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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용서

모든 것이 용서된다, 이명박이니까, 한나라당이니까

모든 것이 용서된다, 이명박이니까, 한나라당이니까

위장전입? 자식들 교육 때문에 그랬대잖아. 얼마나 자식을 사랑했으면 그랬겠어. 그럴 수도 있지. 30년 전 일을 가지고 그렇게 몰아 붙이는 거 너무 하는 것 아니야?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인가? 이명박인데, 뭐. 한나라당이잖아.

옥천 땅? 그 사람이 그래 보여도 현대건설 사장이었대. 땅 좀 살 수도 있고, 처남에게 싸게 팔 수도 있지. 돈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위장 재산이라고? 그것도 능력아닌가? 나도 위장이라도 그런 재산 좀 있었으면 좋겠다. 이명박이잖아, 한나라당이라니까.

주가조작? 이거 왜 이래. 그 사람도 젊은 놈한테 사기당한 거라잖아. 사람이 모질기는 왜 그렇게 모질어. 사기당한 사람 불쌍하지도 않어? 그런 사람한테 주가조작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맴이 워쩌컸어. 그래 보여도 경제대통령 된다잖아. 이명박이자녀.

병역면제? 아니 그 사람 폐가 안 좋았다잖아. 사람들이 도대체 왜들 이래. 폐병 환자보고 군대 댕겨 오라구? 그게 말이 되는 얘기여? 이거 다들 김대업이구만. 그 사람 그거 이길려고, 현대 들어가서 술 많이 먹었대. 감동이지 않어? 이명박이라니까.

선거법 위반? 선거 하다 보면 다 그럴 수 있는거지. 참 까칠들 하구만.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우리나라 선거법이 어디 지키라고 있는건가? 걸린 넘만 재수 없는 거여. 그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어? 이명박인데, 한나라당인데.

성추행? 남자들이 술 먹으면 그럴 수 있지, 뭐. 사람이 죈가 술이 죄지. 그리고 술집 종업원인줄 알아다잖아. 다 그렇고 그런거지. 아니 판사도 그 정도는 괜찮다고 그랬대. 한나라당이잖아.

차떼기? 아니 선거 할라면 돈 안드나? 한나라당이 조폐공사여? 돈이 드는데 돈이 없으면 기업들한테 좀 달라고도 하고 그러는 거지. 왜들 이랴? 선수들끼리. 그리고 돈 나를려면 차로 해야지. 그 무거운 것을 택배로 보낼 수도 없고, 어떡하란 말여. 한나라당이라니깐.

IMF? 나라 경영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어려울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지. 아 어떻게 맨날 팔월 한가위만 하겄어? 우리가 이해해줘야지. 잘 할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 아녀? 한나라당이자녀.

노무현? 뭐 처 20촌이 어쨌다구? 이런~ @#$%^&^$#%^& 같은 넘이 있나. 이런 $#%^&**&&^%$*@ 넘이 대통령이라니 나라 다 망했뿌렀다. 한나라당도 아닌 주제에 어디서 주둥이를 놀려 붹! 탄핵해, 선거법 위반이야!!!!!

우리는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 행복들 하신가?

조승희, 그의 눈은 너무 슬퍼 보였다

조승희, 그의 눈은 너무 슬퍼 보였다

NBC 뉴스에서 공개한 조승희의 사진을 보았다. 망치를 들고 있는 그는 극도로 위악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려 했지만, 그는 너무 슬퍼 보였다. 금방 눈물이라도 쏟아낼 듯한 그의 눈은 깊고 깊은 절망의 슬픔을 담고 있었다.

