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모으기 운동”의 조건

“달러모으기 운동”의 조건

“잃어버린 10년을 찾아서…”

(써놓고 보니 무슨 소설 제목도 아니고) 어찌되었든 잃어버린 10년을 찾아서 한시도 쉬지않고 매진하는 리만 브라더스(이명박 & 강만수)와 한나라당, 그리고 조중동의 노고를 치하한다. 오늘 환율과 주가가 크로스되는, 일명 리만 크로스를 연출하느라 얼마나 밤잠을 설쳤겠는가. 지난 봄부터 말이지.

조금만 있으면 거의 10년 전의 한국으로 완전히 되돌아갈 것이다. 예상보다도 아주 빠르게 말이다. 환율은 거의 2000원을 넘나들고, 주식을 가볍게 1000선 아래로 내려가 주는 바로 그런 10년 전의 모습. 우리 국민들에게 아주 익숙한 그런 모습. 우리 국민들이 10년 전의 우리나라에 지독한 향수가 있었나보다. 그 향수를 즐기기 위해 다시 한 번 피눈물을 흘리게 생겼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이번 금융위기는 적어도 우리나라를 피해가지는 않을 것이다. 왜? 우리나라는 리만 브라더스가 있지 않은가. 현대건설, BBK, 그리고 서울시까지 가는 곳마다 부도와 파탄을 몰고 다녔던 이명박과 외환위기 초래의 달인 강만수. 이 두 사람이 있는 한 우리나라는 위기를 피할 길이 없다. 한 나라에서 같은 인물이 두 번씩이나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네스북이 알면 얼마나 놀랄 것인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이명박의 당선은 결국 대한민국의 파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슬프게도 적중하고야 말았다. 결국 쓰레기 언론과 한줌도 안되는 수구세력(친일과 독재의 후예)들을 제거하지 못한 그 업보를 이렇게 다시 한 번 받게 되었다.

이제서야 뭔가를 깨달은 듯한 한나라당의 몇몇 의원이란 작자들이 “달러모으기 운동”을 시작하자며 국민들의 염장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이런 작자들이 도대체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해진다. 어떤 사고를 하길래 저런 염장 만땅의 생각이 나올 수 있는지 의학적으로도 연구해 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아무튼 한나라당도 10년전 금모으기 운동으로 외환위기를 나름대로 극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그들에게 국민은 봉이다.

나도 지갑에 100달러 짜리 지폐가 있기는 하다. 오늘도 환율이 50원이 올라, 앉은 자리에서 5000원을 벌었다. (리만 브라더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나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만족되면, 내 지갑에 있는 100달러를 기꺼이 기부하며 달러모으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이다.

  1. 리만 브라더스의 사퇴
  2. 조중동 폐간
  3. 한나라당 해산
  4. 뉴라이트 해체 (A2 님의 제안으로부터)

이 정도 조건이면 국민들도 지난 번 금모으기 때처럼 기꺼이는 아니겠지만 달러모으기에 나서지 않겠는가.

어차피 리만 브라더스와 조중동, 그리고 한나라당이 지금처럼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위기를 피할 수는 없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겨야 될까? 아니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 우리 국민들이 밑바닥까지 철저히 깨져야 된다. 다시는 이런 아픔과 고통을 잊지 못하도록 뼈속 깊이 아니 국민들의 유전자에 새겨야 된다. 그래야만 저런 무리들이 권력을 다시 잡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이번 위기 속으로 들어가며 우리 국민들이 건질 수 있는 유일한 몫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통탄스럽지만, 그 길 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런 기나긴 절망 속에서 다시 희망의 싹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최진실 죽음의 진실(?)

최진실 죽음의 진실(?)

