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새들은 진짜 비상을 위해 이곳으로 와서 자신들의 몸뚱이를 던져버리는 것일까. 피가 식기 시작해 이곳까지 날아올 힘 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차갑고 헐벗은 바위뿐인 조분석 섬을 떠나 부드럽고 따뜻한 모래가 있는 이곳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설명들로 만족해야 하리라. 모든 것에는 항상 과학적인 설명이 있게 마련이다. 시에서 설명을 구할 수도 있고, 바다와 우정을 맺어 바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자연의 신비를 줄곧 믿을 수도 있다.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문학동네, 2001, p. 12>

행복한 국민

행복한 국민

<꾸뻬 씨의 행복 여행> 중 한 구절.

좋지 않은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가 어렵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사람이 리더인 나라의 국민은 행복하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보면서 가슴 벅찬 행복을 느꼈다. 가장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 리더인 이 나라가,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이나 중국보다 훨씬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나라가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사람사는 세상이 문재인에 의해 열리고 있다. 단 한 가지 가슴 아픈 것은 그렇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노무현의 시대에 노무현이 없다는 사실이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민주공화국의 역사를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여한은 없다. 노무현과 문재인. 그 어떤 영화나 소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운명이 이 나라를 구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무치게 그립지만, 그래도 우리 곁에는 문재인이 있다. 하늘이 이 나라를, 이 민족을 버리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궁극의 깨달음

궁극의 깨달음

당신이 ‘주시자’의 상태로 직접 들어가 봄으로써만 알 수 있겠지요. 즉 순수하게 주시하고 있는 인식 속에 그냥 조용히 안식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보여질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고, 즉 자연도 아니고 신체도 아니고 상념도 아니고, 오직 그와 같이 주시하며 깨어 있는 순수한 알아차림 속에 조용히 안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러한 주시하며 깨어 있는 인식에 대한 어떤 “감(感)” – 자유감, 해방감, 거대한 팽창감 – 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상태 속에서 안식하고 있으면서 이 ‘주시자’를 거대한 팽창감으로 “감지하고” 있는 동안, 만약 그때 예컨대 당신이 산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주시자’에 대한 감과 산에 대한 감이 동일한 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자신의 순수한 ‘자기’를 “느끼고” 당신이 산을 “느낄 때” 그 둘은 절대로 동일한 느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세계는 당신에게 – 하나는 저 밖에, 하나는 이 안에 – 이중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그러한 양상으로 당신이 현재의 체험 속으로 녹아든다면 분리된 자기감은 느슨하게 풀릴 것이고, 당신은 삶에서 뒤로 주춤 물러서는 것을 멈출 것입니다. 당신이 체험을 하게 되는 게 아니고 갑작스레 당신이 곧 모든 체험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저 밖을” 바라보며 “이 안에” 있게 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안과 저 밖은 하나이고, 그래서 당신은 더 이상 “이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하여 돌연히, 당신은 심신 속에 있지 않습니다. 돌연히 심신이 탈락되어 버립니다. 돌연히 바람이 당신에게 불어오지 않고, 그것은 당신을 통하여 당신 안에서 붑니다. 당신이 산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곧 산입니다. 당신이 곧 그것이고 그래서 당신이란 존재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순간순간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이러한 전체의 찬란한 현시일 뿐입니다. 분리된 자기는 아무 곳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켄 윌버, 모든 것의 역사, 김영사, 2015, pp. 418-419>

마음의 역할

마음의 역할

마음은 몸과 영을 이어주는 고리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음 또는 지성을 붓디(Buddhi)라고 하는데, 거기서 모든 붓다(Buddhas)가 출현한다. 마음이 몸과 영을 하나로 묶는다. 마음은 영에서 직접 발출된다. 마음은 영의 첫 번째 자기표현이며, 영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마음은 몸과 영 사이에서, 영이 몸에 정착하게 하고 몸을 영으로 끌어올린다. 영으로 하여금 물질 차원에 뿌리를 내리게 하며, 몸이 영적인 차원을 향해 나아가도록 그 방향을 부여한다.

