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들을 “보수”라 하는가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적을 아는 것이다. 일찌기 손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적을 알고 그들을 정확하게 규정해내는 것은 모든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일 뿐더러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친일세력과 군사독재 잔재세력을 “보수”세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조중동 같은 사이비 찌라시 신문을 “보수”신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의 신간인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를 보면 시종일관 우리 정치를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진보가 다시 권력을 창출할 수 있을지를 논하고 있다. 이런 식의 논의 전개는 연구결과의 유용성과는 상관 없이 그들에게 “보수”라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렇다면 보수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을 옹호하고 유지하려는 것인데, 정치적으로 볼 때 여기에는 상식과 민족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보수란 무조건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주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유효한 범위 내에서의 변화는 수용한다. 따라서 보수란 개념에는 어느 정도 긍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이 땅에서 “보수”라 불리는 세력들의 면면을 보자. 한나라당, 조중동, 뉴라이트 등등의 세력들에게 과연 “보수”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그들의 뿌리가 어디인가? 그들은 가깝게는 군부독재의 잔재 또는 부역 세력이고 멀게는 일제시대의 친일세력이며, 조선시대 당쟁의 주류였던 노론세력이다. 이들은 수백 년간 이 땅의 권력과 부를 장악했고, 그들만의 성을 쌓아 특권 주류세력으로 부상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법, 언론, 학계 등등 이 땅의 모든 지배 기재를 장악한 세력들이다.

과연 그들을 보수라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세력에게서 과연 민족이나 상식과 같은 개념을 찾아볼 수 있을까? 그들은 조선시대에는 조선의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개혁을 추구하는 군주를 서슴지 않고 독살하였다. 오로지 중국의 황제만을 추종하는 듯 하면서 자신들의 영달과 탐욕을 추구하였다. 힘의 균형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자, 이들은 앞다투어 나라를 팔았고 친일세력으로 탈바꿈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등 뒤에 숨어 “반공”이라는 무기로 무장하여 죄없는 양민들을 괴롭혔다. 이승만과 결탁하여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고,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앞장서 부역하였다.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이들이 정치 권력을 놓쳐본 것은 단 10년, 1998년부터 2007년까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이었다. 그들이 얘기하는 대로 과연 “잃어버린 10년”의 기간이었다. 물론 이 10년 동안에도 행정부의 권력만이 개혁세력에게 잠시 넘어왔을 뿐, 나머지 모든 지배 기재는 여전히 이들 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동물적인 본능은 누가 자신들의 적인지 그리고 누가 그 적의 핵심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수없이 쓰러져간 민주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 세력의 영악함과 간교함이 어떤지를 알 수 있다. 김구 선생을 시작으로 최근의 노무현까지 이들 세력들의 탄압으로 쓰러져간 인물들은 모두 그 시대의 가장 핵심적 민주개혁 인사였다. 노무현을 죽이고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한명숙을 공격하고 있다.

그들을 “보수”라 규정하고 “보수”라 대우해서는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고 그들을 넘어설 수 없다. 그들은 역사의 반동이고, 전형적인 기회주의 세력일 뿐이다. 그들은 친일세력이고 독재세력이고 부도덕한 부패세력일 뿐이다. 그들은 탐욕만을 추구하며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불구세력일 뿐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아직도 그들을 보수라 부를 것인가? 그들을 보수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그들의 전략에 말려든 것이고 게임은 해보나마나 한 것이다.

그들은 보수가 아니다.

MB는 MBC가 맡는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박정희의 유신 군사독재가 한창일 때,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통해 독재와 투쟁을 시작한다. 이에 놀란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에 대해 광고탄압을 자행하고, 150여명이나 되는 기자와 PD, 그리고 아나운서들이 해직을 당한다. 이른바 동아투위의 시작이다. 결국 제정신을 가진 언론인들은 그때 거의 다 거세되었고, 언론에 암흑기가 도래했지만, 해직 언론인들은 재야에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88년 한겨레신문의 창간을 주도한 이들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이었고, 지난 30여년간 언론 자유와 언론 운동을 이끄는 정신적인 힘은 거의 대부분 동아투위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박이 정권을 잡자 언론 상황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35년 전으로 급회귀해버렸다. 이명박과 박정희를 차이는 투표로 정권을 잡았는가 아니면 군부 쿠데타로 잡았는가의 차이 뿐이었다. 부도덕하고 탐욕스럽기는 매일반이었지만, 거짓말하기는 이명박이 오히려 원조 독재 박정희를 능가한다.

