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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소요유

강풀의 26년

강풀의 26년

그해 봄, 나는 기숙사 방에 틀어 박혀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을 읽고, 울고 있었다. 가슴에 북받히는 분노와 슬픔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울고 있었다. 학살의 주역들은 권좌를 지키고 있었고, 우리들은 그들을 향해 돌과 꽃병을 들었다. 학교 교정은 붉은 진달래로 가득했고, 꽃들은 매캐한 최류 가스를 토해냈다. 우리들은 술마시고, 울며 노래했고, 그리고 싸웠다. 20여년 전의 일이다.

그들은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아무도 울지 않았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 않았다. 용서받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그들을 용서하지도 않았다. 광주의 오월은 26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분’은 강풀의 26년에서 암살당한다. 아무도 연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나지막히 오월의 노래를 불렀다.

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 져 흩어지고 꽃 향기 머무는 날
묘비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이렇듯 봄이 가고 꽃 피고 지도록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
해 기우는 분숫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이여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문승현, 오월의 노래>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8할은 광주의 몫이라고 나는 감히 말한다.

[audio:Nochatsa-Song_of_May.mp3]
“Our food should be our medicine.”

“Our food should be our medicine.”

현대 의학 (서양 의학) 의 시조로 추앙받는 그리이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Everyone has a doctor in him or her; we just have to help it in its work. The natural healing force within each one of us is the greatest force in getting well. Our food should be our medicine. Our medicine should be our food. But to eat when you are sick, is to feed your sickness.

모든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병을 낫게 하는 힘이 있다. 병을 치유하는 주체는 환자가 되어야 하고, 의사는 환자를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자연치유력이 병을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우리의 음식이 약이 되어야 하고 약이 음식이 되어야 한다. 약과 음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히포크라테스에 의하면, 병을 치유하는 것은 자연치유력을 복원하는 것이고, 복원의 수단은 음식이라는 것이다. 음식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

현대 서양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되새겨 보아야 할 말이다.

너무 멀리 오다

너무 멀리 오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향수(鄕愁)]

내일이 추석이다. 고향의 정겨운 풍광들이 그리워지는 때다. 길가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뒷산 언덕배기에 떨어져 있는 밤송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그리고 연하게 푸른 하늘, 안부를 묻는 친척들의 느린 사투리, 할아버지 묘소의 고즈넉한 침묵, 끈질긴 생명력의 잡풀들, 앞 산으로 구불구불 사라지는 마을 길. 이렇게 그리운 것들을 떠나 나는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정지용의 향수를 이동원 박인수의 목소리로 들으며, 고향의 품 속으로 되돌아간다. 부모님이 보고 싶다.

반기문

반기문

나는 반기문 장관을 잘 모른다. 그의 인생의 궤적을 살펴본 바도 없고, 사실 그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가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 외교 보좌관과 외교부 장관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보필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내 짐작으로 그는 전문 외교관으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사람인 것 같다. 그리 개혁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도와 묵묵히 일하는 것으로 봐서는 꽤 성실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같이 일한 상관의 뒷통수를 치고 자신의 영달을 추구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인다. 무치족들은 지난 4년간 노무현 정부의 외교를 “등신 외교” 또는 “왕따 외교”라고 끊임없이 폄하해 왔다. 그 등신 외교, 왕따 외교의 수장이 차기 유엔사무총장으로 내정되었다. 왕따 당하는 나라의 등신 외교를 책임지는 사람을 유엔사무총장으로 선출한 다른 나라들을 무치족들은 무어라 부를까 궁금하다. 한 나라의 외교도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왜곡하고 폄하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이 무치족인 것이다. 반기문 장관의 유엔사무총장 내정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무치족

무치족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보수라 스스로 떠드는 사람들 중 대개는 보수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보수라 함은 나라와 민족의 안위를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 먼저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보수라 스스로 일컫는 사람들의 뿌리는 멀리는 친일 세력이고, 가까이는 군부 쿠데타 세력들이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무임승차한 후 그 열매만을 한없이 누리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얼굴이 두껍고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여 나는 이들을 무치족(無恥族)으로 부를란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족속들이라고.

Blog Usability: Top Ten Design Mistakes

Blog Usability: Top Ten Design Mistakes

Jakob Nielsen은 Usability 분야의 대가 중의 한 사람이다. 내가 웹 디자인에 관심이 있을  때 그의 웹사이트 useit.com 을 매일 들락거렸다. 1년 전쯤 그는 블로그 Usability에 관한 범하기 쉬운 열 가지 실수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가 말한 열 가지 실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No Author Biographies
  2. No Author Photo
  3. Nondescript Posting Titles
  4. Links Don’t Say Where They Go
  5. Classic Hits are Buried
  6. The Calendar is the Only Navigation
  7. Irregular Publishing Frequency
  8. Mixing Topics
  9. Forgetting That You Write for Your Future Boss
  10. Having a Domain Name Owned by a Weblog Service

이 기준에 맞춰 내 블로그를 평가해 보면, 일단 블로그 주인에 대한 소개와 사진이 빠졌으므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섯 번째 사항은 아직 블로그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해당 사항 없다. 이 블로그는 달력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여섯 번째 이야기도 해당하지 않는다. 아홉 번째로 지적한 것은 글을 쓸 때 보다 신중하라는 것. 비록 블로그가 개인의 필요와 만족을 위해 쓰인다 해도 언제 누가 글을 볼지 모르므로, 한 번 더 생각하라는 것이다. 새겨 볼 말이다. Jakob의 기준에 의하면 이 블로그는 현재 80 점이다.

