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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풀의 26년

강풀의 26년

그해 봄, 나는 기숙사 방에 틀어 박혀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을 읽고, 울고 있었다. 가슴에 북받히는 분노와 슬픔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울고 있었다. 학살의 주역들은 권좌를 지키고 있었고, 우리들은 그들을 향해 돌과 꽃병을 들었다. 학교 교정은 붉은 진달래로 가득했고, 꽃들은 매캐한 최류 가스를 토해냈다. 우리들은 술마시고, 울며 노래했고, 그리고 싸웠다. 20여년 전의 일이다.

그들은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아무도 울지 않았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 않았다. 용서받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그들을 용서하지도 않았다. 광주의 오월은 26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분’은 강풀의 26년에서 암살당한다. 아무도 연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나지막히 오월의 노래를 불렀다.

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 져 흩어지고 꽃 향기 머무는 날
묘비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이렇듯 봄이 가고 꽃 피고 지도록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
해 기우는 분숫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이여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문승현, 오월의 노래>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8할은 광주의 몫이라고 나는 감히 말한다.

[audio:Nochatsa-Song_of_May.mp3]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중국은 1950년 티베트를 침략한 이후 현재까지 티베트를 강제 점령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티베트 사람들이 당한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민족도 일제 치하 36년이라는 긴 시간을 같은 고통으로 아파했으니까.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마오쩌둥의 ‘인간 해방’이라는 이념은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구속이었고, 절망이었다. 중국이 티베트를 물리적으로 점령하고 구속할 수는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마오쩌둥의 이념은 달라이 라마의 용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달라이 라마는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에서 중국을 진심으로 용서한다고 말한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움이나 나쁜 감정을 키워 나간다면, 내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 깨어질 뿐이다. 하지만 그를 용서한다면 내 마음은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용서는 단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는 상관없이, 세상 모든 존재는 우리 자신이 그렇듯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를 상처 입힌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용서를 베풀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스승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내면의 힘을 시험한다. 용서와 인내심은 우리가 절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힘이다.

미움은 강인함이 아닌 나약함의 다른 모습이다. 미움을 통해 얻어진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미움이나 분노를 통해서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 용서를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국가적, 국제적인 차원에서든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에 이르게 된다.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다.

<달라이 라마, 용서, 오래된 미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도 그의 제자 베드로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마태복음 18:21-22>

그렇다면, 나도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예수도, 달라이 라마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는 회개와 반성을 전제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