지금은 35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명박이 들어서자마자 한 짓은 KBS와 YTN 사장을 자기 심복으로 교체하는 일이었다. 혁명을 하든, 쿠데타를 하든 맨 처음 해야할 일이 방송국 장악인 것을 이명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명박의 당선은 극우언론들의 사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정통성 유지는 군부독재 정권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참여정부 때는 KBS 사장을 정연주라는 인물이 맡고 있었는데, 정연주 역시 동아투위 출신이었다. 정연주 사장 하에서 KBS는 신뢰도 1위의 언론으로 거듭났었다. 그러나 사장이 바뀌자마자 이들은 정권의 나팔수로 급격히 변신한다.

이제 남은 것은 MBC뿐인데, 이명박 정권은 허울좋은 민영화를 통해 MBC를 극우언론이나 재벌들의 먹이감으로 준비하고 있다. 지금 국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미디어 관련 법안이 바로 MBC를 조중동에게 넘기기 위한 사전준비인 것이다. 이명박은 자신의 당선과 정권 유지의 일등공신인 조중동을 나몰라라할 수 입장이 아니기에 어떤 무리수를 쓰든지간에 MBC를 조중동에게 넘기려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종이 신문의 몰락은 명약관화한 것이고, 조중동이 지금과 같은 언론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상파 방송을 잡아야하는 상황이다.

이명박의 이런 음모에 언론노조가 정면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특히 MBC의 젊은 노조원들이 이명박의 음모를 전세계에 고발하기 시작했다. 35년 전, 동아투위 선배들이 비장하게 자유언론실천을 선언했다고 하면, 이들 MBC 노조원들은 패기있고, 발랄하게 이명박과의 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이명박과 언론노조, 특히 MBC 노조와의 싸움은 단순히 방송국 하나를 민영화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이 아니다. 과연 이 나라가 정상적인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더 나아서는 이 나라가 숨을 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원인 것이다.

그 이름도 왜색창연한 이명박(아키히로)을 사람들은 MB라 부른다. MB의 언론장악 음모에 MBC가 나섰다. 이 싸움은 친일과 독재세력과의 싸움이고, 반민주주의와의 싸움이고, 비상식과의 싸움이다. 사필귀정이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다. MBC 노조원들을 믿고, 그들을 지지한다. 당신들 앞에는 동아투위 선배들이 있고, 당신들 뒤에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들이 있다. 타협하거나 물러서서는 안되고, 끝까지 싸워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당신들과 우리들이 살 수 있는 길이다. MBC가 마지막 희망이 되고 있다.

이제는 추기경의 죽음으로 돌려막아야 할때?

어제 저녁, 김수환 추기경이 87년의 생을 마감했다. 아침에 일찍 KBS를 보니 온통 추기경의 죽음에 대한 뉴스 뿐이었다. 처음 서너 꼭지야 그렇다해도 10여분이 넘게 추기경의 죽음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니 점점 지겨워지다가 마침내, 혹시 푸른 기와집에서 또 돌려막기 지령이 내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추기경이 얼마나 높은 자리인지 잘 알지 못한다. 또한, 그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헌신해 왔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사제들은 진정한 종교인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박정희 시절 탄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섰던 지학순 주교의 이름을 또렷히 기억한다.

지난 성탄절에 이명박이 김수환 추기경을 문병 갔을때,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이 대통령은 김 추기경에게 “교회에서 성탄예배를 보고 오는 길”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이에 김 추기경은 “이렇게 누워서 맞게 돼 좀 미안하다. 바쁘신 대통령께서 이렇게 오셔서 감사하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김 추기경은 특히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대통령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내가 참 힘이 난다”며 격려했다.