최진실의 자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최진실을 좋아했든, 좋아하지 않았든 수많은 국민들이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것은 사실이다. 대다수 언론들은 연일 그의 죽음을 팔기에 바쁘고, 인터넷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수구 정치 집단들은 ‘최진실법’을 만들겠다고 아우성이다. 쓰레기 언론들과 수구들이 지목한 범인은 ‘인터넷 악플’이란다. 또한, 진보라고 하는 이들도 최진실 죽음에 대해 강만수가 비판받아야 한다며 일갈했다. 다들 한 여인의 자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여념이 없다. 참으로 인간에 대한 그리고 고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는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최진실은 왜 갑자기 자살을 했을까? 경찰은 충동적인 자살이라고 결론지었다. 사랑하는 두 아이까지 둔 엄마가 왜 자살 충동을 이기지 못했을까? 정말 인터넷에서 나뒹구는 쓰레기 같은 댓글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들까지 남기고 자살을 했을까? 자기가 사채업자라고 매도당했다 해서 그것이 억울해서 죽었을까? 그렇게 억척스럽고 똑순이 같았던 여자가, 삶의 그 많은 굴곡을 견디며 살았던 그가 이 정도의 난관을 왜 견디지 못했을까?

최진실의 죽음을 ‘인터넷 악플’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은 최진실을 가장 모독하는 짓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물론, 알고도 그런다면 더 나쁜 인간들이겠지만.) 최진실이 쓰레기 악플 때문에 세상을 등질 그럴 사람이 아니다. 차리리 그 엉뚱한 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찾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하면 했지, 그런 사소한 일에 자신의 목숨을 버릴만한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아이가 있지 않은가?

경찰의 결론, 즉 충동적 자살이라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면, 최진실은 죽고 싶은 충동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최진실이 죽었던 그 순간, 그는 이성을 잃었다는 얘기다.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다. 자기의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의 우울증에 주목한다. 경찰에 따르면, 최근 6개월동안 그는 신경안정제의 복용을 늘려왔다고 한다.

최진실이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던데?
“모친에 따르면 이혼 후 몇년간 우울증으로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왔다고 하는데, 최근 6개월간 복용량이 조금씩 늘어났다고 하더라.”

<경찰 “최진실, 우울증으로 최근 신경안정제 복용량 늘여”>

그렇다면 신경안정제의 원리가 무엇일까? 신경안정제는 인위적으로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을 증가시켜 안정을 취하게 해준다. 세로토닌은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호르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신경안정제들이 세로토닌은 증가시켜 주지만, 지나친 세로토닌의 증가로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을 감소시킨다는데 있다. 도파민은 행복을 느끼게하는 호르몬이다. 때문에 최근의 한 연구보고에 따르면 신경안정제의 장기 복용은 오히려 우울증이나 자살충동을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Many depressed patients do not improve with 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 (SSRI) Antidepressants, such as Prozac, Paxil or Zoloft. Prozac and Paxil only increase serotonin and norepinephrine activity. When serotonin is increased above normal levels with medication, the brain downregulates dopamine production. Dopamine downregulation explains why some patients become suicidal on “antidepressants.”