이런 마음의 작용이 없다면, 육체만으로는 어떤 감각이나 시각이나 느낌도 갖지 못한다. 영적인 성장이라는 것은 오직 자기만을 느낄 수 있는 자기중심의 육체적인 느낌에서, 마음 곧 다른 사람의 역할을 이해하고 에고를 넘어 확장하는 단계로, 그리고 세계중심의 영적인 포용의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은 인식 작용이고 마음의 작용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느껴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필요하다. 마음은 자기중심적인 느낌의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는 자각을 가져다주며, 온 우주를 껴안는 길로 엄청나게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들어 준다. 느낌과 생각과 명료한 의식(깸), 몸과 마음과 영. 여기에서 마음은 잃어버린 연결고리이다.

<켄 윌버, 통합 비전, 물병자리, 2008, pp. 178-179>

영원히 사는 방법

영원히 사는 방법

우주의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숙명이다. 태어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죽게 되어 있다. 오직 인간들만이 그 죽음을 피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중국 진시황은 영생을 위해 불로초를 찾으려 했고, 현대 과학은 생명 연장을 위해 냉동인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삶이 아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주어진 순간 순간을 최대한 충실히 사는 삶이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If we take eternity to mean not infinite temporal duration but timelessness, then eternal life belongs to those who live in the present.

우리가 만약 영원을 시간이 무한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무시간성으로 받아들인다면, 영원한 삶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몫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영(Spirit)이란 무엇인가

영(Spirit)이란 무엇인가

영(Spirit)을 의식의 최상위 단계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다른 말로 진정한 신성 또는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라 할 수 있다. 깨달은 이들은 일관되게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깨달은 이들)은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를 마법적인 개념이나 신화적인 용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세계 밖에 있는, 또는 단순히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를 이 세계의 ‘그러함(Suchness)’이나 ‘이러함(Thusness)’ 등으로 묘사한다. 또는 모든 것이 출현하는 자궁과 같은 공(空)으로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때로는 궁극적인 지성이나 현존하는 자각 또는 무한한 의식을 암시하는 용어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것은 존재를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아는 존재 자체로서의 지성이며, 동시에 존재를 출현시키는 지성이다. 이 지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참 자아이다. 그래서 앎과 존재, 또는 주체와 객체가 비이원적인 현존 상태에서 하나로 존재하는 그런 지성이다.

그것을 ‘주체(a subject)’라고 한다면, 광대하게 열려 있는 목격자(또는 주시자), 절대적인 주관성, 대상을 공평하고 동등하게 노력 없이 자발적으로 비추는 거울 같은 마음, 모든 것을 끝없이 품으면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 충만하게 현존하는 큰 마음 등으로 표현해 볼 수는 있겠지만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주체이다.

그것을 ‘존재(Being)’라는 용어로 묘사하는 경우에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념과 느낌과 생각과 이미지에 앞서 존재하는, 그러나 존재하고 있는 단순한 느낌으로서 지금 여기에서 쉽게 접촉할 수 있는, 무엇의 그저 ‘그러함(Suchness or Is-ness)’을 의미한다.

그것을 인격적인 개념으로 묘사할 경우에는 모든 신 너머에 있는 ‘신성’, 이 순간 만물이 거기에서 출현해 나오는 ‘심연-지성(Intelligence-Abyss)’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하다. 여기서 영원하다는 것은 영구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이 없는 현재로서 언제나 현존하고 있는 무엇이라는 뜻이다.

<켄 윌버, 통합 비전, 물병자리, 2008, pp. 153-154>

양아치와의 협상은 가능한가

양아치와의 협상은 가능한가

양아치는 원래 동냥아치에서 나온 말이지만, 요즘에는 인성이나 행실이 몹시 불량한 기회주의자들을 일컫는다. 이들에게 신의나 의리 따위는 없다. 따라서 이들을 정상적인 사람들로 대우하면 안 된다. 이런 인간말종들과의 협상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혹시라면 이런 류의 인간들과 말을 섞어야 한다면 이런 자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영화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한 말을 되새겨 보라.

I’m gonna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만이 양아치들을 다루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