[김수환 추기경 "대통령 말들으면 힘난다", 한국경제신문]

지난 시절 김수환 추기경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내가 잘 모르지만, 이제 병원에 누워있던 추기경은 이명박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힘이 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명박의 목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고 구역질이 올라오는데, 추기경은 힘이 난단다. 문병 온 사람에 대한 인사치레인지, 아니면 너무 나이가 들어 판단력이 흐려진 것인지도 모르고, 그도 아니면, 원래 이명박 같은 특권층을 좋아한 사람이지도 모른다.

용산참사를 강호순 사건으로 돌려막겠다던 이명박 정권이 이제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으로 위기를 모면할지 모른다. 이제 정권의 주구가 되어버린 KBS가 온종일 추기경의 삶과 죽음에 대해 방송을 해댈 것이고, 조중동은 온 지면을 추기경 이야기로 도배를 할 것이다. 용산참사와 강호순을 이용한 여론조작으로 궁지에 몰렸던 이명박이 한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혹 저 세상에서 용산 참사로 먼저 가신 철거민 양반들을 만나거든, 빈말이라도 “미안하다”라고 한마디 하고, 그들을 위로해 주시라. 추기경에게는 힘을 주던 이명박의 말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강기갑을 지켜내야 하는 이유

18대 국회가 당연히 막장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은 지난 해 봄 총선이 끝난 바로 직후였다. 수구 정당 한나라당이 170석을 넘었고, 그에 못지 않은 수구 정당 자유선진당이 18석, 친박연대라는 해괴한 이름을 가진 한나라당 샴쌍둥이가 8석으로 국회의 3분의 2가 수구들로 득시글거렸다. 게다가 무늬만 야당인 민주당이 80여석, 그리고 잘난 진보 민노당은 17대에 비해 반으로 줄어든 5석에 불과했다.

이런 “똥덩어리” (강마에 버전으로) 국회를 만든 우리 국민들의 저력(?)에 대해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생긴 결과가 아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파고들면 그들의 영향이 없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직접적으로는 국민들의 무관심과 탐욕이 빚은 불행한 결과다. 수구세력 지지자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깊이 반성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쓰레기장에서 장미꽃이 핀다고 이런 막장 18대 국회를 만든 국민들이 용서받을 수 있다면 그 이유는 강기갑이라는 인물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정말 경남 사천의 유권자들에게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들이야말로 18대 국회 유일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을 국회로 보내주었다.

나는 민주노동당 당원이 아니고, 그 당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참여정부 시절 민노당이 보여주었던 정치력 부재와 그동안 민노당의 간판이라 불려왔던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등에 깊이깊이 실망했던 사람이다.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은 좌파 인텔리일지언정 그들은 노동자 농민이 아니다. 그들은 머리와 말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말했듯이) 그들은 스키머(Schemer)이고, (김근태, 문국현이 그렇듯이) 그들은 껍데기다.

내가 민노당을 지지하지도 않으면서 강달프 강기갑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현재 18대 국회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이 땅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에게 말이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자신의 노동으로 가치를 생산하고 창조하고 그러면서도 늘 고달프게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말이다. 강기갑의 어깨에 수백만 농민들의 그리고 천만 노동자들의 한과 기대와 염원이 걸려 있다.

강기갑은 평생 농민으로 살아왔다. 그는 그의 두손으로 흙을 일구고, 곡식을 키우면서 살아온 사람이다. 지금은 정치인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뼛속 깊이 농민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투박하고, 거칠고, 어눌하고, 세련되지 못했지만, 그는 정직한 손을 가지고 있고, 노동의 의미를 온몸으로 알고 있다. 이 지점에서 강기갑은 말로만 정치를 하던 기존 좌파 인텔리들과 극명하게 구별된다.

조중동,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수구들은 본능적으로 누가 그들의 주적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의 주적을 숙청하기 위해 악랄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공격한다. 대단한 능력이다. 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이해찬 등이 끊임없이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들이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자, (노무현은 여전히 그들의 밥이지만) 이제 그 화살이 강기갑을 향하고 있다. 강기갑은 현재 수구들의 눈엣가시다.

한나라당은 강기갑의 사퇴결의안을 준비하고, 국회사무처는 강기갑을 고발한단다. 검찰은 법원에서 나온 1심 결과가 너무가볍다며 어떻게 해서든 강기갑을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에서 끌어내려 하고 있다. 조중동은 연일 강기갑에 대해 폭력사범으로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다.