<Antidepressants Can Increase Depression, Impulsivity and Suicide Risk by Decreasing Dopamine, Reuters>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세로토닌이 정상적인 수준보다 (인위적으로) 높게 되면, 인간의 뇌는 도파민의 생산을 줄여버린다. 이 때문에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는 환자들이 오히려 자살 충동을 이기지 못할 수 있다. 최진실은 이혼 이후 복용하던 신경안정제의 양을 최근 6개월동안 지속적으로 늘려왔다. 더군다나 사건 당일에는 촬영 후에 속이 상해 술을 많이 마신 것으로 나타났다. 신경안정제를 장기 복용하는 환자가 지나친 알코올을 섭취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약효가 지나치게 증폭될 수 있다.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세로토닌 증가로 도파민의 수준이 너무 낮아졌고, 최진실은 자신의 자살충동을 이성으로 제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자살을 했던 여자 연예인들을 보면, 대부분 공통적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그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약의 복용이 오히려 자살 충동을 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들의 죽음은 ‘신경안정제’의 과다복용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전에도 얘기했듯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약들이 그리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자살충동까지 불러일으킨다면, 이런 약들에 대한 처방과 복용은 정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광우병 위험이 제기될 때, 과학을 들이밀던 인간들이 지금 최진실의 자살에 대해서는 ‘최진실법’을 운운하며 인터넷 통제를 하려 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고인의 죽음까지도 이용하는 그런 인간들이다. 정말 귀신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왜 엉뚱한 사람들만 데려가는가.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한 제작자는 배우(俳優)라는 말을 풀어쓰면서, 한자로 배우를 나타내는 배(俳)는 사람인(人)과 아닐비(非)가 합쳐진 낱말로 “배우는 사람이 아니지만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는 엉뚱한 정의를 내렸다. 그는 이어서 배우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주로 의존한 삶을 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 비해 감수성이 아주 예민할 뿐더러 때로는 즉자적이고, 때로는 엇나간 모습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배우들은 영화나 연극 혹은 TV 연속극에서 늘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서의 연기를 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기에 때로는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헷갈릴 때도 있을 것이다. 진짜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자기를 버리고 실제로 감독이나 연출자의 지휘에 몸을 맡겨버린다. 그리고, 그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에는 자기가 아닌 그 작품 속의 인물로 살아간다고 한다. 영화 밀양에서 신애를 연기한 전도연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작품이 끝나고도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주홍글씨 촬영을 마친 이은주는 자살했다. 물론, 그 죽음이 영화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나오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배우든, 가수든 우리가 흔히 속된 말로 “딴따라”라고 부르는 광대들은 그들의 예술과 창작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그리고 행복하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삶은 순탄치 않다. 아니 행복하고 바른 광대들은 더이상 광대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의 밑바닥까지 부딪혀 보지 않고는, 그 쓰디쓴 인생의 절망을 맛보지 않고는 제대로된 광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들의 천형이라면 천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길을 간다.

한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었던 최진실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배우로서, 연기자로서, 그리고 광고모델로서 꽤나 성공한 축에 들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견뎌야했던 것들과 견딜 수 없던 것들 속에서 그는 수없이 방황했을 것이고, 그 롤러코스터 같은 삶의 끝은 그에게 너무도 갑자기 그리고 어이없게 닥쳐버렸을 것이다. 슬픔은 엄마를 그렇게 보내버린 두 아이의 몫으로 오롯이 남아버렸다. 그에게 주어진 삶이 그만큼이라는데 누굴 탓할 것인가.

최진실의 죽음은 그가 너무 유명한 스타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지만,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 35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다. 삶은 유명 배우에게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도, 돈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재벌 회장에게도 그렇게 견디기 힘들고 팍팍한 것임을, 그리하여 붓다는 삶은 고(苦)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비루하고, 고통스럽고, 쓸쓸하지만, 삶은 또 그렇게 지속된다. 스스로 세상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다음 생은 부디 편안하기를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다 행복하기를…

원래 세금은 아랫것들이나 내는 것이었다

원래 세금은 아랫것들이나 내는 것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을 아는가? 동학농민혁명의 근원지였던 고부의 그 유명한 탐관오리 조병갑. 그는 만석보를 쌓으면서 그 일을 한 농민과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그 만석보의 물을 이용하는 농민들에게 엄청난 수세를 거두었다. 농민들은 일년 내내 일을 하고도 가난에 허덕이며 끼니 걱정을 하는데도 그들은 무지막지한 세금을 거두어 갔다. 묵은 황무지를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갈아 먹으라고 해놓고는 추수 때가 되면 또 세금을 거두어갔다. 조병갑 애비의 공덕비를 세우겠다고 세금을 거두고, 대동미를 거두면 그 쌀을 하품으로 우겨서 그 이익을 몽땅 챙겼다.

조선시대 내놓으라하는 탐관오리가 어디 조병갑 뿐이었던가. 양반들은 세금도 면제였고, 군역도 면제였다. 오로지 힘없는 백성들만이 임금과 나라를 위해 일을 하고, 세금을 내고, 군역의 의무를 다했다. 한마디로 양반을 제외한 백성들만이 봉이었다. 동학농민혁명처럼 때때로 그 폭정에 항거하여 민란을 일으켜보기도 했지만, 엄청난 탄압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참수되기 일쑤였다. 그것이 우리네 백성들이 살던 고단한 삶이었다.

