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ed by
Tag: 용서

박항서가 고마운 이유

박항서가 고마운 이유

한국은 베트남에 큰 빚을 졌다. 아니 큰 죄를 졌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의 만행을 기억하는 베트남 국민들은 한국을 증오했다. 수만 명의 양민을 학살한 미제국주의 용병을 어찌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세운 한국군 증오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이규봉, 베트남 마을에 있는 한국군 ‘증오비’, 오마이뉴스>

그렇다. 한국군이 지은 죄는 만대가 지나도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크고 깊었다.

전쟁이 끝나고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7년 10월, 박항서는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박항서는 베트남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한국은 베트남의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열렬히 응원했고, 베트남도 한국을 고마워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지은 용서받지 못할 죄와 베트남 국민들 가슴 속에 남아 있던 증오를 박항서 감독이 홀로 씻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에서 부임한 축구 감독이 베트남 국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이건 거의 기적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야.

베트남 국민들에게는 늘 미안하고 박항서 감독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베트남의 번영과 박항서 감독의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

진정한 용서

진정한 용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을 사면했다. 국민통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그 결과 전재산 29만원을 가진 전두환은 아직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그는 여전히 사과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친일반동 기회주의자들의 상식이다. 기무사의 계엄령 모의 사건은 광주 학살의 주역 전두환을 제대로 단죄하지 않아 생긴 일이다. 전두환을 사형이나 무기징역으로 다스리지 않으니 그 후예들이 “전두환처럼 해도 괜찮구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역자들을 어설프게 용서해서는 안 된다. 용서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다. 전두환을 사면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기무사의 내란 모의에 가담한 자들을 일벌백계하여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기무사는 마땅히 해체해야 한다. 그것이 역사와 국민을 위한 진정한 용서다.
[산티아고 순례길 11] 십자가 위의 예수

[산티아고 순례길 11] 십자가 위의 예수

순례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마을을 거치게 되는데, 어느 마을에나 성당이 있다. 아무리 작고 초라한 마을이라도 그 한가운데에는 제법 규모 있는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당은 예나 지금이나,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마을의 중심이라 할 만하다.

어느 성당이든 간에 그 성당에 들어서면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예수가 사람들을 맞이한다. 예수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십자가의 형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수는 고통의 피눈물을 흘리고 있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낀다. 예수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다는 그 전설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용서 대신 죄책감과 고통만 불러일으킨다.

예수는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져야 한다. 예수가 고통의 상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의 예수를 더 이상 숭배하면 안 된다. 그가 사람들에게 고통과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고 죽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보았던 예수들은 늘 십자가 위에 있었고, 고통의 상징이었고, 죄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예수의 가르침은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가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화신으로 부활해야 한다.

용서의 언덕을 떠난 카미노는 우르테가, 무루사발, 오바노스를 지나 아르가 강에 닿았고, 그 강에는 왕비의 다리(푸엔테 라 레이나)가 우아하게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왕비의 다리가 카미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얘기했다. 순례자들은 왕비의 다리를 건너 에스테야로 가기 전,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마을은 조용했고,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졌다. 저녁 무렵, 어느 카페 앞에서 떠돌이 악사들이 노래를 했다. 순례자들과 마을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어둠은 짙어지고 별이 떠올랐으며, 카미노의 밤은 악사들의 노래와 함께 깊어만 갔다.