수구세력 지지자들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에는 현재 강기갑이 필요하다. 그는 현재 대한민국 국회를 구할 수 있는 단 한명의 의인이다. 수구들의 표적이 된 강기갑을 지켜야 한다. 당신이 노동자, 농민, 서민이라면 강기갑에게 힘을 보태주어야 한다. 지금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끌고가는 이 나라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강기갑을 끌어안아야 한다.

나는 노무현, 유시민에 이어 세번째로 강기갑을 후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국회에서 정정당당히 의정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저 탐욕에 찌든 한나라당과 수구세력에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릴 수 있도록 그를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이다.

강기갑 의원에게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데, 다음에는 저 박계동이의 면상에 국민의 이름으로 정의의 고무신을 날려주시길 바란다. 룸싸롱에서 여종업원 가슴이나 만지던 자가 국회사무처장이라니. 이런 자들 때문에 대한민국 국회는 하염없이 막장으로 치닫는 것이다.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온다…

우연히 김규항이 프레시안에 쓴 칼럼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를 읽었다. 김규항을 비롯한 좌파들의 생각이 어떤지 대강은 알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사실 이런 류의 글들은 그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명박과 한나라당, 그리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수구 극우들을 지극히 이롭게 한다. 따라서, 이런 글들은 좋은 세상을 오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좌파들의 주장은 신자유주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공공의 적이므로, 신자유주의가 없어지지 않고는 좋은 세상이 오지 않는다로 요약될 수 있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다시 말해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극복될 수 없는 모순을 갖고 있다. 필연적으로 양극화는 심해질 수밖에 없으며, 인간들은 무한 경쟁의 정글로 향하게 되고, 우리가 바라는 인간적인 삶은 도태되어 버린다. 자본주의가 극복되고, 거의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것이 사회주의일까? 이론적으로는 사회주의가 맞겠지만, 현실적으로 인간이란 종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좌파들의 또다른 주장은 이명박이나 노무현이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고 본다.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도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바마나 부시나 다를 것이 없다고 얘기한다.

이를테면 “모든 게 이명박 때문” “이명박만 없으면”이라는 ‘시대의 신학’이 목표로 하는 세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명박 이전에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훨씬 더 민주적이며 개혁적인 정권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사회 진보 운동의 목표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인가? 물론 진보적이되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야 ‘이명박이라는 짜증나는 인간’만 사라져도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대개의 사람들은 이명박이 물러나고 김대중이나 노무현 시절로 되돌아간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

[김규항, "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이 지점에서 나는 좌파들과 결별할 수 밖에 없다. 김규항의 질문에 내가 답하자면, 이명박이 없어지면 이명박이 없어진만큼 좋은 세상이 온다. 한나라당이 사라지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이 된다. 조중동이 폐간되면, 우리 사회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2배쯤 좋은 사회가 된다. 물론, 그 좋은 세상이란 것이 좌파들이 얘기하는 궁극적인 사회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후진 사회는 아니란 얘기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유모차를 끌고나가 촛불을 켤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대운하 같은 정신 나간 짓거리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돈많은 부자들은 지금보다 더 세금을 많을 냈을 것이며, 복지 예산은 지금보다 조금 더 늘어났을 것이다. 이명박이 없었다면, 아이들은 조금 더 행복한 세상에서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중동이 없었다면, 이명박 같은 사기꾼이 절대 대통령으로 뽑히지 않았을 것이다. 조중동이 없었다면, 지금쯤 더 이상 북한 퍼주기 얘기는 안나왔을 것이다.

좌파들이 원하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이 권력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조중동은 폐간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이명박과 한나라당과 투쟁해야 하며, 조중동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상식과 토론이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명박과 조중동을 놔두고, 신자유주의와 싸우자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이념은 반대지만, 이명박과 같은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신자유주의가 힘을 못쓰고 하려면, 일단 이명박과 조중동이 사라져야 한다.

좌파들은 이 사실을 당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노무현을 까대던 진보 학계의 거두 최장집이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별 말이 없다. 대부분의 좌파들이 그렇다. 좌파들은 왜 이명박이나 조중동보다 노무현을 더 싫어했을까? 왜 그랬을까? 노무현이나 이명박을 동일시하는 그런 좌파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좌파들의 말을 실현하는 길은 혁명을 하는 것밖에 없는데, 내가 보기에 이 지구상에서 2008년 혁명이 가능한 나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길 밖에 없지 않을까? 그들이 진정 평등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원한다면 말이다.