“백성들만이 봉”인 그 유구한 전통은 봉건제가 사라지고 민주공화국이 들어서고도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서민의 아들들은 예외없이 군대를 가야했고, 1원이라도 탈세를 했다가는 국세청의 조사를 받아야했다. 주류 특권층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군역을 피했고, 설령 탈세가 걸려 법의 심판을 받았다해도 금방 사면복권되었다.

그 유구한 전통에 딱 한 번 금이 간 적이 있었는데, 2005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3년전 쯤 참여정부가 종부세를 만들었을 때였다. 우리나라 부유층 상위 2% 정도에 종합부동산세를 물린 것이다. 난리가 났다. 백성 수탈이라는 수천 년의 전통을 자랑하던 이 땅에 처음으로 잘사는 사람들은 세금을 더 내라고 하니, 주류들은 꼭지가 돌았다. 수구신문들은 연일 세금폭탄이라고 맞섰고, 위헌이니 뭐니 지랄을 했다. 집 한채도 없는 어리석은 백성들은 종부세 대상자도 아니면서 세금폭탄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류들은 종부세 대상자가 서민이라고 우겨댔다.

참여정부의 임기가 끝나고 정권이 바뀌자 이들은 종부세를 폐지하기 위해 안달했다. 국방의 의무도 다하지 않은 자가, 수백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의료보험료를 만몇천원 내던 자가, 위장전입을 밥먹듯이 하던 자가, 자식들 위장취업을 시켰던 자가 대통령이 되자 대놓고 종부세를 없애겠다고 공헌했다. 종부세가 폐지되면 그 대통령이라는 자는 공직자 중에서 가장 많은 종부세 감면 혜택을 본단다.

이것이 반만년 역사를 가졌다는 한반도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나라, 대한민국의 특권 주류층의 모습이다. 세금폭탄, 징벌적 과세, 위헌을 운운하며 “단 한 명이라도 피해를 입으면 바로잡는 것”이 시장경제체제에서 심판의 할 일이란다. 단 한 명이라도 피해를 입으면 바로잡겠단다. 그리고 종부세 폐지로 줄어든 세수는 재산세를 올려 공평 과세할 것이란다. 참으로 자비롭고 공정한 대통령 아닌가, 2% 특권층 주류들에게는.

“그래, 세금은 원래 아랫것들, 상것들이나 내던 거였으니까” 이렇게 자위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을 밖에. 예수가 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지 알 것도 같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그런 부자들이 다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고 교인이 된단다.

참으로 아스트랄한 세상에 살고 있다.

한겨레신문의 살리에리 증후군

한겨레신문의 살리에리 증후군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는 19세기초 유명한 음악가 중 하나였다. 모짜르트만 없었다면 그는 비엔나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로 대접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살리에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천재인 모짜르트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는 모짜르트 때문에 열등감과 자괴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하여 그는 모짜르트에게 늘 시기와 질투를 느꼈고, 모짜르트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과정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후에 사람들은 모짜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를 바탕으로, 주위의 뛰어난 천재 때문에 극복할 수 없는 열등감, 시기, 질투를 느끼는 것을 “살리에리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자칭 진보정론지 한겨레신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민주주의2.0″이란 웹사이트가 영 불편한 모양이다. 한겨레는 “전직 대통령 토론 웹사이트 개설 유감”이라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그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 노 전 대통령 말대로, 민주주의에 긴요한 시민 토론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쓴다면 그걸 탓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전직 대통령이 직접 토론사이트를 개설해 운영하는 건,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논란을 확산시키며 정치적 ‘반목과 대립’만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직 대통령 토론 웹사이트 개설 유감”, 한겨레>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토론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해 보겠다고 한 것은 그가 퇴임하기 이전에 이미 세워둔 계획이었다. 그가 퇴임을 해서 “민주주의2.0″이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정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사이트가 개설되자마자 한겨레신문이 “전직 대통령의 정치 재개” 운운하며 새삼스럽게 유감이라는 사설을 날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중동이나 한나라당이 노무현의 행보를 주시하면서 민주주의2.0에 대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조중동이나 한나라당과 정치적 이해 관계가 사뭇 다른 (다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겨레가 노무현이 만든 토론사이트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한겨레는 노무현에 대한 살리에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아니, 한겨레 뿐만 아니고, 민노당이나 최장집, 손호철, 김근태 등 이른바 얼치기 진보들도 마찬가지로 노무현에 대한 살리에리 증후군이 있다. 그동안 이들이 보인 행보를 보면, 조중동보다도 노무현에게 더 적개심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노무현은 아는 바와 같이 운동권 내에서도 비주류에 불과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민주세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 이들은 내심 못마땅한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진보 세력이 오합지졸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노무현의 민주주의2.0은 이들의 위기의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진보와 민주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퇴임한 (고졸 출신의) 전직 대통령 따위가 어찌 그 자리를 넘보려고 하는가”하는 그 같쟎은 엘리트들의 우월의식이 노무현 살리에리 증후군의 본모습이다.