우르테가로 향하는 길
우르테가로 향하는 길

고흐의 그림 같은 밀밭
고흐의 그림 같은 밀밭

오바노스의 세례자 요한 성당
오바노스의 세례자 요한 성당

알베르게에서 본 산티아고 성당
알베르게에서 본 산티아고 성당

십자가상 성당
십자가상 성당

십자가 위의 예수
십자가 위의 예수

왕비의 다리 건너기 전
왕비의 다리 건너기 전

왕비의 다리를 건넌 후
왕비의 다리를 건넌 후

아르가 강은 흐르고
아르가 강은 흐르고

거리의 악사
거리의 악사

[산티아고 순례길 10] 용서의 언덕

[산티아고 순례길 10] 용서의 언덕

길은 생장을 떠난지 닷새만에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ón)에 닿았다. 팜플로나를 지나자 추수를 기다리는 누런 밀밭이 펼쳐진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푸른 빛 하늘과 미야자키 영화에나 나올법한 비현실적인 흰구름들이 조화롭다. 밀밭을 지나 저멀리 언덕에 풍력발전을 위한 바람개비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곳이 페르돈 고개, 용서의 언덕이다. 순례길 초반에 “용서의 언덕”으로 이름지어진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행운이다. 달라이 라마의 말씀처럼 용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사랑이자 자비이며, 용서는 우리가 절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힘이고, 진정한 평화와 행복에 이르게 하는 수행이다. 순례는 자기자신을 얽매고 옥죄고 짓누르는 그 모든 것들과 결별하는 과정이다. 그 첫번째 열쇠가 바로 용서라는 것을 카미노는 가르쳐 준다. 에고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참나를 찾아 가는 것이 바로 순례이다. 용서의 언덕을 올라가는 길이 한없이 기쁜 것은 저곳에 다다르기만 하면,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용서가 저절로 찾아올 것만 같은 착각때문이다. 그것이 착각이든 아니든, 용서의 언덕에서 누구든 얼마간의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 그 해방감이 진정한 평화와 행복으로 이어지길 기도할 뿐이다. 용서의 언덕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서울까지의 거리가 새겨져 있다. Seul 9700Km. 그 현실감이 없는 거리 때문에 마치 서울이 요단강 건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처럼 느껴진다. 서울에 남겨져 있는 그 모든 부조리함들을 용서의 언덕에서 용서할 수 있을까? 카미노는 불가능할 것 같은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푸엔테라레이나 17.2Km
푸엔테라레이나 17.2Km, 페르돈 고개 8.4Km
용서의 언덕을 향하는 카미노
용서의 언덕을 향하는 카미노
길 위의 순례자들
길 위의 순례자들
사리키에기, 산안드레아 성당
사리키에기, 산안드레아 성당
언덕 위의 바람개비들
언덕 위의 바람개비들
서울 9700Km
서울 9700Km
용서의 언덕
용서의 언덕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

아홉살 먹은 딸아이는 아직도 성탄절을 기다리며 예수님께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편지를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놓았다. 예수님이 읽어 보고 꼭 선물을 달라는 애원(또는 협박?)이었다. 편지 앞면에는 예수의 탄생 장면이 그려져 있고, 뒷면(이면)에는 예수님께 하고 싶은 말이 적혀 있었다.

예수님께!

예수님, 내일이 예수님의 생신 성탄절이에요. 예수님은 천국에 계시죠?

저는 욕심꾸러기에요. 어쩌면 선물을 받고 싶어서 이러는지도 몰라요? 그래도 용서해 주실 거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계시잖아요.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벌을 받을께요…

이면지를 꼭!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 편지를 본 아빠의 마음은 급해졌다. 예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탄 전날, 많은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았고, 동네 장난감 가게만이 나와 같이 마음 급한 부모들로 북적거렸다.

12월 25일이 예수 탄신일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 분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고,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서, 그것 이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까?

딸아이는 정확하게 예수님의 참뜻을 알고 있었고, 그것과 더불어 한가지 더, “선물”을 바라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셨고, 아빠는 선물을 마련하였다.

천국이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아이들만 생각하면 늘 행복하다.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미리내 님이 권해주신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Discovery of the Presence of God)”를 읽었다.

사람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경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의식 수준이 낮은 나의 처지에서 그런 내용들은 이해는 고사하고 범접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내가 품고 있던 신과 영혼과 종교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의문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깨달음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많은 영혼들이 왜 가치있는지, 의식의 진화와 성장 단계가 무엇인지, 궁극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지향이 무엇인지, 왜 성인들은 용서와 사랑을 한결같이 강조했는지 이 책은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사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신의 본성을 설명해 놓은 부분은 그동안 내가 그 어떤 종교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가장 진보된 것이었다.