나는 이명박 정권보다 노무현 정권 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부시보다는 오바마가 나을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이다. 노무현이나 오바마를 성공시키고, 그 다음에는 그들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인물들을 선택해 나가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민노당이 제도권으로 들어온 것이 언제였는가? 노무현 정부 때 아니었는가? 내가 노무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단 한걸음 우리가 원하는 사회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좌파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보였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야 우리는 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미국도 흑인 대통령이 나오기까지 200년이 넘게 걸렸다. 오바마가 얼마나 진보적 인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200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비주류인 흑인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는 사실. 역사는 참 더디게 흐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좌파들이 열걸음을 원하는데 노무현은 단 한걸음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좌파들은 그 한걸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한걸음이 눈물이 나도록 소중하다. 오바마가 당선되었다고, 흑인들의 삶이 당장 나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리고 나에게는 그 오바마의 한걸음이 중요하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없어지면 우리는 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조중동이 없어지면 우리는 두걸음을 내딛을지도 모른다. 이명박과 싸우지 않고, 조중동과 싸우지 않고, 신자유주의 타파를 부르짖는 것은 거짓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한겨레, 소중하지만 참 어이없는

몇달 전 한겨레신문 어느 지방 영업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겨레21을 구독해 달라는 부탁 전화였다. 예전 같았으면 기꺼이는 아니었겠지만, 도와주는 차원에서라도 구독을 했을 것이다. 대학시절, 그 용돈 궁하던 시절에도 “말”지를 몇년씩 보았던 내가 한겨레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겨레가 초심을 잃고, 그 논조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구독하지 않겠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언제부턴가 한겨레는 “가재는 게편”이라고 조중동의 가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논조는 민노당에 가까웠지만, 언론 밥그릇 문제만 나오면 가재가 되어버렸다. 대통령의 말투를 문제삼기 시작했고, 몇몇 얼치기 진보들을 끌어다가 참여정부 공격에 열을 올렸다. 그런 한겨레가 조중동보다도 더 어이없을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만약 당신이 단 하나의 신문을 꼭 봐야 한다고 한다면, 아직까지도 나는 주저없이 한겨레를 택할 것이다. 한겨레에 대한 비판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조중동문 같은 쓰레기 신문들과는 다를 거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최소한의 기대는 남아 있다.

한겨레는 이번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을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보도하고 있다. 다른 모든 언론들과 포털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지금, 한겨레만이 이 사건에 대해 심층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런 경우 한겨레는 한국 언론의 유일한 희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겨레의 노력이 삼성 비자금 사건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소중하다. 칭찬해 주고 싶다.

하지만, 한겨레의 몇몇 기사를 보면 여전히 어이없기는 매한가지다. 여현호 논설위원의 “이명박이 무너지지 않는 까닭”이라는 칼럼을 보면, 정말 몰라서 이렇게 쓰는 건지, 아니면 알고도 일부러 이렇게 쓰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다.

그보다는 ‘이명박의 반대편’에서 이유를 찾는 게 빠를 것 같다. 단순화하면, 문제가 많다는 이 후보가 여전히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것은, 그에 대한 불신과 불안보다 그 ‘반대편’에 대한 반대와 혐오가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선거란 게 애초 차악(次惡)이 누군지를 찾는 일인 탓이다.

정말 우리나라 국민들이 이명박보다 이명박 반대편에 대해 더 혐오할까. 모든 사실이 제대로 보도되고 국민들이 이명박에 대해 신정아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는데도 이명박을 지지한다면 그건 이명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에게 더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우리나라 언론들이 이명박의 의혹과 비리에 대해 신정아 보도의 10분의 1만 했더라도 이명박은 벌써 낙마했을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이명박이 차악인가? 객관적으로 이명박은 최악의 후보다. 이명박은 이회창보다도 훨씬 질이 낮은 후보다.

