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네 가진대로 찍어라

총선, 네 가진대로 찍어라

이 글은 가진 것은 쥐뿔도 없는 “서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조중동문 같은 후안무치한 우리나라 대다수 언론들에게 속아서 엉뚱한 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쓴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 집도 없이 월세나 전세를 살면서 “세금폭탄”이라는 말 한마디에 “종부세 폐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제발 정신 좀 차려”라고 얘기하기 위해 쓴 글이다. 지난 대선 때, 한 백수 젊은이가 나와서 취직이 안된다며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메가를 지지한다”는 그런 눈물겨운 코메디가 되풀이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쓴 글이다.

오래 전 김규항은 “비판적 지지”라는 투표 행위를 비판하면서 “네 이념대로 찍어라”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김규항은 그 글에서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비판적 지지했던 진보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면서, “털끝만큼”이라도 진보의 지분을 늘리기 위해서는 “네 이념대로 찍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중립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제 이념대로 순정하게 찍는 것, 그래서 한국정치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한국인들의 이념적 스펙트럼과 동기화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것만이 한국인들이 제 처지에 가장 적절한 정치를 맞을 유일한 방법이다. 네 이념대로 찍어라. 한국사회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면 가장 반동적인 보수후보를 찍어라. 한국사회의 표면적 악취라도 우선 덜고 싶다면 가장 개혁적인 보수 후보를 찍어라. 그러나 한국사회의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진지하게 바란다면 (당선 가능성을 절대 기준으로 한 이런저런 되지 못한 정치평론일랑 걷어치우고) 그저 가장 진보적인 후보를 찍어라. 진보에 외상은 없다, 네 이념대로 찍어라.

[김규항, 네 이념대로 찍어라]

언젠가 얘기했듯이, 나는 “비판적 지지”라는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정치적 위치를 규정하는 것은 “선택”이라는 “행위”이지, 누구를 지지한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에 민노당을 지지한다고 하면서 실제 투표는 김대중이나 노무현에게 했다면, 그는 보수주의자다. 따라서 비판적 지지를 외치는 사람들은 대개 위선적이다. 자기의 진보적 이념과 보수적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선택과 행위를 해왔는지 더 주의깊게 본다.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은 현재의 그 사람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말로 하는 진보를 믿지 않는다. 그 말들이 아무런 달콤하고 장미빛 미래를 보여준다 해도 그 말이 세상을 바꾸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념대로 찍어라”는 김규항의 충고는 담백하기는 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이념적 지향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고 파악할 수도 없을 뿐더러, 이념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바뀔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념을 잘 믿지 않는 이유는 자기 이념의 변절자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한때 대한민국 대표적 빨갱이였던 박정희는 빨갱이를 때려잡는 반공의 화신이 되었고, 극렬 좌파였던 이재오, 김문수는 수구 정당에 들어가 호의호식하고 있으며, 대학을 다닐때 노동자, 민중을 위해 투쟁했던 대다수 학생회장들은 보수 정당에서 궁물이나 빨아먹는 존재들이 되었다.

선거에서 우리는 “이념”이라는 추상적인 기준보다 보다 구체적이고 피부에 와닿는 잣대가 필요하다. “경제만 살리면 된다”며 도덕적 파탄자를 지도자로 뽑는 국민들에게는 “이념”이라는 것은 씨도 안먹히는 얘기다. 하여 나는 주장한다. 당신들이 가진대로 찍어라. 당신들의 재산대로 찍어라.

당신이 고려대 같은 명문대를 나오고, 소망교회를 다니며, 강남에 십억원이 넘는 아파트에 살면서 억대 연봉을 받는다면 당신은 이메가와 한나라당을 찍는 것이 맞다. 이 말은 경제적 관점에서만 얘기한 것이다. 물론, 당신이 고소영 범주이면서도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진보를 지지할 수는 있다. 그것을 말릴 생각은 없다.

당신이 월세, 전세를 살면서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아이들 사교육비를 걱정하며 제발 양극화가 해소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메가와 한나라당을 지지해서는 안된다. 당신이 종부세 대상자도 아니고 억대 연봉자도 아니면서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현재 처지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당신은 당신의 어리석은 정치의식 때문에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질 뿐이다.

