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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기억

아내와 나 사이

아내와 나 사이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이생진, 아내와 나 사이, 월간 《우리詩》, 2008>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이 말은 참 편리하고 비겁하며 비루한 말이다. 가해자로 살면서 단 한 번도 떳떳하게 사과하지 않는 자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대개 후안무치한 기회주의자일 확률이 높다. 그는 국회의원이 엘시티 사건을 청와대 민석수석실에 보고하냐고 물어도 “기억이 없다”며 실실 비웃었다. 8년 전 어느 장례식장에서 동료 여검사를 성추행하고도 “술에 취해 기억이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과드린다”며 여전히 더러운 입을 놀린다. 당연히 그런 일이 있었기에 피해자는 아직도 그때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과한다고? 이게 사람의 말인가? 그가 말한 사과는 사과가 아님을 모두가 안다. 도대체 이 자들이 가진 권력이 어떤 것이기에 이리도 비열할 수 있단 말인가. 피해자들은 단 하루도 잊을 수가 없는데, 그들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인간들을 구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피해자가 되어 봐야 그 고통과 아픔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것도 너무 큰 기대일 수 있다. 애초에 이런 인간들은 구제불능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교회에서 간증을 하면서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예수도 못할 일을 하다니,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