여현호 논설위원이 이런 글을 쓰기 2주 전쯤, 나도 이명박의 지지율이 저렇게 높은 이유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내 글이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여현호 논설위원의 글보다는 핵심을 짚었다고 생각한다. 한겨레의 논설위원이 일개 블로거보다도 분석 능력이나 문제 파악 능력이 떨어진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명박에 대한 심층 취재와 보도는 언론의 의무다.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온 사람에 대해 언론이 검증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나같은 블로거가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한겨레는 진작 이명박의 의혹에 대해 사운을 걸고 취재를 했어야 했다. 적어도 한겨레가 조중동처럼 이명박에 줄을 서지 않았다면 말이다.

지금 한겨레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와 순발력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명박에 대해 철저히 취재하고 검증하길 바란다. 이명박의 지지가 높은 이유는 한겨레 같은 언론이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겨레의 분발을 촉구한다.

종이 신문을 많이 읽으면 공부를 잘한다?

종이 신문을 많이 읽으면 공부를 잘 한다고 조선일보가 보도했다. 최영재 한림대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보도한 이 기사는 우리나라 신문과 연구자들이 어떻게 대중을 우롱하고 호도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장사해 먹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하겠다. 기사는 “평소에 신문을 열심히 읽는 대학생은 사회지식도 많고 공부도 잘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다음과 같이 최영재 교수의 말을 인용한다.

논문에서는 “연구 결과 종이신문 읽기는 지식 습득과 민주주의 의식 향상 효과가 동시에 나타났다”면서 “종이 신문은 인터넷 등 어떤 뉴미디어 매체로도 채워질 수 없는 문화적 자산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문 읽기 운동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팀이 서울·대구·강원·전북의 대학생 12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종이신문을 하루 평균 30분 이상 읽는 중(重)이용자는 16%, 6~29분 읽는 경(輕)이용자는 22%, 5분 이하 읽는 비(非)이용자는 62%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지난 2년간 평균 학점을 비교하면 4.5점 만점에 중 이용자 3.69점, 경이용자 3.57점, 비이용자 3.55점 순이었다.

[“신문 많이 읽는 대학생, 학점도 높아”, 조선일보]

이 연구는 학생들의 종이 신문 읽는 시간과 학점의 연관성을 분석한 것인데, 연구자인 최 교수팀은 두 변수의 상관관계(correlation)을 분석해 놓고, 해석은 인과관계(causation)으로 해 버리는  아주 기가 막힌 우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종이 신문을 많이 읽으면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의 특징 중 한 가지가 신문을 상대적으로 많이 읽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전체 논문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의 과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연구의 결론은 잘못내려진 것이다.

상관관계 분석은 두 변수가 어떠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고, 인과관계 분석은 두 변수의 연관성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최영재 교수팀의 논리대로라면 “아침식사를 거르지 않으면 성적이 좋다” 또는 “머리를 단정하게 깍으면 공부를 잘한다”라는 논리도 가능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침을 거르지 않는다는 것과 머리가 단정한 것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특징일 뿐이다. 공부를 잘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다.

최영재 교수팀은 종이 신문이 인터넷등 어떠한 매체로도 채울수 없는 문화적 자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이 논문의 연구비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대강 짐작할 만하다. 종이 신문에 나오는 모든 기사들을 인터넷으로 다 볼수 있는데 종이 신문에 무슨 문화적 가치가 있을까? 지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광고 말고 무엇이 더 있는가.

최 교수팀에 딱 한 가지 동의하는 것은 종이 신문을 읽으면 민주의식이 고양된다고 한 부분이다. 조중동 같은 반민주, 반민족, 반통일 신문들을 보면 세상을 저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하는 타산지석의 교훈은 얻을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종이 신문은 되도록 보지 말자. 쓰레기 신문들이 하루에도 천만 부 이상 발행되니 그 얼마나 종이 낭비가 심각할 것인가. 하루에도 웬만한 숲이 하나씩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종이 신문들에 실리는 기사는 종이 그 자체보다도 가치가 없으니 종이를 아끼는 차원에서 종이 신문을 읽지 말자. 대신 필요하면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도록 하자.

조중동 같은 종이 신문을 많이 읽으면 사람이 이상해지게 된다. 정상적인 사고가 쉽지 않게 된다. 종이를 아끼는 차원에서도 종이 신문을 보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