총선에서 누구를 찍어야 될 지 모르겠다면 당신이 지금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헤아려 보시라. 그리고 당신이 가진대로 찍으면 된다. 이것이 서민이라 불리는 당신에게 드리는 기본적인 투표기준이다.

돈이 안되니 더욱 멋진 게임

돈이 안되니 더욱 멋진 게임

사람들에게 오픈소스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받는 질문은 “그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법니까?”이다. 그러면 나는 “세상의 모든 일을 돈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얼마든지 있지요”라고 대답하곤 하지만 씁쓸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용서받은 자도 있으니 할 말은 없지만 (그런데 과연 그 자는 경제를 살릴 수 있을까), 돈이 개입되지 않음으로 해서 더 멋지고 아름다워지는 것들도 적지 않다.

리누스 토발즈가 돈을 벌기로 마음 먹었다면, 빌 게이츠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세계 100대 부자 안에는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리눅스를 오픈소스로 만들면서 운영체제의 세계는 더욱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졌다. 그는 돈보다도 더욱 소중한 가치들을 세상에 알렸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아니다.

고래가 꿈꾸는 세상의 똘망소년 님이 소개해주신 Crayon Physics라는 게임 동영상을 보다가, “게임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임을 즐겨 하지 않지만, 이렇게 기발하면서도 깔끔하고 지능적인 게임을 보면 저절로 감탄을 하게 된다. 독립영화가 그렇듯이 독립게임이라는 분야도 이런 멋진 게임들을 만들어낸다. 경제적 관념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자기의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돈은 대체로 사람들을 메마르게 만든다. 특히 너무나 많은 돈은 사람들을 피폐하게 한다. 부자가 천국에 갈 확률은 예수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어떻게 기사를 왜곡하는가

기자들은 어떻게 기사를 왜곡하는가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기 바로 전날,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블로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글로 써서 블로그에 올렸다. 그리고 오늘 구글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전자신문 정진욱 기자가 쓴 “노대통령이여, 블로거가 되라”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다음은 정진욱 기자가 쓴 기사의 전문이다.

‘노무현 대통령님, 블로거가 되십시오.’

이명박 정부가 첫 출발을 맞는 날, 메타 블로그 사이트 올블로그(대표 박영욱)에 이제 재야로 떠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아쉬워하는 글이 게시돼 화제다. 올블로그 추천 게시물 순위 4위에 오른 이 글(soyoyoo.com)은 노대통령이 지난 24일 고별 간담회 때 밝힌 소회로 시작한다. ‘요즘 나는 내가 두렵다.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애써 외면하려 하는 내가 두렵다 …(중략)…’ 이어 이 블로거는 노 대통령의 역사에 대한 신념은 존중하지만 어려워진 경제상황 역시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떠나가는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은 글 곳곳에 묻어있다. ‘과연 노무현의 감당했던 자리를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 누가 기득권 세력과 맞서 역사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나설 수 있을까?’라고. 이 블로거는 미국이 지난 8년간 세계와 역사에 죄를 지으며 절망에 빠졌다가 오바마라는 인물을 찾았듯 노 전 대통령의 역할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역설한다.

바로 블로거가 되어 1인미디어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달라는 것.

“노무현 대통령님, 블로거가 되십시오. 당신께는 참으로 미안하지만 지금은 당신을 그렇게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새로운 희망이 나타날 때까지 당신은 불을 밝히셔야 합니다. 강이 바다로 흘러갈 때까지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것 같습니다”라고.

한편 블로거는 트랙백을 통해 이 글이 정치적으로 해석되길 바라지 않는다며 소견을 밝혔다.

