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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 죽음의 진실(?)

최진실 죽음의 진실(?)

최진실의 자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최진실을 좋아했든, 좋아하지 않았든 수많은 국민들이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것은 사실이다. 대다수 언론들은 연일 그의 죽음을 팔기에 바쁘고, 인터넷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수구 정치 집단들은 ‘최진실법’을 만들겠다고 아우성이다. 쓰레기 언론들과 수구들이 지목한 범인은 ‘인터넷 악플’이란다. 또한, 진보라고 하는 이들도 최진실 죽음에 대해 강만수가 비판받아야 한다며 일갈했다. 다들 한 여인의 자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여념이 없다. 참으로 인간에 대한 그리고 고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는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최진실은 왜 갑자기 자살을 했을까? 경찰은 충동적인 자살이라고 결론지었다. 사랑하는 두 아이까지 둔 엄마가 왜 자살 충동을 이기지 못했을까? 정말 인터넷에서 나뒹구는 쓰레기 같은 댓글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들까지 남기고 자살을 했을까? 자기가 사채업자라고 매도당했다 해서 그것이 억울해서 죽었을까? 그렇게 억척스럽고 똑순이 같았던 여자가, 삶의 그 많은 굴곡을 견디며 살았던 그가 이 정도의 난관을 왜 견디지 못했을까?

최진실의 죽음을 ‘인터넷 악플’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은 최진실을 가장 모독하는 짓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물론, 알고도 그런다면 더 나쁜 인간들이겠지만.) 최진실이 쓰레기 악플 때문에 세상을 등질 그럴 사람이 아니다. 차리리 그 엉뚱한 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찾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하면 했지, 그런 사소한 일에 자신의 목숨을 버릴만한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아이가 있지 않은가?

경찰의 결론, 즉 충동적 자살이라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면, 최진실은 죽고 싶은 충동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최진실이 죽었던 그 순간, 그는 이성을 잃었다는 얘기다.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다. 자기의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의 우울증에 주목한다. 경찰에 따르면, 최근 6개월동안 그는 신경안정제의 복용을 늘려왔다고 한다.

최진실이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던데?
“모친에 따르면 이혼 후 몇년간 우울증으로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왔다고 하는데, 최근 6개월간 복용량이 조금씩 늘어났다고 하더라.”

<경찰 “최진실, 우울증으로 최근 신경안정제 복용량 늘여”>

그렇다면 신경안정제의 원리가 무엇일까? 신경안정제는 인위적으로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을 증가시켜 안정을 취하게 해준다. 세로토닌은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호르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신경안정제들이 세로토닌은 증가시켜 주지만, 지나친 세로토닌의 증가로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을 감소시킨다는데 있다. 도파민은 행복을 느끼게하는 호르몬이다. 때문에 최근의 한 연구보고에 따르면 신경안정제의 장기 복용은 오히려 우울증이나 자살충동을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Many depressed patients do not improve with 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 (SSRI) Antidepressants, such as Prozac, Paxil or Zoloft. Prozac and Paxil only increase serotonin and norepinephrine activity. When serotonin is increased above normal levels with medication, the brain downregulates dopamine production. Dopamine downregulation explains why some patients become suicidal on “antidepressants.”

<Antidepressants Can Increase Depression, Impulsivity and Suicide Risk by Decreasing Dopamine, Reuters>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세로토닌이 정상적인 수준보다 (인위적으로) 높게 되면, 인간의 뇌는 도파민의 생산을 줄여버린다. 이 때문에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는 환자들이 오히려 자살 충동을 이기지 못할 수 있다. 최진실은 이혼 이후 복용하던 신경안정제의 양을 최근 6개월동안 지속적으로 늘려왔다. 더군다나 사건 당일에는 촬영 후에 속이 상해 술을 많이 마신 것으로 나타났다. 신경안정제를 장기 복용하는 환자가 지나친 알코올을 섭취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약효가 지나치게 증폭될 수 있다.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세로토닌 증가로 도파민의 수준이 너무 낮아졌고, 최진실은 자신의 자살충동을 이성으로 제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자살을 했던 여자 연예인들을 보면, 대부분 공통적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그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약의 복용이 오히려 자살 충동을 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들의 죽음은 ‘신경안정제’의 과다복용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전에도 얘기했듯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약들이 그리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자살충동까지 불러일으킨다면, 이런 약들에 대한 처방과 복용은 정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광우병 위험이 제기될 때, 과학을 들이밀던 인간들이 지금 최진실의 자살에 대해서는 ‘최진실법’을 운운하며 인터넷 통제를 하려 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고인의 죽음까지도 이용하는 그런 인간들이다. 정말 귀신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왜 엉뚱한 사람들만 데려가는가.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한 제작자는 배우(俳優)라는 말을 풀어쓰면서, 한자로 배우를 나타내는 배(俳)는 사람인(人)과 아닐비(非)가 합쳐진 낱말로 “배우는 사람이 아니지만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는 엉뚱한 정의를 내렸다. 그는 이어서 배우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주로 의존한 삶을 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 비해 감수성이 아주 예민할 뿐더러 때로는 즉자적이고, 때로는 엇나간 모습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배우들은 영화나 연극 혹은 TV 연속극에서 늘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서의 연기를 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기에 때로는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헷갈릴 때도 있을 것이다. 진짜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자기를 버리고 실제로 감독이나 연출자의 지휘에 몸을 맡겨버린다. 그리고, 그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에는 자기가 아닌 그 작품 속의 인물로 살아간다고 한다. 영화 밀양에서 신애를 연기한 전도연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작품이 끝나고도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주홍글씨 촬영을 마친 이은주는 자살했다. 물론, 그 죽음이 영화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나오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배우든, 가수든 우리가 흔히 속된 말로 “딴따라”라고 부르는 광대들은 그들의 예술과 창작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그리고 행복하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삶은 순탄치 않다. 아니 행복하고 바른 광대들은 더이상 광대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의 밑바닥까지 부딪혀 보지 않고는, 그 쓰디쓴 인생의 절망을 맛보지 않고는 제대로된 광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들의 천형이라면 천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길을 간다.

한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었던 최진실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배우로서, 연기자로서, 그리고 광고모델로서 꽤나 성공한 축에 들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견뎌야했던 것들과 견딜 수 없던 것들 속에서 그는 수없이 방황했을 것이고, 그 롤러코스터 같은 삶의 끝은 그에게 너무도 갑자기 그리고 어이없게 닥쳐버렸을 것이다. 슬픔은 엄마를 그렇게 보내버린 두 아이의 몫으로 오롯이 남아버렸다. 그에게 주어진 삶이 그만큼이라는데 누굴 탓할 것인가.

최진실의 죽음은 그가 너무 유명한 스타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지만,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 35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다. 삶은 유명 배우에게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도, 돈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재벌 회장에게도 그렇게 견디기 힘들고 팍팍한 것임을, 그리하여 붓다는 삶은 고(苦)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비루하고, 고통스럽고, 쓸쓸하지만, 삶은 또 그렇게 지속된다. 스스로 세상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다음 생은 부디 편안하기를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다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