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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안도현

청첩장

청첩장

새해 들어 두 장의 청첩장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두 장 모두 안도현의 시가 적혀 있다.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요즘 젊은이들도 사랑에 관한 안도현의 시를 많이 읽나 보다. 특히, 안도현의 <사랑한다는 것>은 결혼 전에 아내가 보내 준 시다.

청첩장을 받아 보니 풋풋했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세월이 살과 같이 흘렀다.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안도현, 사랑한다는 것 中에서>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中에서>

그 젊은이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9월이 간다

9월이 간다

시인은 9월에 대해 이렇게 읖조렸다. 9월이 오면 강물이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 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남겨 둘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인의 바람과는 달리 9월은 슬픔과 분노와 아쉬움만을 남긴 채 가버렸다. 일년 중 가장 풍성한 때인 한가위가 있었음에도 9월은 도무지 신명도 즐거움도 없이 그렇게 가버렸다. 추석 전 날, 아이들을 위해 늘 노심초사 봉사하던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사악한 검찰 집단에 의해 구속되었다. 추석이 지나자마자 7개 저축은행들이 영업 정지를 당했고, 그 저축은행에 돈을 예금한 서민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추악한 권력 비리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민노당과 참여당의 진보 통합 노력이 좌절되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꿈꿔왔던 대중적 통합 진보 정당의 출현이 불발된 것이다. 이정희 대표와 유시민 대표가 안쓰러웠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의 희망이 속시원하게 실현된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그런 바람과 희망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바람들은 아름다운 것이고, 인간들은 늘 그런 바람과 희망이 실현되길 기도하는지도 모른다.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 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 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머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노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 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안도현, 구월이 오면>
9월이 가고, 10월이 온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아무리 사랑하고 아껴주는 남녀지간이라도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 아주 가끔 가다 평생 부부싸움 한 번 하지 않았다는 불가사의한 부부들을 만나곤 하는데, 나의 경험을 비춰 보았을 때 그들의 증언은 너무나 초현실적이어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몇 십년 간 같이 살을 맞대고 산 부부라도 가끔 말다툼을 하는데, 그런 것조차 없다면 그 부부들은 이미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새해 들어서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딱 한 번 나를 열받게 했는데, 사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아내가 나를 열받게 하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아내는 나를 “밴댕이”라 놀려댄다. 대개의 여자들이 남자들을 비아냥거릴 때 가장 자주 쓰는 말 중의 하나가 이 “밴댕이 소갈딱지”인데, 이것도 여자들이 남자들을 틀짓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이다.

남자는 대체로 아량이 넓어야 하고, 이해심도 많아야하고, 대범해야 한다는 일종의 선입견 때문에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로부터 밴댕이라고 손가락질 당하지만, 사실 남자들 중에서 (나처럼) 꽤나 소심한 사람들이 여자 못지 않게 많다. 그 소심한 남자들은 여자들처럼 잘 삐지기도 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사소한 일에도 열받곤 한다. 그런 남자들을 일방적으로 밴댕이라 몰아부치는 것은 그들을 너무나 억울하게 만드는 일임을 여자들은 알까?

안도현의 시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을 읽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가, 정작 분노해야 할 것에는 침묵하면서 사소한 것들을 참아내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 느껴져 씁쓸했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확인란에
내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작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받는 것이다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가지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열받는다
죽 한그릇 얻어 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다
열받아도 열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안도현,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2년 동안 7명의 여자들을 죽였다는 어떤 싸이코패스가 잡혔는데, 인간이라는 탈을 쓰고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지른 그런 자에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철거민들이 과격 시위를 한다고 하룻밤 사이 6명의 사람을 불 속에서 태워 죽게 한 어느 경찰청장과 그런 청장을 처벌하면 어떻게 법질서를 세우겠냐고 게거품을 무는 또다른 싸이코패스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친일과 독재에 부역했던 그런 자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산다는 것 자체가 나를 무척 열받게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블로그질이나 하고 있는 나에게 무진장 열받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세상 살기가 이리 쉽지 않은 것일까? 나는 살기 어려운 세상에 또다시 열받고 만다.

안도

안도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 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안도현, 연애 편지>

십여년 전 노트에 베껴 썼던 안도현의 연애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아직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도 되었던 나의 행운에 안도하며, 지금 다시 연애 편지를 쓴다면 어떤 내용이 될까 생각해 본다. “집착하지 마라. 집착하지 마라. 집착하지 마라.” 하지만 이것은 연애 편지가 아닌데… 이제 더이상 연애 편지를 쓸 수 없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