[정진욱, 노대통령이여 블로거가 되라, 전자신문]

이 짧은 기사에서 정진욱 기자는 몇 차례 어이없는 그렇지만 의도적인 왜곡을 자행한다. 우선, 내가 썼던 그 글은 올블로그 추천게시물 목록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올블로그에서 화제가 될 정도로 인기있는 글도 아니었다. 기자가 어떻게 내가 쓴 글을 접했는지는 모르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아쉬워하는 글이 게시돼 화제다”라는 문장은 그냥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 부분인데, 기자는 내가 “노 대통령의 역사에 대한 신념은 존중하지만, 어려워진 경제상황 역시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단다. 나는 그 글에서 경제상황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내가 절망과 무관심이란 말로 글을 시작해서 기자가 오해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이메가라는 자가 대통령으로 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의 심적 상황을 표현한 것 뿐이지, 경제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기자는 경제상황을 언급함으로써 노무현 지지자인 나를 이용하여 노무현과 나를 동시에 교묘하게 조롱하고 있다. 노무현의 지지자가 그의 역사 의식은 인정하지만, 경제 실정을 비판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기자는 기사의 말미에 내가 트랙백을 통해 “이 글이 정치적으로 해석되길 바라지 않는다”며 얘기했다고 한다. 내 블로그에 내가 트랙백을 보낸다구? 어디에 내가 내 글이 정치적으로 해석되길 바라지 않는다고 했단 말인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정치적인 글을 써 놓고 정치적으로 해석되길 바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구. 정치적인 글을 정치적으로 읽혀야 한다. 그리고 올바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도대체 정진욱 기자는 왜 내 글을 기사화했을까? 이런 짧은 기사 속에 내 글에 대한 인용 부분과 두어 군데 왜곡된 부분을 제외하면 도대체 정진욱 기자가 쓴 것은 무엇일까? 내 블로그의 글을 가지고 기사를 썼으면서 왜 그 흔한 댓글이나 트랙백 하나 안 남겼을까? 전혀 사실이 아닌 두어 문장이 들어가면서 내가 쓴 글의 의미는 반감되어 버리고 나는 조롱당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리나라 기자들 참 기사 쉽게 쓴다. 블로그 글 하나 놓고, 자기 내키는대로 왜곡해서 말이다. 물론, 확인을 하지 않는 것도 기본이고. 나도 이런 식이라면 하루에 수십 개라도 쓰겠다. 소돔과 고모라에 제대로 된 의인 한사람이 없었듯이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기자와 언론이 없다. 이런 나라에서 이메가가 대통령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말 한심하고도 슬픈 일 아닌가.

그러게 있을 때 좀 잘하지 그랬냐

그러게 있을 때 좀 잘하지 그랬냐

대표적인 진보 노까 손호철이 “노무현이 그립다”며 설레발을 쳤다. 내가 누차 얘기했기만, 나는 이런 먹물 진보들의 횡설수설이 수구꼴통 김용갑보다 더 역겹다고 보는 사람이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을 뽑아 놓고 등 뒤에서 칼질을 했던 최장집이나, 손호철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우리 사회 진보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별 도움이 안될 그런 족속들이다.

손호철이 어떤 인물이었던가? 불과 보름 전만 해도 이메가에게 노명박을 닮지 말라고 게거품을 물었던 자가 아니었던가. 그 글에서 손호철은 이메가와 노무현이 닮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경박한 언행을 꼽았다.

사실 대통령께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너무 닮은 점이 많으며, 잘못하실 경우 노무현의 비극을 반복할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경박한 언행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손호철, 이명박 대통령께>

소위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정치학자라는 사람의 칼럼이다. 이메가가 노무현의 100분의 1만 닮았어도 이렇게까지 황량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경박한 언행이라고? 이메가가 경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무현은 경박하지 않고 소박하였다. 꾸밈이 없었고, 직설적이었을 뿐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 와서 노무현이 그립단다.

노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점이 많다. ‘바보 노무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우직하게 원칙을 지키며 지역주의와 냉전적 주류언론 등 한국정치와 사회의 벽에 도전했던 그의 용기,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기술 등 그가 가진 장점은 많다. 그러나 그 같은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아집, 독선 등 결점들을 주로 발휘하고 말았다.

