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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예수

행복하게 사는 방법, “함께 비를 맞자”

행복하게 사는 방법, “함께 비를 맞자”

예수는 삶의 진리를 참으로 쉽게 말씀하셨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율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모든 마음과 모든 목숨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계명이다.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인데 이것도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마태복음 22:37-40>

결국 삶이란 신과 나와의 관계,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 것이고, 예수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셨다. 비단 예수 뿐만 아니고, 부처나 다른 종교의 성인들도 모두 예수와 같은 가르침을 전파하셨다. 이것이 우리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진리다.

그렇다면 다른 이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신영복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함께 맞는 비>

다른 이를 배려하지 않고 다른 이의 처지를 사려 깊게 생각하지 않고 우산을 들어주는 것은 그냥 동정일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이를 돕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다른 이의 처지를 살피고 도와야 한다. 그것이 서로로 인해 서로가 행복해지는 삶이다. 결코 물질이 채워줄 수 없는 그런 행복이다.

진리는 참으로 단순하지만 행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납치되었다 한다. 그 젊은이들은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러 그 위험한 지역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추측컨대 그들 대부분은 착하고 순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일게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슬람 지역 같이 다른 종교를 믿는 곳에서의 선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종교가 있지만, 그 중 기독교의 배타성은 으뜸이라 하겠다. 다른 모든 종교를 우상 숭배라고 폄하하면서 하나님만이 모든 죄를 사하고 구원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도 천국에 갈 수도 없다고 한다.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형제 종교들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나 유대교의 여호와나 이슬람교의 알라는 부르는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신이다. 그들이 인정하는 선지자들이 다를 뿐 그 뿌리는 한군데이다.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유대교를 믿는다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들이 얘기하는 신은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자신들의 종교만이 옳은 종교이고, 다른 종교들은 모두 이단이고 사교이고 우상 숭배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은 계속될 것 같다. 물론 납치가 옳다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의 종교 활동 자유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에 대한 예의는 갖추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겨레신문의 ‘한국=기독교 선교’ 인식 탓 피해 가능성이란 기사를 보고 나는 정말 놀랐다.

한국 개신교 신자 1300여명은 지난해 8월 아프간에서 축제를 벌이려다가, 추방 직전에 행사를 취소한 바 있다. 당시 아프간 대통령까지 나서 추방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2002년부터 3년 동안 카불에서 봉사했던, 한국제이티에스의 유정길씨는 “선교단체들이 심지어 무슬림사원에서 통성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을 공표하기도 했다”며 “이를 통해 한국인들이 모두 개신교 선교사로 인식돼 한국인들이 테러의 표적이 떠올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무슬림 사원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통성 기도를 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그 나라 사람들은 어떤 눈으로 보았을까. 정말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러 온 사도들로 보았을까? 아닐 것이다. 자신들의 종교를 부정하고 파괴하러 온 침략자들로 보았을 것이다.

다른 종교를 부정하고 오직 기독교만이 유일 정통 종교라고 주장하고 위와 같은 양식없는 행동을 한다면 기독교만 고립되고 인정받지 못하며 지탄을 받을 뿐이다. 절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고, 무슬림 사원에서 통성 기도를 하는 기독교인들. 종교에 대한 천착이 너무나 부족한 무늬만 종교인들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기총도 그렇고, 이랜드도 그렇고, 초대형 교회들도 그렇고, 이명박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욕심을 버리고 회개하길 바란다.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인들은 진정한 종교인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납치된 젊은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뭔가를 깨달았으면 한다.

이랜드의 교훈, 예수를 팔면 망한다

이랜드의 교훈, 예수를 팔면 망한다

예수를 팔아 돈을 번 건 비단 가롯 유다 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이 땅 한반도에는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랜드라 할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기업이라고 알려진 이랜드는 회사 내에 기도실까지 설치하여 이익 6%를 달성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1년에 헌금만 130 여억원을 낸다고 한다. 겉으로는 정말 신앙으로 똘똘 뭉친 독실한 기독교 기업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 회사는 예수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거스르고 있다.

이랜드는 비정규직법의 헛점을 이용하여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용역직으로 전환하여 비정규직을 확산하려 했다. 당연히 노조의 반발을 불러왔고 파업으로 이어졌으며 사태는 이랜드 상품 불매 운동으로까지 전개됐다. 공권력의 투입으로 노사의 대립은 파행으로 끝이 났다.

