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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순간

완벽한 봄날 아침

완벽한 봄날 아침

밤새 비가 내리다가 그쳤습니다. 바람은 동쪽에서 불어왔고, 마치 렘브란트가 그린 풍경처럼 먹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아파트 울타리에 붉은 장미가 가득 피었습니다. 비가 개인 5월 어느 봄날 아침 풍경입니다.

앞산의 뻐꾸기가 아침부터 청아하게 울었고, 다리 밑의 비둘기 가족도 구구거리며 인사를 했습니다. 개울에는 오리 몇 마리가 퍼덕거리며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밤새 내린 비로 개울 물이 제법 불었습니다. 그 개울 옆으로 산책길이 잘 닦여 있는데, 새벽마다 그 길을 걸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개망초가 지천으로 피었습니다. 그 사이사이로 토끼풀과 갈퀴나물이 보입니다. 앙증맞은 애기똥풀이 귀엽습니다.

여름의 코스모스라고 불리는 금계국이 노란 꽃잎을 한들거리고, 데이지의 청초한 흰꽃이 봄날 아침을 반겨 주었습니다. 누군가 심어 놓은 남보라색의 붓꽃이 우아함을 자랑했고, 찔레꽃 향기가 개울 따라 멀리 퍼져 나갔습니다.

모든 순간이 기적처럼 다가왔습니다. 꽃들과 풀들과 나무들과 새들이 모두 제 자리에 있었고, 그 사이를 걷는 순간 행복한 느낌이 밀물처럼 몰려왔습니다. 온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먹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푸른 하늘이 보였습니다. 곧 날이 갤 모양입니다. 바람이 방향을 바꿔 동쪽으로 불었고, 구름은 바람을 따라 흩어졌습니다. 봄날은 갑니다. 무심히도. 하지만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온전히 느낀 봄날 아침이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감히 얘기하건대, 삶은 기적입니다. 모든 순간이.

운명, 순간

운명, 순간

1990년대 왕가위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었다. 우울하고 쓸쓸하지만 때로는 나른하고 몽환적이기도 한 그의 영화는 내 젊은 날 초상의 한 조각이었다.

비루하면서 부조리한 현실과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그리고 방황, 그 안에서 우연히 찾아오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내 삶과 그의 영화는 기묘하게 뒤섞이면서 엇갈렸다. 그의 영화를 외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의 저주받은 걸작이라 불리는 아비정전(阿飛正傳)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리 1분 동안 함께 했어.
우리 둘만의 소중했던 1분을.
이 1분은 지울 수 없어.
이미 과거가 됐으니.

그는 이 1분을 잊겠지만, 난 그를 잊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는 1분이 순간일 수 있고, 누구에게는 영원일 수 있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아비와 소여진은 그 1분을 함께 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삶의 모든 순간은 운명이다. 그리고 순간순간 살아지는 것이다.

꽃비

꽃비

바람이 부니 꽃비가 내린다.

하얀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아름다운 것들은 머물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게 왔다가 그렇게 쉬이 떠나는 것.

과거도 미래도 없는 순간일 뿐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기억되지 않는 슬픔.

순간으로 존재하면 완전한 것이다.

 

4월 19일

바람이 불고, 꽃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