  1. 신성(Divinity)은 비선형적이고 불편부당하고 시비분별이 없으며, 편파성과 취사선택하는 편애를 넘어서 있다.
  2. 신성은 변덕스럽거나 분별하지 않으며, 추정적인 인간 감정들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신성한 사랑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이다. 한계는 에고의 귀결이다.
  3. 신의 정의는 신성의 전능과 전지의 자동적 귀결이다. 신은 ‘행’하거나, ‘작용’하거나, ‘원인’이 되지 않고 그저 ‘있을’ 뿐이다. 신성의 성질은 무한한 힘의 장으로서 방사되는데, 그 무한한 힘의 장에 의해 존재하는 전부는 있는, 그리고 되어 있는 ‘것’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렬된다. 각각의 영혼/영은 이렇듯 고유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수준을 향해 끌려가는데, 그것은 마치 바다 속의 코르크나 전자기장 속의 쇳가루의 움직임과 같다.
  4. 신성은 낮은 힘을 훨씬 넘어서 있는 무한한 힘의 고유한 성질로 말미암아 절대적 지배권이다. 낮은 힘은 위치성과 통제의 도구이며 유한하다. 힘은 무한한 세기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힘을 구할 필요가 없는 신성한 참나로서의 힘의 근원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5. 신성의 막강함과 전적인 현존 내에서, 존재하는 전부는 스스로를 정렬시킨다. 이 조정은 영적 선택의 귀결이다. 자유는 신성한 정의에 고유하다.
  6. 의식의 무한한 장으로 표현된 신성의 전지와 전능은, 실상을 가능성의 전 단계에 걸쳐 확인해 주는 의식 연구 측정 기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생각, 행위, 결정이 시간과 장소 너머에 있는 의식의 무한한 장에 각인된다. 이 각인에 의해, 정의가 보증된다.

<데이비드 호킨스,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pp. 152-153>

겸손한 삶, 내맡기는 삶,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한 삶, 결국 인류 역사상 모든 성인들과 스승들이 한결같이 가르쳤던 내용들이 진리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에게는 새로운 화두가 생겼는데, 그것은 환상으로 명명된 이 차원에서의 삶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성철 스님의 법문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았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피폐해지는 블로그

피폐해지는 블로그

“티벳 사자의 서”의 저자 파드마삼바바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과거 삶을 알고 싶으면 현재 그대의 행동을 들여다보아라. 그대의 앞날을 알고 싶으면 현재 그대의 행동을 들여다보아라.

블로그의 글들이 점점 피폐해진다. 비난과 비판과 비아냥으로 가득 차 있는 글들은 내가 써놓은 것이긴 하지만 참으로 읽기 민망하다. 증오와 분노가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분노한다. 인간들의 역사가 파렴치하고 탐욕적인 자들의 농간으로 끊임없이 더럽혀져 왔다는 사실에 나는 절망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고, 간디는 암살당했다. 달라이 라마는 정치적 망명을 떠나야 했으며, 김구도 저들의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

왜 역사는 이리도 부조리하단 말인가? 왜 사필귀정은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왜 가난한 자들은 늘 그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왜 정의로운 자들은 늘 그렇게 탄압을 받아야 하는가? 수천 년 전 예수와 부처가 고민한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인간이란 구원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들이란 말인가?

블로그 글들이 피폐해지는 만큼 내 영혼도 피폐해진다. 파드마삼바바의 말처럼 현재 나의 모습은 과거와 미래의 나의 모습일 것인데, 나는 그 사실이 두렵다.

따뜻하고 소박한 글들을 쓰고 싶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원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해 보인다. 그런 나의 무기력이 슬프고, 비루하고 처참한 세상이 슬프다.

어떻게 살 것인가.