자본주의 원리로 따지더라도 이랜드는 정말 멍청한 짓을 한 것이다. 인건비를 줄이겠다고 직원들를 용역으로 전환하려 했지만, 이 사태로 인해 이랜드가 입은 피해는 줄이고자했던 비용의 몇 배가 될 것이다. 소탐대실이다. 점거 농성은 공권력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이랜드가 입은 이미지 손상은 되돌리기 힘들어 보인다. 노조의 반발과 소비자들의 불매운동도 계속될 것이다. 당장 민주노총이 이랜드 사업장 전체를 점거하겠다고 벼르고 있지 않은가.

이랜드 경영진에게 묻는다. 정말 어느 쪽이 더 이익인가? 인건비가 더 들어가더라도 노조와 화합하여 회사의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고 회사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이 더 회사에 이익인가 아니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직원들을 용역직으로 전환하고, 노조의 반발을 불러 점거농성 하게 하고, 파업하게 하고, 공권력 불러 들여 진압하게 하고, 소비자들로 하여금 불매운동을 하게 하는 것이 이익인가? 어느 쪽이 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인가? 머리가 있으면 이 단순한 계산을 1분만 해 보길 바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연행된 파업 참가자들을 다 석방하고 노조와 마주 앉아 합리적으로 협상하라. 할 수 있으면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라. 당장의 이익만을 생각하지 말고 조금만 멀리 보라. 예수를 믿는 기업이니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 조금만 묵상해 보라.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팔아 은전 30냥을 벌었지만, 그 돈을 써 보지도 못하고 자살한다. 이랜드도 지금 이런 식의 경영이라면 헌금 한 푼 낼 수 없는 처지에 몰릴지도 모른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예수처럼 살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예수는 위선자들을 축복하지 않는다. 예수를 팔면 기필코 망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조갑제를 용서할까

예수는 조갑제를 용서할까

전직 월간조선 사장이었던 극우 언론인 조갑제가 예수를 들먹이면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도덕적이라고 설교했다. 예수가 한반도로 건너와 정말 고생 많이 하신다. 위대한 시장경제론자가 되어야 하고, 이랜드의 매출과 이익도 올려줘야 하고, 사학법도 막아줘야 하고, 초대형 교회 부흥도 시켜야 하고, 서울도 봉헌받아야 하고.

백만 보 양보해서 조갑제의 말대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라 하자. 그렇다면 예수는 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매우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19:23-25]

조갑제의 말대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인데, 예수는 그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천국은 아무도 없는 텅빈 공간이란 말인가. 우리나라의 부자 낙타들 중 과연 천국의 바늘 구멍을 통과할 자가 누구란 말인가, 갑제씨.

조갑제의 의해 위대한 시장경제론자가 된 예수도 조갑제의 논리에 의하면 부도덕한 이가 되어 버렸다. 부자를 축복하지는 못할 망정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해 버린 예수는 조갑제 식으로 얘기하면 부도덕의 극치가 된 것이다. 어떤가? 자기모순 아닌가? 이명박을 구하기 위해 진정 이렇게 예수까지 팔아야 한단 말인가, 갑제씨?

내가 아는 한, 제대로 된 그 어떤 종교도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도 부처도 부자를 축복하지 않았다.

사랑의 상징 예수가 과연 조갑제를 용서할 것인가? 나는 다만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왜 이랜드의 예수는 나의 예수와 다른가

왜 이랜드의 예수는 나의 예수와 다른가

이랜드라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기업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량해고했고, 해고된 노동자들은 그에 맞서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말인데, 도대체 그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란 말인가. 이랜드는 이익 6%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한다고 한다. 정말 예수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할까.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언제나 약자 편에 섰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고, 그들의 아픔을 달래 주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세상에는 내가 알고 예수 이외에 또 다른 예수가 있나 보다.

그 또 다른 예수는 가진 자 편에서 물질의 축복을 내리며, 부자는 더 부자가 되게 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만드는 그런 예수인가 보다. 그 또 다른 예수는 비정규직은 아무 때나 해고하고 그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만드는 그런 예수인가 보다. 그 또 다른 예수는 이랜드의 예수이고, 초대형 교회 목사들의 예수이고, 사립학교 이사장들의 예수이고, 한기총의 예수이고, 재벌들의 예수이고, 서울을 봉헌하겠다던 이명박의 예수인가 보다.

팔레스타인 그 척박한 땅에서 2000년 전에 태어나 세상을 바꾸고 하나님의 나라 지상낙원을 이루고자 했던 그 예수가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땅 한반도 서울에서 그 또 다른 예수로 변신한 것인가. 천박한 자본주의를 비호하고 축복하는 예수로 전락한 것인가.

이랜드여! 당신들이 돈을 버는 것은 좋은데 제발 예수를 팔지 말라. 자본의 논리로 비정규직을 해고하더라도 예수를 들먹이지 말라. 당신들은 위선자들이고 독사의 자식들이다. 이것이 당신들의 기도에 대한 내가 아는 예수의 응답이다.

