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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에이게 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들

가슴 에이게 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들

다음 아고라에 올라있는 안찬옥 님의 글 “노무현에 대한 단상”을 읽다가 가슴을 에이게 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들이 눈에 들어왔다.

2000년 부산에서 낙선한 뒤, 한 술자리에서 지인들이 노무현한테 “참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자 노무현은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고 한다.

“똑똑하다 하시니 하는 말입니다만, 한국은 나 같은 이런 사람이 대학을 가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이 말을 들으니 2004년 탄핵 직전 노무현 대통령이 한 말이 생각난다.

“(우리나라는) 학벌사회, 연고사회인데 일류학교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잘 짜인 사회 속에 제가 돛단배처럼 떠있지 않나”

대학을 못나온 사람이 일류학교를 나온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고 대통령까지 하니 일류학교를 나온 자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겠지. 그 주류들의 열등감이 결국 노무현을 죽였다.

임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노무현은 어린 아이처럼 행복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다.

고시에 낙방했다면 이 나이 먹도록 여기서 즐기며 살았을 것을, 반백년 돌아 이제야 정착한듯 합니다. 인생 중에 지금이 제일 행복합니다.”

노무현은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면서 이미 목숨을 걸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해본다. 제대로 임기를 마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철없는 지지자들은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축하 모임에서 이제 무엇을 할거냐는 노무현의 물음에 “감시! 감시!”라고 외쳤으니 그가 속으로 얼마나 쓸쓸했었을까.

기득권이라는 바다의 돛단배 같은 존재가 가장 훌륭하게 임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정말로 기뻤을 것이고 행복했을 것이다.

지난 봄에 저 더러운 검찰의 칼끝이 그를 향하고 있을 때, 그의 행복은 1년도 되지 않아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현직에서 물러나 자연인이 되었지만, 그는 점점 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명박의 열등감이, 주류들의 시기심이 그를 가만 놔둘 수 없었다. 그때의 심경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려앉으려 하나 온통 바다뿐이고, 앉을 가시나무 한 그루 없습니다.”

조중동과 이명박의 검찰은 그를 그렇게 말려 죽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나라에 노무현 대통령 5년은 기적과도 같은 역사가 될 것이다. 아니 너무도 현실감이 떨어져 단군신화와 같은 신화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나라에는 이명박이나 박근혜나 이회창 같은 자들이 훨씬 잘 어울린다. 노무현은 도무지 이 빌어먹을 나라에 걸맞지 않은 대통령이었다. 다시는 노무현과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 그런 인물을 지도자로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땅이 아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세찬 비가 내리고 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

지난 6월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나는 해외의 어느 모임에서 대한민국 주류의 전형을 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의도한 바도 아니었고, 그런 부류의 인간들과는 단 1분도 같이 있지 못하지만, 그 당시 상황은 나를 그 자의 구역질나는 연설까지 듣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그 자의 말투에는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수십 만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밤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에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던 1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당황했다.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주류가 느끼는 위기와 두려움은 시위 그 자체보다는, 뚜렷한 구심점도 없이 조직되지도 않은 채 수십 만명의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만든 그 어떤 것에서 비롯되었다.

본능적으로 그 자는 “인터넷”을 촛불 시위의 주범으로 지목했고, 즉석 연설을 통해 인터넷의 역기능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외국인들은 그 자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그런 자와 같은 하늘을 이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 했다. 그 자의 입을 통해 졸지에 대한민국은 인터넷 강국에서  인터넷 파렴치국으로 전락해 버렸다.

얼마 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는 OECD 장관 회의에서 “인터넷의 힘은 신뢰가 담보되지 않으면 약이 아닌 독이 될 수 있다”고 게거품을 물었다. 내가 그 천박한 주류에게서 들었던 바로 그 역겨운 말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웃기는 것은 인터넷에서 저속한 언어로 함부로 지껄이고 다니며 신뢰를 훼손하는 다니는 소위 “알바”들은 다 돈있는 주류들이 고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은 그들에게 확실히 “독”이 된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다.

이미 갖은 지랄을 통해 방송을 다 장악해 버린 그들은 이제 인터넷을 통제하기 위해 모든 장치들을 동원할 것이다. 주류 신문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인터넷과 네티즌들을 공격하고, 검찰과 경찰을 시켜 선량한 네티즌들을 잡아들이고 있으며, 법 개정을 통해 네티즌들에게 재갈을 물리려 할 것이다. 인터넷을 통제하지 않고는 그들의 치부를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인터넷은 그런다고 통제되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아무리 해를 가려봐도 가려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방송을 장악해서 “대통령과의 대화” 같은 이벤트를 만들어도 온라인 질문을 서둘러 마감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를 봐도 인터넷은 다른 언론 매체처럼 쉽게 장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10년 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인터넷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터넷은 우리의 유일한 무기이며, 그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에 대한 예의다

문제는 인간에 대한 예의다

심형래 감독의 “디 워(D’ War)”가 연일 화제다. 나는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 자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이 영화가 아주 작품성이 뛰어난 건 아닌 것 같다. 심형래 감독이 그것을 의도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고, 관객들도 작품성을 기대하고 영화를 보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평론가들의 혹평 속에서 (물론 그들의 호평을 기대하지도 않았겠지만), 많은 블로거들과 네티즌들은 한 때 최고 코미디언이었던 영화 감독 심형래에게 열광하고 있다. 아니 열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집념이 일구어낸 결과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이 정도면 돈 주고 봐도 아깝지 않다고.”

