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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고통

고통의 시작

고통의 시작

주어진 상황을 마음속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나쁜 것’으로 명명하고 분류할 때 고통은 시작된다. 당신은 주어진 상황을 원망하고, 원망은 그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 대립하는 ‘나’를 이끌어낸다.

명명과 분류는 습관화된 것이지만 타파할 수도 있다. 먼저 작은 것부터 ‘명명하지 않는’ 연습을 하라. 예를 들어 비행기를 놓치거나 컵을 깼거나 진창에 넘어졌을 때, 그것을 ‘나쁜 것’ ‘고통스러운 것’으로 명명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의 ‘그러함’을 즉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을 나쁜 것으로 명명할 때 내면에 정신적 위축이 일어난다. 하지만 아무런 이름을 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순간 놀라운 힘이 내면에 생긴다.

<에크하르트 톨레, 고요함의 지혜, 김영사, 2004, p. 128>

괴로움의 시작은 분별심이다.

고통을 없애는 방법

고통을 없애는 방법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것이 업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십시오. 거기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느낌을 생각으로 바꾸지 말고, 판단하거나 분석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지 마십시오. 현재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십시오. 감정적인 고통이 일어나면 그것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자’로, 침묵의 관찰자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의 힘입니다. 생생하게 깨어있는 의식의 힘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십시오.

<에크하르트 톨레,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양문, 2008, p. 68>
[산티아고 순례길 11] 십자가 위의 예수

[산티아고 순례길 11] 십자가 위의 예수

순례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마을을 거치게 되는데, 어느 마을에나 성당이 있다. 아무리 작고 초라한 마을이라도 그 한가운데에는 제법 규모 있는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당은 예나 지금이나,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마을의 중심이라 할 만하다.

어느 성당이든 간에 그 성당에 들어서면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예수가 사람들을 맞이한다. 예수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십자가의 형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수는 고통의 피눈물을 흘리고 있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낀다. 예수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다는 그 전설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용서 대신 죄책감과 고통만 불러일으킨다.

예수는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져야 한다. 예수가 고통의 상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의 예수를 더 이상 숭배하면 안 된다. 그가 사람들에게 고통과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고 죽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보았던 예수들은 늘 십자가 위에 있었고, 고통의 상징이었고, 죄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예수의 가르침은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가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화신으로 부활해야 한다.

용서의 언덕을 떠난 카미노는 우르테가, 무루사발, 오바노스를 지나 아르가 강에 닿았고, 그 강에는 왕비의 다리(푸엔테 라 레이나)가 우아하게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왕비의 다리가 카미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얘기했다. 순례자들은 왕비의 다리를 건너 에스테야로 가기 전,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마을은 조용했고,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졌다. 저녁 무렵, 어느 카페 앞에서 떠돌이 악사들이 노래를 했다. 순례자들과 마을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어둠은 짙어지고 별이 떠올랐으며, 카미노의 밤은 악사들의 노래와 함께 깊어만 갔다.

우르테가로 향하는 길
우르테가로 향하는 길

고흐의 그림 같은 밀밭
고흐의 그림 같은 밀밭

오바노스의 세례자 요한 성당
오바노스의 세례자 요한 성당

알베르게에서 본 산티아고 성당
알베르게에서 본 산티아고 성당

십자가상 성당
십자가상 성당

십자가 위의 예수
십자가 위의 예수

왕비의 다리 건너기 전
왕비의 다리 건너기 전

왕비의 다리를 건넌 후
왕비의 다리를 건넌 후

아르가 강은 흐르고
아르가 강은 흐르고

거리의 악사
거리의 악사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한 제작자는 배우(俳優)라는 말을 풀어쓰면서, 한자로 배우를 나타내는 배(俳)는 사람인(人)과 아닐비(非)가 합쳐진 낱말로 “배우는 사람이 아니지만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는 엉뚱한 정의를 내렸다. 그는 이어서 배우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주로 의존한 삶을 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 비해 감수성이 아주 예민할 뿐더러 때로는 즉자적이고, 때로는 엇나간 모습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배우들은 영화나 연극 혹은 TV 연속극에서 늘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서의 연기를 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기에 때로는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헷갈릴 때도 있을 것이다. 진짜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자기를 버리고 실제로 감독이나 연출자의 지휘에 몸을 맡겨버린다. 그리고, 그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에는 자기가 아닌 그 작품 속의 인물로 살아간다고 한다. 영화 밀양에서 신애를 연기한 전도연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작품이 끝나고도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주홍글씨 촬영을 마친 이은주는 자살했다. 물론, 그 죽음이 영화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나오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배우든, 가수든 우리가 흔히 속된 말로 “딴따라”라고 부르는 광대들은 그들의 예술과 창작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그리고 행복하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삶은 순탄치 않다. 아니 행복하고 바른 광대들은 더이상 광대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의 밑바닥까지 부딪혀 보지 않고는, 그 쓰디쓴 인생의 절망을 맛보지 않고는 제대로된 광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들의 천형이라면 천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길을 간다. 한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었던 최진실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배우로서, 연기자로서, 그리고 광고모델로서 꽤나 성공한 축에 들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견뎌야했던 것들과 견딜 수 없던 것들 속에서 그는 수없이 방황했을 것이고, 그 롤러코스터 같은 삶의 끝은 그에게 너무도 갑자기 그리고 어이없게 닥쳐버렸을 것이다. 슬픔은 엄마를 그렇게 보내버린 두 아이의 몫으로 오롯이 남아버렸다. 그에게 주어진 삶이 그만큼이라는데 누굴 탓할 것인가. 최진실의 죽음은 그가 너무 유명한 스타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지만,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 35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다. 삶은 유명 배우에게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도, 돈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재벌 회장에게도 그렇게 견디기 힘들고 팍팍한 것임을, 그리하여 붓다는 삶은 고(苦)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비루하고, 고통스럽고, 쓸쓸하지만, 삶은 또 그렇게 지속된다. 스스로 세상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다음 생은 부디 편안하기를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다 행복하기를…
위로받을 수 없는 고통과 빽빽한 햇볕, 밀양 密陽

위로받을 수 없는 고통과 빽빽한 햇볕, 밀양 密陽

새끼를 잃은 어미는 (그것이 짐승이든 사람이든) 우~우~우~ 하고 운다. 그 끝이 없은 슬픔은 가슴을 파고 들어 뼛 속까지 침잠한다. 고통과 절망은 세포 속의 핵에까지 전달된다. 위로받을 수 없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새끼를 잃어 본 어미들의 고통이다. 그것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타인에게 전이될 수도 없는 그런 아픔이다. 그리고 사내들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없는 어미가 되어 본 여자들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고통이다.

위로 받을 수 없는 고통 위로 빽빽한 햇볕이 내린다. 빛이 아니라 볕이다. 빛은 보는 것이지만 볕은 느끼는 것이다.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 빽빽한 햇볕과 씨줄 날줄로 엮여 나간다.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 아픔이 볕을 받아들인다. 고통이 볕과 함께 퇴적된다.

위로하지 말고 그냥 두어 걸음 뒤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이 볕과 함께 발효될 때까지. 그 때가 언제가 될 지 기약이 없지만 볕은 계속 빽빽하게 내려쬘 것이고, 삶은 지속될 것이다.

밀양(密陽)은 Secret Sunshine 이 아니고 Dense Sunshine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