진정으로 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자들이라면 전직 대통령의 토론사이트 개설을 “열렬히” 환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트가 잘되도록 물심양면으로 협조하고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민주주의 발전은 부수적인 문제고 그것보다 노무현이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만약, 김근태가 이런 사이트를 내놓았다면 한겨레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설과 머릿기사를 동원해 그 사이트를 선전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당은 아니지만, 이런 것은 척보면 안다.

그런데, 문제는 김근태나 최장집이나 한겨레나 소위 그 잘난 엘리트 진보들은 노무현보다도 앞서서 이런 생각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은 그들이 불쌍한 것이다. 노무현보다 앞서고 싶은데 늘 뒤떨어지는 그들. 노무현보다 다들 좋은 학교 나왔는데, 언제나 여론은 노무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시기와 열등감. 전형적 살리에리 증후군이다.

무능한 한겨레신문의 삽질 중 전형적인 예를 하나 보자. 네이버가 포탈로서 지금과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그 중심에는 지식in이라는 서비스가 있다. 사실 그 아이디어는 한겨레신문이 2000년에 내놓은 “디비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디비딕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덜떨어진 잘난 진보들은 어느날 갑자기 그 서비스를 유료화해서 그 잘나가던 서비스를 말아먹고 만다. 결국 디비딕은 엠파스로 팔렸고, 네이버는 그 서비스를 흉내내어 지금과 같은 성공에 이르고 있다.

마케터 님이 지적한대로 한겨레나 소위 엘리트 진보들의 시기심 가득한 무능을 더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 인터넷을 기반한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하고, 새로운 언론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 중심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노무현이어야 한다. 왜? 그가 진보 세력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능력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노회한 살리에리 같은 한겨레에서 우리의 희망을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나를 부끄럽게 만든 편지 한 통

나를 부끄럽게 만든 편지 한 통

작년부터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겨 다른 이들에게 매달 조금씩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 사는 어린 아이들 2명과 우리나라의 중학생 2명에게 용돈을 조금씩 보낸다. 그것을 신청할 때는 조금 신경을 썼었고, 내가 후원하는 아이들의 사진이 왔을 때는 조금 흥분도 했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신용카드에서 매달 꼬박꼬박 자동 이체가 되기 때문에 나의 기부 행위를 내가 인지하기도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주 잊고 있었다는 얘기다.

오늘 내가 후원을 하는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왔다. 가을날의 따사로운 햇살과 같이 잔잔하면서도 평온한 그 편지가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 편지에는 온 가족의 일상이 다소곳이 묻어 있었다.

조금 나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얘기, 아이들이 새로 이사간 집을 좋아해서 친구를 데려왔다는 얘기, 텃밭에 채소를 심었다는 얘기, 그리고 아이들이 커나가는 얘기, 둘째가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다는 얘기, 막내는 누나들 때문에 여자에 대한 대한 환상이 깨져 여자친구가 없다는 얘기, 그런 이야기들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간간히 가슴이 멍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그 편지는 나를 한없이 행복하고 만들었고,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달에 몇 만원되지 않는 후원금을 낸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런 편지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내가 그 아이를 매일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후원금은 자동으로 이체되는데 내가 그런 행복과 사랑이 담긴 편지를 감당할 자격이 있을까?

그 아이의 어머니는 이렇게 편지를 맺고 있었다.