진리

진리

성경이나 불경, 그 밖의 다른 종교의 경전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모든 경전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이며, 그것을 가르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유대교의 여호와나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이슬람교의 알라는 모두 같은 이의 다른 이름이다. 이미 수천 년 전 힌두교의 경전, 리그 베다는 이것을 분명히 못 박았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리그 베다 1:164:46>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 존중하지 않고 자기의 신앙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독선은 대개 사이비라고 말할 수 있다.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중국은 1950년 티베트를 침략한 이후 현재까지 티베트를 강제 점령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티베트 사람들이 당한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민족도 일제 치하 36년이라는 긴 시간을 같은 고통으로 아파했으니까.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마오쩌둥의 ‘인간 해방’이라는 이념은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구속이었고, 절망이었다. 중국이 티베트를 물리적으로 점령하고 구속할 수는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마오쩌둥의 이념은 달라이 라마의 용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달라이 라마는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에서 중국을 진심으로 용서한다고 말한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움이나 나쁜 감정을 키워 나간다면, 내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 깨어질 뿐이다. 하지만 그를 용서한다면 내 마음은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용서는 단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는 상관없이, 세상 모든 존재는 우리 자신이 그렇듯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를 상처 입힌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용서를 베풀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스승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내면의 힘을 시험한다. 용서와 인내심은 우리가 절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힘이다.

미움은 강인함이 아닌 나약함의 다른 모습이다. 미움을 통해 얻어진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미움이나 분노를 통해서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 용서를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국가적, 국제적인 차원에서든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에 이르게 된다.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다.

<달라이 라마, 용서, 오래된 미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도 그의 제자 베드로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마태복음 18:21-22>

그렇다면, 나도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예수도, 달라이 라마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는 회개와 반성을 전제로 한다.

최장집, 강준만, 그리고 이한우

최장집, 강준만, 그리고 이한우

최장집은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했던 우리나라 진보학계의 대표적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다. 조선일보는 그를 낙마시키기 위해, 그의 제자 이한우를 이용하여 그를 빨갱이로 몰아 버린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격분했고, 강준만 같은 이는 이한우를 가리켜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청부업자”라고 일갈했다. 1999년의 일이다. 나는 그때 정말 이한우만 나쁜 놈인 줄 알았다.

노무현 정부 들어 강준만이 커밍 아웃해 버리고, 드디어 최장집마저 정체를 드러냈다. 경향신문 창간 6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최장집은 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없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의 칼 꽂는 솜씨는 제자 이한우보다 한 수 위였다.

대부분 진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이념을 절대 시 한다. 그리하여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과는 끝없이 분열한다. 이념의 다름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념은 절대 기준이 아니다. 많은 기준 중 하나일 뿐이다.

“The things you own, they end up owning you.”

“The things you own, they end up owning you.”

영화 Fight Club (1999) 은 David Fincher의 역작이다. 이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TYLER: I mean, you did lose a lot of nice, neat little shit. The trendy paper lamps, the Euro-trash shelving unit, am I right?
(Jack laughs, nods. He shakes his head, drinks.)
TYLER: But maybe, just maybe, you’ve been delivered.
JACK: (toasts) Delivered from Swedish furniture.
TYLER: Delivered from armchairs in obscure green stripe patterns.
JACK: Delivered from Martha Stewart.
TYLER: Delivered from bullshit colors like “Cobalt,” “Ebony,” and “Fuchsia.”
(They laugh together. Then, silence. They drink.)
JACK: Insurance’ll cover it.
TYLER: Oh, yeah, you gotta start making the list.
JACK: What list?
TYLER: The “now I get to go out and buy the exact same stuff all over again” list. That list.
JACK: I don’t… think so.
TYLER: This time maybe get a widescreen TV. You’ll be occupied for weeks.
JACK: Well, I have to file a claim…
TYLER: The things you own, they end up owning you.

네가 가진 것들이 결국은 너를 지배하게 될 거다. 공교롭게도 이 말은 이 영화가 나오기 30년 전쯤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수필에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법정, 무소유, 범우사>

영화 Fight Club의 Tyler Durden은 법정 스님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이지만 – Tyler는 자신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 911 같은 테러를 시도한다. – 소유에 대한 생각은 역설적이게도 똑같다. 버리면 버릴수록 더 자유로워진다. 진리는 참으로 단순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행하기는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