달라이 라마에게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있을까

달라이 라마에게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있을까

달라이 라마의 <용서>를 읽었을 때, 나는 그에게 무한한 존경의 마음이 일었다. 그는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고,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며,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그가 의미하는 바를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말한 것은 예수나 부처가 수천 년 전에 이미 가르친 것들이고, 그것을 몰라서 용서를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게 늘 따라다니는 화두는 “도대체 내가 과연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진정한 용서란 어떤 것인가”라는 그런 문제들이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과연 내가 그 상황에 맞닥드렸을 때 달라이 라마가 말한대로 그렇게 용서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훌륭한 성인들은 한 번도 분노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면서 용서할 수 있을까? 정호승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있지 용서에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한 가지 용서하면 신은 나의 잘못을 두 가지나 용서한다고 살면서 얼마나 많이 남을 용서했느냐에 따라 신이 나를 용서한다고 불쌍한 내 귀에 아무리 속삭여도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슬픔이 있지 용서만이 인간의 최선의 아름다움이 아닐 때가 있지 내가 내 상처의 뒷골목을 휘청거리며 걸어갈 때 내가 내 분노의 산을 헉헉거리며 올라가 기어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때 아버지처럼 다정히 내 어깨를 감싸안고 용서하는 일보다 용서를 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용서할 수 없으면 차라리 잊기라도 하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셔도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분노가 있지 히말라야의 새벽보다 먼저 일어나 설산에 홀로 뜬 초승달을 바라보며 문득 외로움에 젖을 때가 있지 야윈 부처님의 어깨에 기대어 용서보다 먼저 눈물에 젖을 때가 있지 <정호승, 용서>
나약하지만, 용서보다도 먼저 분노하고 슬퍼하고 눈물 흘리지만, 그렇게 불완전하기에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것이 인간일 거라는 사실. 정호승은 그것을 일깨워 주었다.
위로받을 수 없는 고통과 빽빽한 햇볕, 밀양 密陽

위로받을 수 없는 고통과 빽빽한 햇볕, 밀양 密陽

새끼를 잃은 어미는 (그것이 짐승이든 사람이든) 우~우~우~ 하고 운다. 그 끝이 없은 슬픔은 가슴을 파고 들어 뼛 속까지 침잠한다. 고통과 절망은 세포 속의 핵에까지 전달된다. 위로받을 수 없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새끼를 잃어 본 어미들의 고통이다. 그것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타인에게 전이될 수도 없는 그런 아픔이다. 그리고 사내들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없는 어미가 되어 본 여자들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고통이다.

위로 받을 수 없는 고통 위로 빽빽한 햇볕이 내린다. 빛이 아니라 볕이다. 빛은 보는 것이지만 볕은 느끼는 것이다.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 빽빽한 햇볕과 씨줄 날줄로 엮여 나간다.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 아픔이 볕을 받아들인다. 고통이 볕과 함께 퇴적된다.

위로하지 말고 그냥 두어 걸음 뒤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이 볕과 함께 발효될 때까지. 그 때가 언제가 될 지 기약이 없지만 볕은 계속 빽빽하게 내려쬘 것이고, 삶은 지속될 것이다.

밀양(密陽)은 Secret Sunshine 이 아니고 Dense Sunshine 이다.

예수는 조갑제를 용서할까

예수는 조갑제를 용서할까

전직 월간조선 사장이었던 극우 언론인 조갑제가 예수를 들먹이면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도덕적이라고 설교했다. 예수가 한반도로 건너와 정말 고생 많이 하신다. 위대한 시장경제론자가 되어야 하고, 이랜드의 매출과 이익도 올려줘야 하고, 사학법도 막아줘야 하고, 초대형 교회 부흥도 시켜야 하고, 서울도 봉헌받아야 하고.

백만 보 양보해서 조갑제의 말대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라 하자. 그렇다면 예수는 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매우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19:23-25>

조갑제의 말대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인데, 예수는 그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천국은 아무도 없는 텅빈 공간이란 말인가. 우리나라의 부자 낙타들 중 과연 천국의 바늘 구멍을 통과할 자가 누구란 말인가, 갑제씨.

조갑제의 의해 위대한 시장경제론자가 된 예수도 조갑제의 논리에 의하면 부도덕한 이가 되어 버렸다. 부자를 축복하지는 못할 망정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해 버린 예수는 조갑제 식으로 얘기하면 부도덕의 극치가 된 것이다. 어떤가? 자기모순 아닌가? 이명박을 구하기 위해 진정 이렇게 예수까지 팔아야 한단 말인가, 갑제씨?

내가 아는 한, 제대로 된 그 어떤 종교도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도 부처도 부자를 축복하지 않았다.

사랑의 상징 예수가 과연 조갑제를 용서할 것인가? 나는 다만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