여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셔서 (저희 가족들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제게 많은 용기와 힘을 주셨네요. 앞으로도 더 노력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많은 도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 없는 그 후원이 민망했다. 나야말로 그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행복과 감동을 받은 것 아닌가. 그 어머니의 편지는 나에게 삶의 가치와 행복의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남을 돕는다는 것,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감사할 줄 알고 용서할 줄 안다는 것. 그것만큼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없다. 오늘 나는 그 한 통의 편지로 무한히 행복했고, 무한히 감사했고, 그리고 무한히 부끄러웠다.

그 아이가 어머니의 바람대로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로 커나가길 기도한다.

노무현으로 인한 착각 그리고 민주주의2.0

노무현으로 인한 착각 그리고 민주주의2.0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나는 잠깐동안 착각 속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그가 탄핵의 소용돌이를 헤쳐나오면서, 경제가 나름대로 안정되어 가고, 비록 더뎠지만 조금씩 상식이 회복되어 간다는 사실을 느꼈을 때, 그때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이제 조금씩 살만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구나, 방향을 제대로 잡기 시작했구나, 이런 자부심을 가졌다.

외국에서 오래 생활하면서도 우리나라의 걸출한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 자랑을 했었고, 2차대전 이후 제3세계 국가 중에 한국만큼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나라가 어디있냐며 떠벌였었다. 그때 내 주위에 있던 여러 외국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노무현이 물러나고, 수구들이 다시 권력을 차지해버리자 나라는 6개월도 안되어서 휘청거렸다. 민주주의는 다시 70년대 독재의 시절로 후퇴해버렸고, 경제는 거덜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성취했다는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는 너무나 뿌리가 약했다. 그 성취들은 수구신문들의 저주와 아파트 한채에 인생을 걸어버린 그 천박한 이기심을 극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니,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던 것은 기적이었고, 참여정부 시절 2~3년은 우리 역사상 극히 예외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멀리 볼것도 없이 한 100여년의 역사만을 살펴봐도 어느 때도 민중이 이기고 권력을 쟁취한 적이 없었다.

민중들이 아주 짧은 순간 승리한 적은 있지만, 궁극적으로 권력을 틀어쥔 적은 없었다. 동학혁명 때도 1년도 안되어 일본군에게 수십만 명의 농민들이 사살당하고, 전봉준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일제 치하 36년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독립운동은 중국과 만주 정도에서 명맥을 잇는 수준 아니었던가.

해방 이후 미국에 달라 붙은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패가 판을 쳤고, 김구는 암살당했다. 419혁명은 516 군부 쿠데타로 성공하지 못했고, 이후 박정희 군사 독재 18년. 1980년 민주화의 봄은 전두환 일당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87년에 610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하긴 했지만, 그 결과로 노태우와 김영삼이 연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결국 한차례 나라가 망하고서야 김대중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때도 박정희의 졸개였던 김종필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외환 위기로 나라를 거덜낸 수구정당을 쉽게 극복하지 못했다. 여전히 친일과 독재 부역으로 부를 쌓았던 수구 언론들이 위세를 떨쳤고, 나라를 거덜낸 인간들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이런 열악한 여건에서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적도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수구들과 주류들은 노무현을 탄핵했고, 결국 노무현도 무너지는듯 했다. 그가 다시 돌아오고, 이해찬이 총리가 되고, 유시민이 장관을 하던 2년 남짓한 순간, 그 순간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최소한의 상식에 근거해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찬란한(?) 5천년 역사 중에 단 2년 정도 비주류가 정권을 잡아서 상식과 원칙을 외쳤다.

그 순간이 너무 감격스러웠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착각 속에 빠졌다. 나는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역사적 당위로 우리 앞에 나타났고, 권력을 잡았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런 거지같이 초라하고 비루하고 비겁한 역사 속에서 “상식”과 “원칙”을 내세운 노무현은 비정상이었고, 왕따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나라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과분했다.

김영삼의 뒤를 이어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친일파가 여전히 판을 치고, 군부독재 세력이 여전히 득세하는 나라, 거짓말과 사기의 일인자들이 집권하는 나라, 중소기업들은 무너져 내리고, 비정규직은 거리로 내몰리는 나라, 종부세 대상자들이 서민이라고 우기는 나라, 역사적으로 볼때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나라다.