더 이상 나의 예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사랑에 대해 알고 싶으면

사랑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과 세상을 행복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이다. 단정적으로 말하지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신약 성경 고린도전서를 펼쳐보면 사도 바울이 사랑에 대해 적어 놓은 구절이 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소망하며, 모든 것을 견뎌 냅니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구절을 읽으면 된다. 그리고 행하면 된다. 이 구절만큼 명확하게 사랑을 정의한 것을 보지 못했다.

진리는 수천년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명백히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너무도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진리를 행하기는 쉽지 않다.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기총) 의 서경석 목사가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우리나라는 주님이 세우신 나라다. (중략) 21세기 위대한 도약의 기회가 왔는데, 어려운 일이 생겼다. 교육 위기다. 소련, 중국, 북한에만 있었던 강제적 사학법이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정돼 혼란스럽다. 사학법은 재개정돼야 한다. 아니 ‘악법’ 사학법은 철폐돼야 한다.”

[단식, 삭발, 낙선운동… 보수 기독교계 “사학법 재개정하라”, 오마이뉴스]

부활절에 예수가 다시 이 땅에 오신다면 이들을 보고 무어라 했을까. 짐작컨대 예수께서는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하셨을 것이다. 예수는 기독교를 만들지 않았고 기독교인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는 유대교인이다. 다만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제자들과 후세 사람들이 예수를 받들어 기독교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가. 대형교회 목사들과 보수 기독교계의 지도자라 하는 이들이 얼마나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혹시 예수를 팔아 장사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를 핑계 삼아 재물과 권력을 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이들이 예수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로 보인다. 예수로 하여금 기독교를 부인하게 만드는 사람들로 보인다.

예수는 당신들의 저렴한 입에서 회자될 그런 분이 아니시다. 예수를 욕보이지 마라. 제발.

“내 말을 듣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어라.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여라. 누가 네 뺨을 치거든 다른 뺨도 돌려 대라. 누가 네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도 거절하지 마라. 달라는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주어라. 네 것을 빼앗는 사람에게 돌려 달라고 하지 마라. 너희는 다른 사람이 네게 해 주길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너희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렇게는 한다. 너희가 만일 되돌려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꾸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대로 돌려받을 생각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며 되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의 상이 클 것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다. 너희의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워져라.

[누가복음 6:27-36]

예수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그런 기독교인이 될 생각은 없는가?

성탄절에 읽는 토마스 머튼의 기도

성탄절에 읽는 토마스 머튼의 기도

MY LORD GOD, I have no idea where I am going. I do not see the road ahead of me. I cannot know for certain where it will end. Nor do I really know myself, and the fact that I think I am following your will does not mean that I am actually doing so. But I believe that the desire to please you does in fact please you. And I hope I have that desire in all that I am doing. I hope that I will never do anything apart from that desire. And I know that if I do this you will lead me by the right road though I may know nothing about it. Therefore I will trust you always though I may seem to be lost and in the shadow of death. I will not fear, for you are ever with me, and you will never leave me to face my perils alone.

[Thomas Merton, “Thoughts in Solitude”]

당신을 기쁘게 하겠다는 바람이 사실 당신을 기쁘게 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찾아왔지만,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생일만을 즐거워했다.

부자되기를 기도하고 축원하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부자되기를 기도하고 축원하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물질적 축복을 기원하는 것은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그것을 구하러 교회나 절에 다니는 사람은 진정한 종교인이 아니다. 예수나 부처도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이다. 물질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물질이 많고 부자가 될수록 우리는 오히려 행복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가진 사람들은 왜 나누기를 거부하는가. 왜 세금조차 낼 수 없다고 항변하는가. 지금 우리 사회의 가치 전도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반증이다.

법정 스님의 잠언집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에 다다르는 길인지를 잘 알려준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애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법정, 행복의 비결]

예수님의 말씀 중에도 부자를 경계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매우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재산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매우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19:21-25]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의를 위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을 깨끗이 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마태복음 5:3-10>

예수님의 가르침 중 여덟 가지 복에 대한 부분이다. 대부분의 말씀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부분은 늘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교회의 목사도 이 부분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법정 스님의 대표산문선집인 <맑고 향기롭게>를 읽으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더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더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지식으로부터의 자유,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법정, 맑고 향기롭게, p.104>

이것은 법정 스님의 해석이 아닌 13세기 독일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풀이다.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 했다. 예수의 말씀을 스님의 책을 통해 깨닫는 것이 역설적이지만, 기실 진리는 한가지이며, 그것은 종교를 떠나 통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