<손호철, 노무현이 그립다 1>

불과 보름 사이에 경박이 언행이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바뀌었다. 노무현이 그 어려움을 겪은 것은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언론과 이 땅의 기득권 세력들에 의한 딴지와 방해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그냥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최장집, 손호철, 손석춘 등 소위 진보 지식인들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민노당에 몸담으면서 끊임없이 노무현을 씹었던 자들의 행패는 지난 5년을 더욱 힘들게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노무현이 그립다구? 한 번도 노무현이 지지해 본 적이 없는 자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노무현을 그리워할 수 있는 자격은 나같은 노무현 지지자들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손호철 같은 사이비 진보 지식인은 그럴 자격조차 없다. 이메가 치하 보름을 살아보니 이건 아닌가 싶은 모양이지? 그걸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알 수 있는 것인가?

올바른 역사의식이 없으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 사이비 진보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데 아주 크게 기여하였다. 그래도 잘났다고 계속 말도 안되는 질낮은 칼럼들을 써댈 것이다.

제대로 된 언론과 제대로 된 진보가 없이는 이메가와 한나라당의 깽판을 막을 길이 없다. 나라가 거덜이 난 후에 그때 뼈아픈 후회를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물이 소중한 것은 물이 없어져 봐야 알듯이, 노무현이 소중한 것은 노무현이 물러난 다음에는 알게 된 것이다.

올봄은 봉하마을에만 온 듯하다. 봄이 봄이 아닌게야.

3월의 황사와 뼈아픈 후회

3월의 황사와 뼈아픈 후회

서쪽에서 온 바람에 모래가 실려 왔다. 사람들은 황사라고도 했고, 흙비라고도 했다. 숨쉬기가 버거웠고, 목이 아팠다. 모래알갱이가 서걱서걱 씹혔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사람들은 봄을 기다렸지만, 봄은 황사에 밀려 쉬이 오지 못했다.

서걱거리는 황사 속에서 왜 자꾸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라는 시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그 끝없는 이기심들의 암묵적 합의로 태어난 거짓의 향연 속에 사막의 모래바람이 사정없이 불어온다. 후회가 부질없기는 하지만 때로는 뼈에 새기는 아픔이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이제 겨우 2주가 지났을 뿐인데, 황사 속에 끝없는 폐허가 아른거린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돌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高熱)이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나의 자기 부정 ;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뿐

[황지우, 뼈아픈 후회]

이메가가 노리는 잿빛 세상

이메가가 노리는 잿빛 세상

“이메가와 그의 아이들” 벌이는 초현실 코메디 쑈의 결정판을 보면서 “모모”라는 소설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해. 허나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지지.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지. 한 마디로 몹시 지루한 게야. 허나 이런 증상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게 마련이란다. 하루하루, 한 주일 한 주일이 지나면서 점점 악화되는 게지. 그러면 그 사람은 차츰 기분이 언짢아지고, 가슴 속이 텅 빈 것 같고, 스스로와 이 세상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된단다. 그 다음에는 그런 감정마저 서서히 사라져 결국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되지. 무관심해지고, 잿빛이 되는 게야. 온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아지는 게지. 이제 그 사람은 화도 내지 않고, 뜨겁게 열광하는 법도 없어. 기뻐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아. 웃음과 눈물을 잊는게야. 그러면 그 사람은 차디차게 변해서,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그 지경까지 이르면 그 병은 고칠 수가 없어. 회복할 길이 없는 게야. 그 사람은 공허한 잿빛 얼굴을 하고 바삐 돌아다니게 되지. 회색 신사와 똑같아진단다. 그래, 그들 중의 하나가 되지. 그 병의 이름은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이란다.

<미하일 엔데, 모모, p.328>

세상 모든 것이 잿빛이 될 때까지 이메가의 쑈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슬퍼할 것은 슬퍼하고 후회할 것은 후회하고, 분노할 것은 분노해야 하지 않겠는가. 견딜수 없다면 싸워야하고, 싸워서 끌어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무관심은 이메가의 호구로 가는 지름길이다.

The fact that you prevented it from happening doesn’t change the fact that it was going to happen.

<Steven Spielberg, Minority Report, 2002>

이메가의 쑈는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일 뿐이다.