내가 노무현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이런 파렴치하고 비겁한 역사 속에서 단 한 순간 “상식”을 부여잡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초지일관 초심을 잃지 않는 단심을 가졌던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이익”보다는 “대의명분”을 위해 싸웠던 그리고 이겼던 유일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 노무현이 다시 민주주의 2.0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대통령에서 물러나서도 여전히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기에 우리는 그래도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1.0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한 이 나라에 민주주의 2.0은 너무 과분한 이름이자 목표인지 모른다. 그러나, 인터넷은 우리들의 유일한 무기이자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이며, 우리가 저들보다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우리는 인터넷 상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수준 높은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수준의 논의가 민주주의 0.1의 현실에 어떻게 이어지게 하느냐는 점이다.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정당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당원들이 주인이되고, 결정권을 갖는 그런 인터넷 기반의 정당을 만들어서 실제로 권력을 되찾아와야 한다. 기술적으로, 시스템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지만, 과연 누가 그것을 추진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노무현, 아니 그가 직접 나서지 못한다면 그의 정치노선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민주주의 2.0이 성숙한 논의를 토대로 제대로된 정당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노무현,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축복이다.

딸아이의 이빨을 뽑아주며

딸아이의 이빨을 뽑아주며

딸아이의 이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그맣고 하얀 옥수수 알갱이 같은 이빨이 흔들리니, 녀석은 몹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시간만 나면 거울 앞에 서성거리며, 손가락으로 흔들리는 이빨을 건드려 보는 것이다.

“아빠, 이 이빨 이제 이만큼 흔들린다.”

올들어 딸아이는 여덟 개의 이빨을 뽑았다. 그리고 그 중 네 개는 큼지막한 새 이빨이 다시 나고 있다. 어떤 것은 아내가 병원에 데리고 가서 뽑아주기도 하고, 어떤 것은 집에서 실을 묶어 뽑아주기도 했다. 딸아이는 여러 개의 이빨을 뽑아봤어도 여전히 이빨을 뽑을 때면 좀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실을 묶으면 다시 망설이다가, 거울 앞에서 흔들어 보다가, 다시 뽑겠다고 하다가,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이빨은 거의 빠져 있었다. 톡 건들기만 하면 그냥 빠질 수 있게 말이다.

이제 젖니를 갈고, 새 이를 갖기 시작한 딸아이. 요녀석을 낳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새 이를 가져야 하는 어린이로 자랐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 셈을 배우기 시작하고, 친구가 하나 둘씩 생기면서 이제 사회가 무엇인지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딸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참 대견하다는 것이다. 밥도 잘 먹고, 무럭무럭 그리고 명랑하게 자라는 녀석이 정말 자랑스럽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지금 딸아이의 이빨을 뽑아주는 이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아쉬움이다. 녀석은 점점 자라서 사춘기를 맞을 것이고, 쾌활한 10대를 지나 싱그러운 여자로 성장할 것이다. 결혼 전의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딸아이는 나와 아내의 품에서 떠나갈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더라도 행복하기는 하겠지만, 지금 이 아이를 품에 안고 이빨도 뽑아주고, 머리도 감겨주고, 그리고 같이 쎄쎄쎄 하면서 놀아줄 수 있는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딸아이가 크는 것이 정말 대견하면서도, 그 녀석이 너무 쉽게 자라는 것 같아 아쉬운 이 이율배반의 감정. 딸아이를 키운 부모들만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이 아닐까.

지금도 아내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이렇게 키워서 나중에 어떻게 시집을 보내지?” 딸아이가 나중에 결혼을 한다 할때도 기쁜 마음과 서운한 마음이 교차할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사위에게 넘겨주면서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딸아이의 이빨을 뽑아주면서 벌써 그런 애틋한 감정이 찾아올 거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발 뽑는 아이

매일매일 사기당하는 국민들

매일매일 사기당하는 국민들

도플갱어가 TV에 나타났다.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던 그 누군가의 분신. 생긴 것도 같고, 목소리도 같고, 이름마저 같다면? 그가 아주 우연히 대통령과의 대화라는 특별 방송에 모습을 드러냈다.