문제는 아무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는 거다. 미국 사회든, 한국 사회든. 죽기 전에 그는 그저 여학생을 추근덕거리는 스토커이자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였고, 자기를 포함한 33명의 목숨을 빼앗은 후에는 미치광이 살인마로 전락했다. 한국인들은 미치광이 살인마인 그를 부끄러워 할 뿐이었고, 언론들은 미국인들에게 행여 보복당하고 차별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세상이 자기에게 이 일을 강요했다고 생각한 그는 그 일을 저지른 후에도 영원히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세상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고, 수 많은 총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수 많은 생명들을 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절반의 책임과 슬픔은 오롯히 우리들의 몫이다.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은 우리들의 몫이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일이다. 그리고, 조승희를 용서하고 우리도 용서받는 일 뿐이다. 그를 미친 살인마라고 욕하며 그를 버린다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에게 손을 내밀며 친구가 되어 주었던들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주위를 둘러 보자. 우리가 손을 내밀어 보듬어 주어야 할 이웃이 있는지. 절망의 슬픔을 견디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지. 있다면 그들의 손을 단 한 번만이라도 잡아 주자. 그 단 한 번의 마음 씀씀이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빈다. 부디 다음 생에서는 총 없는 세상에 태어나시라. 조승희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부디 부디 다음 생에서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친구가 생기기를.

참으로 가슴 먹먹한 하루다.

합천군이 용서받을 수 있다면 바로 이 학생 때문

합천군이 용서받을 수 있다면 바로 이 학생 때문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단 열 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당하는 대목이 나온다. 단 열 명의 의인이 있었다면 여호와는 소돔과 고모라를 용서하겠다고 아브람에게 약속했다.

합천군은 전두환이라는 독재자를 낳은 땅이다. 합천군수 심의조와 일부 합천군민은 그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인물 전두환을 기념하기 위해 일해공원을 만든다고 한다. 그들의 도덕적 해이가 구약의 소돔과 고모라를 보는 듯 하다.

하지만 합천에는 나이 어린 의인이 있었다. 만약 합천군이 역사의 용서를 받는다면 바로 이 나이 어린 학생 때문일 것이다.

원경고등학교 학생 정겨울. 그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공개편지는 어른들의 부도덕함과 잘못을 꾸짖으며 합천이 살 길을 열어 놓았다.

군수님, 망월동 묘지를 가보셨는지요? 그 숱한 죽음들을 우리에게 어떻게 설명하실 수 있는지요? 군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일을 그 영령들은 어떻게 바라보실 거 같은지요? 그 가족들은 또 어떤 생각이 들겠는지요?

어린 저희도 그 정도의 도리는 알겠는데 군수님은 무슨 연유로 이런 일을 하시는지요? 군수님. 광주는 우리의 조국이 아닌지요? 군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일은 정의롭지도 않고, 오히려 지역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합천군수에게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준 정겨울 군의 역사 의식과 용기에 고마움을 표한다. 합천군수 심의조는 이 학생의 가르침에 따라야 할 것이다.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겨울 군이야 말로 합천을 구할 수 있는 진정 용기있는 어른이다.

박종철은 용서할 수 있을까

박종철은 용서할 수 있을까

20년 전 오늘, 박종철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 차가운 욕조바닥에서 저들의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으로 이어졌고 독재의 임시 항복을 받아냈다. 그가 죽은지 10년이 지난 뒤 정권은 교체되었고, 2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 너무 많이 빚졌다.

나는 그가 죽은 후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의 추모제가 열리는 명동성당에 갔었다. 해마다 추모객은 줄어들었고, 그에 비례하여 지키는 전경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올해는 명동성당에서 추모제가 열리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런 나를 그는 용서할 수 있을까.

그가 죽음으로써 지키고자 했던 선배 박종운은 지난 총선 때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기 위해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아직 그 당에는 그가 타도하려 했던 독재의 하수들이 국회의원 뺏지를 달고 있다. 그 보잘 것 없는 선배를 목숨 다하여 지킨 박종철이 숭고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 박종철은 그 선배를 용서할 수 있을까.

고문의 배후로 지목받고 있는 정형근은 아직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은 채 국회의원이 되었고, 노무현 정부를 비난하고 있다. 정형근은 정말 용서받을 수 있을까.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고, 박종철을 죽인 자들이 속한 한나라당은 하는 일 없이 반대만으로 최고의 지지를 얻고 있다. 가치관이 이렇게 전도된 우리 사회를 보고 박종철은 무엇이라 할까. 가치관 전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우리나라 신문들을 박종철은 용서할 수 있을까.

우리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를 생각하자.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살려고 했는지 기억하자. 그러면 그가 조금이라도 위로받지 않겠는가.

그의 영전에 정희성의 시를 바친다. 그의 영혼이 위로받길 기도한다.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정희성, 너를 부르며>

그에게 너무 미안한 하루다.