대한민국 여성분들께

대한민국 여성분들께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 기념일입니다. 명색이 100주년인데, 축하하는 이들(특히, 남자들)이 없는 것 같아 제가 대한민국 남자들의 대표는 아니지만, (주제 넘게) 대한민국의 여성분들에게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대한민국의 어머니들, 아내들, 며느리들, 그리고 딸들께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당신들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그리고 이 나라의 남자들은 온전히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신들의 꿋꿋한 인내와 눈물겨운 희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새천년을 맞이한지 벌써 8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 여성들은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군요. 경제 규모로서는 세계 10위권이라는 이 대한민국에서 남녀 평등 지수는 97위랍니다. 대한민국 여성분들께 참 미안합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 아내 그리고 딸에게도 참 미안합니다.

언제나 이 나라의 여성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언제나 이 나라의 남자들이 철이 들고, 정신을 차릴까요? 남자인 저도 참 답답하고 난감한데, 여러분들 심정을 어떻겠습니까?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이 땅의 남자들이 여러분의 권리와 처지를 배려해 줄리 만무하니, 다른 방법이 없군요. 현명하신 여러분들이 스스로 쟁취하시는 것 밖에는.

제가 드리는 이 감사와 축하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어머니들, 아내들, 며느리들, 그리고 딸들, 힘내십시오. 그리고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십시오. 여러분들이 행복해져야 아이들이 행복해지고, 아이들이 행복해져야 이 세상이 행복해집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훨씬 따뜻하고 행복한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소요유 올림

사랑하는 딸의 생일을 축하하며

사랑하는 딸의 생일을 축하하며

너는
지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내에게 날아온 천상의
선녀가
하룻밤 잠자리에 떨어뜨리고 간 한 떨기의 꽃

<김용화, 딸에게>

나는 지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내는 아니었지만 천상의 선녀처럼 예쁘고 현명한 네 엄마를 만나 너를 낳았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해서 어지간히도 게으르고 어정쩡한 사내였던 나는 아빠가 되었지. 철 모르던 사내들은 아빠가 됨으로써 비로소 어른이 된단다.

세상의 아빠들이 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겠지만, 아빠가 된다는 것은 신이 사내에게 내리는 가장 큰 축복이다.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생명을 껴안고 느끼는 사랑과 행복. 그 사랑과 행복에는 물론 그 생명을 지키고 키워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이 따르지만,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그런 소중한 것이지.

거짓이 진실을 억누르는 그런 못된 세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래도 희망이 있고 일말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향기가 피어오르는 까닭은 너와 같이 예쁘고 착한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빠를 포함한 어른들은 정말 많이 반성해야 돼. 너희들이 살아갈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지는 못할 망정 점점 더 힘들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면목이 없다.

아빠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너를 위해서라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겠지. 네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아빠가 살았던 세상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도록 아빠는 노력할 것이다.

사랑하는 딸아. 아빠와 함께 진실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런 것들을 배워 나가자. 물론 아빠도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은 어렴풋하게 알 것도 같다. 건강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삶, 그런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이다.

선녀가 떨구고 간 한 떨기 아름다운 꽃 같은 딸아, 너의 일곱 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돈 많은 것이 죄가 아니라구?

돈 많은 것이 죄가 아니라구?

