로

김복동 할머니 장례식장에 문재인 대통령이 조문을 왔다. 그동안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가셨을 때 대통령이 조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무슨 일을 하더라도 문재인은 늘 진심으로 한다. 그는 정치인이라는 껍데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치인이다.

대통령의 조문은 김복동 할머니와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큰 위안이 될 것이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들은 부담을 느낄 것이다. 양심이 있다면 말이지.

문재인 대통령의 진심어린 조문에 국민들은 다시 한 번 큰 위로를 얻었다.

김복동 할머니

김복동 할머니

어느 가을, 이름 없는 숲 속에서 한 마리 나비를 만나거든 당신이 오신 줄 알겠습니다. 죽거들랑 나비처럼 날고 싶다던 당신이 그렇게 오신 줄 알겠습니다.

구십 평생 모진 세월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오. 고통도 미움도 원한도 모두 훌훌 던져버리고 오직 사랑과 평화가 흐르는 그곳으로 훨훨 날아 가십시오.

할머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사랑합니다. 편히 쉬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주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주

우리는 20대 초반의 풋풋한 청년들로 처음 만났지. 어느덧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오십이 넘었네. 모두들 아저씨, 아줌마들이 되어 직장 문제에, 자식 교육에, 남들과도 같은 걱정을 나누며 하루를 보냈어. 1년에 한두 차례씩이라도 안부를 전하고 밥 한 끼라도 같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다들 조용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사는 모습들이 보기 좋네, 그려.

돈, 명예, 출세가 다 부질없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네. 누군가 말했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주는 시골 이장 친구 사주라고. 아무 권력도 책임도 없지만, 이장 친구를 두어서 그럭저럭 좀 재미를 볼 수 있는 사주가 제일 좋다는 우스개 소리를 했지. 그런데 그게 맞는 말이야.

이제 헤어지면 여름에나 볼 수 있겠구먼. 그때까지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후회 없이 꾸역꾸역 살아보자구. 잘 가게, 친구들.

박항서가 고마운 이유

박항서가 고마운 이유

한국은 베트남에 큰 빚을 졌다. 아니 큰 죄를 졌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의 만행을 기억하는 베트남 국민들은 한국을 증오했다. 수만 명의 양민을 학살한 미제국주의 용병을 어찌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세운 한국군 증오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이규봉, 베트남 마을에 있는 한국군 ‘증오비’, 오마이뉴스>

그렇다. 한국군이 지은 죄는 만대가 지나도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크고 깊었다.

전쟁이 끝나고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7년 10월, 박항서는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박항서는 베트남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한국은 베트남의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열렬히 응원했고, 베트남도 한국을 고마워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지은 용서받지 못할 죄와 베트남 국민들 가슴 속에 남아 있던 증오를 박항서 감독이 홀로 씻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에서 부임한 축구 감독이 베트남 국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이건 거의 기적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야.

베트남 국민들에게는 늘 미안하고 박항서 감독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베트남의 번영과 박항서 감독의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