그렇다면 왜 많은 블로거들과 네티즌들이 심형래를 옹호할까? 정말 관객들이 영화의 작품성을 평가하는 눈이 형편없기 때문에? 이송희일 감독의 말마따나 애국애족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비상식적인 벌거숭이 꼬마들이기 때문에? (사실 나는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를 본적이 없지만, 영화 감독이 관객들에게 “평론가들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벌거숭이 꼬마”라고 지칭하는 것은 관객 모독이고 상식을 벗어나는 자살 행위이다.)

영화 평가는 평론가들이나 감독의 몫이 아니다. 물론 그들도 나름대로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관객들이 평가를 하는 것이다. 이송희일을 비롯한 감독들과 많은 영화평론가(영화판 주류)들이 범한 실수 중 하나는 관객들을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다. 정말 “디 워”를 보러 간 사람들이 예술적 작품성을 보고자 간 것일까? 관객들은 심형래의 영화에서 칸의 황금종려상을 원한 것이 아니다.

관객을 가르치려는 자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겸손”이라는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다. 이송희일 감독을 비롯한 이들은 심형래를 타자화한다. 같은 영화인의 범주에 놓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물나도록 보아왔던 비주류에 대한 주류 계층의 공격이다. 아직까지도 (대학을 못 나온)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 이 땅의 기득권 주류들, 황우석이 의사였으면 그렇게 매몰차게 매장되었을까. 마찬가지로 심형래도 영화판에서 오래 굴렀지만 영화판의 주류들은 심형래를 같은 영화인으로 보지 않는다. 이송희일 같은 영화 감독의 태도에서 나는 소위 진보 좌파들의 교만을 본다. 자기들만의 주장이 옳고 우월하다는 그들의 독선을 본다.

관객들이 심형래의 영화에 호응하는 이유는 그의 삶의 궤적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디 워”를 만들기 위해 지난 십 수년 동안 쏟은 땀과 눈물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초기작과 “디 워” 사이의 그 간격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심형래의 성취가 호응을 받을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단지 애국 마케팅에 휘둘려 심형래의 영화를 보는 것이라 한다면 그건 우리나라 관객들의 수준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다.

“영화를 영화로만 평가하자”는 영화판 주류들은 아직도 “스크린 쿼터” 사수를 주장한다. 심형래의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만 평가되어야 하고, 자신들의 영화는 “문화 제국주의”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이중성을 관객들이 감내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들의 영화는 정치, 경제, 문화의 논리로 보호되어야 한다면서 심형래의 아리랑 삽입에 대해서는 애국 마케팅이라 비하한다. 이런 상황을 네티즌들이 그냥 지나치기란 정말 쉽지 않다.

영화판 주류들은 심형래라는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조차 지키지 않았다. 영화의 최종 소비자이자 평가자인 관객들을 서슴없이 모독했다. 늘 그들이 마지막에 보이는 카드는 인간에 대한 “비아냥”이다. 과정과 결과로 정정당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는 찌질이들의 마지막 자위 수단은 비아냥과 건방짐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바보 전략’은 바보 아닌 것들을 비난하며, 서로를 바보, 바보 애정스럽게 부르다가 끝내는 정말 바보가 되어 선거함에 투표 용지를 몰아 넣거나 친절하게 호주머니를 털어 티켓값으로 교환해주는 바보 놀이, 즉 아주 수완 좋은 훌륭한 마케팅이라는 것이다.

[이송희일, 막가파식으로 심형래를 옹호하는 분들에게?]

어떤 관객들이 심형래의 영화를 막가파식으로 옹호한단 말인가. 심형래의 인생 궤적과 작금의 성취는 많은 관객들의 옹호를 받을만 하니 받는 것이다. 심형래를 시기할 것이 아니라 심형래보다도 더 훌륭한 삶의 자세와 더 멋진 영화로 당신들도 관객의 평가를 받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심형래의 영화가 작품성이 좀 떨어질지는 몰라도 심형래는 적어도 관객들을 비아냥대지 않았고 모독하지 않았다. 그것이 심형래에게서 영화판의 주류들이 배워야 할 첫번 째 덕목이다.

먼저 인간에 대한 예의부터 배우고 갖추길 바란다. 그 다음에 영화를 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