이메가라는 자가 취임하자마자 1억 달러 내각을 끌어모았다. 예상못했던 바도 아니고,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만약 그 자가 윤구병 같은 이를 장관으로 임명하려 했다면 그것이 더 놀랄 일 아니겠는가. 1억 달러 내각의 면면은 이메가를 닮았지만, 아무도 이메가를 뛰어넘지 못했다. 하기는 우리나라에서 이메가를 뛰어넘는 뻔뻔함을 가진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1억 달러 내각에 대한 검증이 시작되자, 그들이 안드로메다에서나 통할 법한 소리로 변명을 늘어 놓는다. 이런 어처구니들의 손을 들어 준답시고, 또다시 여론조작을 시도하는 언론들. 돈 많은 것은 죄가 아니란다. 그러면서 그들은 교회의 장로들이고 집사들이다. 믿음이 부족해서 복지정책이 실패하고 양극화가 생겼단다. 돈이 많은 것이 죄가 아니라면, 왜 그들이 그렇게 받들고 있는 예수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을까. 왜 예수는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라고 말씀하셨을까. 왜 그래야만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예수를 믿는 것일까. 그들이 다니는 교회에는 내가 알고 있는 예수와 다른 예수가 있는 것일까. 돈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은 죄다.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노동인데, 자기의 노동만으로는 1억 달러 내각에 있는 자들처럼 돈을 긁어 모을 수가 없다. 설령, 억세게 운이 좋아서 죄를 짓지 않고 돈을 많이 벌었다 하더라도 필요 이상의 돈은 다른 이들을 위해 써야 한다.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이고, 부처의 가르침이다. 사람은 돈이 많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돈이 많으면 불행해질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 자기가 돈벼락을 맞은 사람들은 전생에 죄가 많다고 보면 된다. 그 업을 씻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훨씬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다. 대부분이 종부세 대상자라 노무현을 극도로 혐오했던 우리나라 주류층들의 단면이 이번 1억 달러 내각에 녹아 있다. 그들의 뿌리는 알다시피 친일이나 독재 세력, 또한 그들에 기생했던 재벌과 언론이다. 그들의 부도덕과 추잡함과 뻔뻔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것보다도 그들이 더 위험한 이유는 국민들의 정신과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경제만 살리면 된다구? 정말 그런가?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그렇게 부도덕하게 살아도 돈만 많으면 되는가? 그러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가? 장관도 하고, 대통령도 하고? 그리고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수를 찾고 기도만 하면 되는가? 딱 한가지만 물어보자. 진짜 그렇게 살면, 경제만은 살릴 수 있는가? 탄자니아 세렝게티 평원에 살고 있는 짐승들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 않는다. 필요 이상으로 먹지 않는다. 그래서 옛말에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란 말이 있나 보다. 한반도는 지금 세렝게티 평원만도 못한 곳으로 전락했다.
나른한 오후의 재즈 한 곡

나른한 오후의 재즈 한 곡

햇살이 따사롭다. 봄이 성큼성큼 다가온 것 같은 그런 나른함으로 온몸을 감싼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고, 나무가지가 가볍게 리듬을 타고 있다. 저 멀리 보이지 않는 해변에 갈매기가 날고, 사람들은 따사로운 햇볕을 쬐고 있다.

1월의 강(리오데자네이로)이라는 도시의 이파네마 해변. 소녀는 하늘거리는 스커트를 입고 맨발로 해변을 거닐고 있다.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머리칼 사이로 사과향이 퍼져나간다. 나른한 오후의 청량감으로 다가오는 향기. 한가롭고 평화롭다. 구리빛으로 그을린 남자들이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린다. 그녀를 보는 순간, 누구라도 사랑에 빠져버리지만 아무도 고백하지 못한다. 그녀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 눈길도 한 번 주지 않은 채 경쾌하게 해변을 걸어간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나른한 여운이 길게 남는다.

조아오 질베르토의 기타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피아노 소리에 맞춰 아스트루드 질베르토의 나른하면서도 상큼한 목소리가 실려온다. 그 뒤를 따라 온 스탄 게츠의 섹서폰 소리가 일품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나른한 봄날 오후, 보사노바의 명곡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The Girl from Ipanema)”를 듣는다. 행복은 순간순간 이렇게 스며든다.

Tall and tan and young and lovely,
the girl from Ipanema goes walking
And when she passes, each one she passes goes – ah
When she walks, she’s like a samba that swings so cool and sways so gently
That when she passes, each one she passes goes – aah

Ooh But he watches so sadly,
How can he tell her he loves her,
Yes he would give his heart gladly,
but instead when she walks to the sea,
she looks straight ahead not at him,

(saxaphone solo)

(Ooh) But he sees her so sadly,
How can he tell her he loves her
Yes he would give his heart gladly,
But each day, when she walks to the sea
She looks straight ahead, not at him

Tall, and tan, and young, and lovely,
the girl from Ipanema goes walking
And when she passes, he smiles – but she doesn’t see
She just doesn’t see, She doesn’t see, She doesn’t see……

<The Girl from Ipanema, Astrud Gilber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