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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Poetry

별의 먼지

별의 먼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름으로
당신이 온다 해도
나는 당신을 안다.
몇 세기가 우리를 갈라놓는다 해도
나는 당신을 느낄 수 있다.
지상의 모래와 별의 먼지 사이 어딘가
매번의 충돌과 생성을 통해
당신과 나의 파동이 울려퍼지고 있기에.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소유했던 것들과 기억들을 두고 간다.
사랑만이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것만이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우리가 가지고 가는 모든 것.

<랭 리아브, 별의 먼지, 류시화 옮김>

If you came to me with a face I have not seen,
with a name I have never heard, I would still know you.
Even if centuries separated us, I would still feel you.
Somewhere between the sand and the stardust,
through every collapse and creation,
there is a pulse that echoes of you and I.

When we leave this world,
we give up all our possessions and our memories.
Love is the only thing we take with us.
It is all we carry from one life to the next.

<Lang Leav, Stardust>

봄길

봄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아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 봄길>
깨달음의 역설

깨달음의 역설

도를 깨닫고자 하면 도가 오히려 어지럽고

편안함을 구하고자 하면 도리어 편치 않다.

편안함도 깨달음도 없는 경지에 다다르면

그제야 이 일이 복잡하지 않음을 알게 되리.

情存見道還迷道

心要求安轉不安

安到無安見無見

方知此事勿多般

<원감 충지, 도안 장로에게 부치다(寄道安長老)>

선물

선물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당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 구절이면
한 아름 바다를 안은 듯한 기쁨이겠습니다.

<나태주, 선물>
나 하나 꽃 피어

나 하나 꽃 피어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조동화, 나 하나 꽃 피어, 2013>

귀향

귀향

생의 본질은 방황이고, 사람들은 방황을 통해 성장한다. 우리는 집을 떠날 때 비로소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 찬 길을 만난다. 그 길에서 기쁨과 슬픔을 알게 되고, 고난과 역경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을 헤쳐 나가면서 우리는 삶의 목적을 알게 된다.

하지만 삶의 본질이 방황이라 해도, 지치고 힘이 들 때 우리는 위안을 얻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어쩌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이 인생의 가장 멋진 시간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 같은 곳. 해질 무렵 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시골집 같은 그런, 그리움이 사뭇치는 곳이 있다면, 누구나 위로받는 여정이 될 것이다.

나태주 시인은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나태주, 행복>

우리는 가끔 돌아갈 집을 그리워한다. 아니 그리워해야 한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청첩장

청첩장

새해 들어 두 장의 청첩장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두 장 모두 안도현의 시가 적혀 있다.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요즘 젊은이들도 사랑에 관한 안도현의 시를 많이 읽나 보다. 특히, 안도현의 <사랑한다는 것>은 결혼 전에 아내가 보내 준 시다.

청첩장을 받아 보니 풋풋했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세월이 살과 같이 흘렀다.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안도현, 사랑한다는 것 中에서>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中에서>

그 젊은이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

나는 단순하게 살고 싶다. 비가 내릴 때 창가에 앉아 시험 치지 않을 책을 읽고 싶다.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원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내 몸에 귀를 기울이고 싶고 달이 높이 떠올랐을 때 잠들어 천천히 일어나고 싶다. 급히 달려갈 곳도 없이. 나는 인류가 스스로 부과한 돈과 시간, 혹은 어떤 인위적인 제한들에 의해 지배받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존재하고 싶다. 경계 없이, 무한하게. I want to live simply. I want to sit by the window when it rains and read books I’ll never be tested on. I want to paint because I want to, not because I’ve got something to prove. I want to listen to my body, fall asleep when the moon is high and wake up slowly, with no place to rush off to. I want not to be governed by money or clocks or any of the artificial restraints that humanity imposes on itself. I just want to be, boundless and infinite. <류시화, 시로 납치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