송파구 석촌동에서 자영업을 하는 장상옥 씨는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이명박의 서울 시장 때 일을 칭송하면서, 지금 대통령이 되어서는 왜 지지율이 낮아졌는지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 장상옥 씨의 도플갱어가 국토해양부의 전문위원이란다. 그 말로만 듣던 분신이라는 것이 장상옥 씨의 TV 출연으로 밝혀진 것이다.

송파구 석촌동에서 자영업을 하는 장상옥 씨와 국토해양부 전문위원인 장상옥 씨. 목소리도 같고, 얼굴도 같으면서, 동명이인인 존재. 이런 사건이 벌어질 확률이 도대체 얼마나 될 것인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대통령을 잘 뽑아놓으니 정말 해괴하고 이상한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난다. 이런 것을 사람들은 전문용어로 “사기”라고 부른다. 보통 사람들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그런데 그런 기발한 “사기”들이 매일매일 일어나니, 이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사람들은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

두 가지가 궁금하다. 하나는 내일은 또 어떤 “사기”로 국민들은 즐겁게(?) 혹은 어처구니없게 만들 것인가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도대체 국민들이 언제까지 계속 “사기”를 당하며 견딜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6개월이 지났으니 이제 10분의 1이 지난 것이다. 단 한 가지 위안은 지금도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뿐이다.

사기의 달인이 대통령이 된 대한민국은 매일매일 어처구니없는 즐거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명박 일당의 사기 행각을 까발리는 것은 인터넷과 네티즌들뿐이다. 인터넷만 없다면 완벽하게 해잡수실 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래서 그 일당들이 인터넷을 못잡아먹어서 안달이 났다.

2008년 추석을 앞두고 대한민국은 그로테스크한 초현실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다.

구글이 다른 이유

구글이 다른 이유

구글 크롬은 나온지 며칠되지 않은 새내기 웹 브라우저지만, 이미 나의 주요 브라우저로 자리잡아 버렸다. 구글 크롬은 확실히 “구글이 만들면 다르다”는 인식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녀석이었다. 빠르고, 가볍고, 단순하고, 그리고 표준을 지키면서 오픈소스로 나온 이 녀석 앞에 나는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크롬이 나오기 전, 나는 FireFox를 주로 사용했다. FireFox도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브라우저 중 하나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의 IE에 비하면 정말 우수한 브라우저다. Opera나 Safari도 FireFox에 뒤지지 않지만, 그 확장성에 있어서는 FireFox를 따를 수 없었다. 구글 크롬은 가장 어린 녀석이지만 뭔가 다른 내공이 담겨져 있다. 속도, 안정성, 보안 어느 측면 하나 뒤지지 않으면서 단순한 것이 정말 마음에 든다. 아직 확장성에 대해서 구글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가장 인기있는 브라우저가 될 것 같은 싹수가 보인다.

구글 크롬을 사용하면서, 구글이라는 기업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들이 최고의 IT 기업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물론 그들이 최고의 기술과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중요한 것을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더군다나 그들은 엄청난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다. 이 때문에 그들이 오만해 보이기도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최고다.

구글은 참으로 영리하다. 그들은 사용자의 이익과 자신들의 이익을 일치시킨다. 사용자가 느끼는 가치가 높아질수록 구글의 가치가 높아짐을 그들은 알고 있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오픈한다. 이것은 OS 시장에서 자신들만의 성을 쌓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나 우리나라 포탈 시장의 일등업체 네이버와는 확연히 다른 전략이다. 구글이 이런 오픈된 영리한 전략으로 가는 한, 나는 계속 구글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것 같다.

이미 몇 년전 부터 나온 이야기이지만, 구글은 OS 시장을 넘볼지도 모른다. 그것이 리눅스 기반의 새로운 제품이 될지, 아니면 패러다임을 달리 하는 웹기반 OS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크롬을 내놓은 것처럼 그런 깜짝쇼를 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손아귀에서 사용자들을 구해 줄 수 있는 해방군은 구글이 될 것임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