유영철을 죽인다면, 그럼 전두환은?

유영철을 죽인다면, 그럼 전두환은?

오마이뉴스가 유영철 사형 집행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보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범죄에 분노하고 그에 대한 사형 집행을 찬성할 만큼 그의 죄는 깊었다. 한마디로 그는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인 것이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과연 유영철을 죽임으로써 우리 사회가 얻는 것이 무엇일까, 그의 죄는 그가 죽음으로써 용서가 되는 것일까, 피해자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보면서 위로받을 수 있을까, 사형은 또다른 흉악 범죄를 예방할 수 있을까 등의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사형이란 제도는 이러한 질문에 아무런 해답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사형은 흉악 범죄를 예방할 수 없을 뿐더러 때때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기도 한다. 범죄자가 사형당한다고 해서 그가 죄를 참회한다는 증거도 없고 그가 용서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더군다나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이 위로받기도 어렵다. 피해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사형은 합법적 살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죄를 지은 자들을 죽이기보다는 그들이 지은 죄를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형 집행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비가역적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유영철의 기사 옆에서 웃고 있는 전두환의 사진을 보았다.

유영철은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감옥에 있는데, 그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전두환은 유력 정치인들의 세배를 받으며 웃고 있다. 아무리 많은 유영철들을 죽여도 한 사람의 전두환이 살아있는 한 우리 사회의 법은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아직까지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깨달음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

달라이 라마의 용서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분들이 주시는 말씀은 한결같다. 성철 스님의 법문 중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한다.

천하에 가장 용맹스러운 사람은 남에게 질 줄 아는 사람이다. 무슨 일에든지 남에게 지고 밟히는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다. 나를 칭찬하고 숭배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수행을 방해하는 마구니이며 도적이다. 중상과 모략 등 온갖 수단으로 나를 괴롭히고 헐뜯고 욕하고 괄시하는 사람보다 더 큰 은인은 없으니, 그 은혜를 갚으려 해도 다 갚기 어렵거늘 하물며 원한을 품는단 말인가? 칭찬과 숭배는 나를 타락의 구렁으로 떨어뜨리니 어찌 무서워하지 않으며, 천대와 모욕처럼 나를 굳세게 하고 채찍질하는 것이 없으니 어찌 은혜가 아니랴? 항상 남이 나를 해치고 욕할수록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나는 그 사람을 더욱더 존경하며 도와야 한다. 이것이 공부인의 진실한 방편이다.

[원택,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김영사]

이런 말씀을 접할 때마다 궁금해지는 것은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용서의 한계다. 무조건적인 용서를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내가 상식선에서 생각하고 있는 회개와 반성이 전제된 용서인지 그런 것들을 여쭤보고 싶다. 성철 스님이 1982년 부처님 오신날 주신 법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세상은 본래 구원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범인들은 알지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는다.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중국은 1950년 티벳을 침략한 이후 현재까지 티벳을 강제 점령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티벳 사람들이 당한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민족도 일제 치하 36년이라는 긴 시간을 같은 고통으로 아파했으니까.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마오쩌뚱의 ‘인간 해방’이라는 이념은 티벳 사람들에게는 구속이었고, 절망이었다. 중국이 티벳을 물리적으로 점령하고 구속할 수는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마오쩌뚱의 이념은 달라이 라마의 용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달라이 라마는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에서 중국을 진심으로 용서한다고 말한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움이나 나쁜 감정을 키워 나간다면, 내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 깨어질 뿐이다. 하지만 그를 용서한다면 내 마음은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용서는 단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는 상관없이, 세상 모든 존재는 우리 자신이 그렇듯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를 상처 입힌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용서를 베풀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스승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내면의 힘을 시험한다. 용서와 인내심은 우리가 절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힘이다.

미움은 강인함이 아닌 나약함의 다른 모습이다. 미움을 통해 얻어진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미움이나 분노를 통해서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 용서를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국가적, 국제적인 차원에서든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에 이르게 된다.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다.

<달라이 라마, 용서, 오래된 미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도 그의 제자 베드로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마태복음 18:21-22>

그렇다면, 나도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예수도, 달라이 라마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는 회개와 반성을 전제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