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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절망

은퇴한 남자들이 절망에 빠지는 이유

은퇴한 남자들이 절망에 빠지는 이유

나이가 들수록, 직업과 소명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노인, 특히 남자들이 퇴직 이후 절망에 빠지는데, 이는 주요 수입원만이 아니라 (그중 많은 이가 아르바이트나 최저임금을 받는 다른 직업을 찾는다),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밥벌이를 위한 직업이 있었지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소명, 즉 사람이 죽을 때까지 추구할 수 있는 소명이 없었다.

<파커 파머,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글항아리, 2018, p. 122>

절망을 대하는 자세

절망을 대하는 자세

살다 보면, 절망이 엄습할 때가 있다. 거듭된 실패와 시련으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그것을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수천년 전부터 그 절망적 상황은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성으로 그 수천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논리적인 설명을 부여하기는 불가능하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라고 하늘을 원망하거나 삿대질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누구나 한 번쯤은 삶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어쩔 것인가.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런 절망적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은 이번 생에서 꼭 해야 할 숙제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절망적 상황은 또다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 상황을 극복하게 되면 사람은 한층 깊어지게 마련이다. 잘 알려진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을 보면 왜 절망이 축복인지 알게 된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지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 데 두게 되나니,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을 삼으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덕을 베푸는 것을 헌 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적은 이익으로 부자가 되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당하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보왕삼매론>
시련과 실패는 사람을 깊어지게 한다. 절망을 이겨내면 더욱 성숙해지기 마련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

감당할 수 없는 절망

문수 스님이 4대강 죽이기에 반대하며 소신공양으로 열반에 드신 이후 그리고 그 소신공양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눈으로 확인한 이후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빠졌다. 마치 작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맘먹는 충격에 빠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글도 쓸 수 없었다.

그 소신공양이란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기원이자 저항 행위일 것인데, 문수 스님의 유서는 너무나 소박하고 애처로워 보여 슬펐다. 자기 몸을 나무토막처럼 불태우며 스러져 갔어도, 세상은 아무일 없다는 듯 무심했고, 굴삭기는 여전히 강바닥을 긁어내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은 나를 세상과 분리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를 침묵하게 했다.

나도 가끔은 수구꼴통이고 싶다

나도 가끔은 수구꼴통이고 싶다

3주간 블로그를 팽개쳐 놓았다.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잡초가 우거지고 점점 황폐해지듯이, 블로그도 마찬가지였다. 주인장조차 잘 들르지 않는 블로그엔 스팸 댓글만이 쌓여 있었다. 오랜만에 청소를 했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글로 쓰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단순하게 그들이 짖어대는 대로 믿어주고 싶기도 했다.

천안함은 북한의 어뢰 공격이라는 보도를 믿어주고 싶었다. 아무 증거가 없어도 상관없이. 아주 단순하게 쓰레기 언론들이 보도하는 대로 그냥 생각없이 믿어주고 싶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흘리는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 아니고, 진심에서 나오는 눈물임을 믿어주고 싶었다.

4대강 사업은 홍수를 방지하고 자연을 살리는 사업임을 믿어주고 싶었다. 아무런 증거가 없어도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한명숙 전총리는 총리공관에서 곽사장으로부터 5만불의 현찰을 받았다는 검찰의 주장을 믿고 싶었다. 법원의 무죄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수구꼴통들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김대중, 노무현은 빨갱이 좌파이고, 그들이 집권했던 10년이 “잃어버린 10년”임을 믿어주고 싶었다.

이 땅에서 수구꼴통으로 사는 것은 참 단순하고 편안해 보인다. 아무 걱정없이, 고민없이, 의심없이 그냥 정부나 언론이 얘기하는대로 그냥 믿으면 된다. 반대하는 자들은 그냥 “좌빨”로 몰아붙이면 된다. 가끔은 나도 그렇게 단순하게, 편안하게 살고 싶다.

지방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 나라는 별 희망이 없어 보인다.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거짓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오늘 하루 별일 없었으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