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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박연차

어찌하면 노무현을 버릴 수 있을까

어찌하면 노무현을 버릴 수 있을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 어느 시대든 그렇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익을 추구한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 “경제를 살려 주세요” 하면서 눈 앞에 이익에 전전긍긍한다. 오늘날 이러한 세태는 극에 달했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대부분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한 사람들 앞에서 “정의”를 말하고, “도덕”을 말하고, “상식”을 말하면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러한 것들이 밥먹여주냐고 하면서.

노무현과 같은 사람은 늘 분란을 일으킨다. 그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가치의 중요함을 깨달은 소수는 열성 지지자가 되었고, 가치가 밥먹여주냐며 비웃는 사람들은 그를 증오한다. 특히, 기득권층에게 노무현과 같은 이들은 위험하고 치명적이다. 그의 말하는 방식과 행동 방식이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과 같은 이들은 죽어야하고, 없어져야 할 존재들이다. 그래야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사회가 편안해진다.

가치를 추구한 정치인이 드물긴 했지만, 더러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다 위와 같은 이유로 암살당하거나 거세되었다. 노무현이 가치를 추구한 최초의 정치인은 아니지만, 가치를 추구한 정치인이면서 최초로 성공한 정치인이 되었다. 이것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를 살펴보아도 몇 안되는 드문 경우였다. 이 나라의 기득권층은 불안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노무현은 죽어야했다.

노무현은 친일과 군부독재의 후예들로 이루어진 기득권층뿐만 아니라 소위 진보좌파라 불리는 민주 운동권 진영에게도 참으로 불편한 존재였다.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에도 같은 당 내부에서 노무현 끌어내리기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대통령은 커녕 후보조차 되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노무현은 어느 진영에게나 환영받지 못하는 비주류였다.

문제는 아무도 노무현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노무현 지지자들이야 그렇다쳐도, 노무현을 증오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도 노무현에게 무관심할 수 없었다. 중간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순탄할 수 없었다. 언론들은 연일 노무현을 깍아내렸고, 노무현 욕하기가 국민스포츠가 되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국회는 그를 탄핵했다. 그것은 가치를 추구한 자가 성공을 했기에 치루어야하는 댓가였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노무현은 계산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진실을 말했고,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마법같이 성공했다. 반대자들에게 그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더욱더 없어져야할 존재가 되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삶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인생은 에둘러가는 것이 아니라고. 노무현의 삶은 그것을 또렷히 보여주었다. 그는 실패와 실패를 거듭했고, 수많은 위기에 쳐했었지만 그 난관을 헤쳐나갔다. 기적이었고 마법이었다. 노무현은 그 수많은 난관을 피하거나 돌아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맞섰고, 절대 꼼수나 잔머리를 쓰지 않았다. 그것이 노무현의 힘이었고, 노무현의 가치였다.

노무현의 대통령 선거 출마 연설을 기억하는가?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눈치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육백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해본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수 있는 역사를 만들수 있다.

노무현이 있었기에 노무현이 승리했기에 우리들은 떳떳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쓸 수 있었다. 그는 역사 앞에 당당하고자 했고, 그렇게 살았던 정치인이다. 저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저런 울림은 아무나 줄 수 있는게 아니다.

노무현이 돈을 받았다 한다. 가치를 말하고 가치를 위해 산 사람이라면 돈 10억에 그 가치를 팔지는 않는다. 진짜 부정부패를 하는 자들이라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같이 한다. 단돈 10억에 자기가 추구했던 삶을 버리지는 않는다. 누가 나한테 10억을 줄테니 한나라당을 지지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 돈을 받을 것인가? 나는 받지 않는다. 나같은 필부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노무현 같은 인물이 그러하겠는가.

물론 이런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번 사건으로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노무현과 검찰의 주장이 맞설 때, 누구를 더 신뢰할 것인가. 노무현과 언론 중 누구를 더 신뢰하는가. 노무현과 한나라당 또는 이명박 중 누구를 더 신뢰하는가. 답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설령 현행법 상 불법의 소지가 있다 한다면 그 응분의 댓가를 치루면 된다. 만에 하나 검찰이 노무현을 구속시키더라도 그들은 노무현을 죽일 수 없다.

노무현이 추구했던 가치, 노무현이라는 존재가 주는 의미가 퇴색하지 않는 한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접을 생각은 없다.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노무현을 버린다면, 또 그래야 한다면 나는 그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우리 현대 정치사에 노무현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너무 공허하지 않겠는가.

노무현을 버릴 수 있는 때는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노무현을 찾지 않고도 또는 노무현의 가치가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의 세상이 되었을 때이다. 그때까지 노무현은 여전히 유효하고 여전히 위대한 정치인일 것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한마디 덧붙이자면 일희일비하지 말고, 노무현이 돌을 맞을 때 그 옆에서 같이 돌을 맞으면 될 것이다. 분노할 필요도 없다. 노무현을 죽이고자 한 화살이 결국은 다 저들에게 되돌아갈 것이기에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의연하게 그를 믿고 지켜보면 된다.

잊혀지는 것과 기억해야 하는 것

잊혀지는 것과 기억해야 하는 것

세상의 모든 일이란 잊혀지게 마련이고 잊혀져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지만, 때로는 의식적으로 기억을 되살려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워낙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사회인데다 언론이라 불리는 집단들의 의도적 여론몰이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일들이 적지 않다.

올해 초, 미네르바라고 불렸던 30대 청년이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구속되었다. 인터넷 통제의 신호탄이라 불렸던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인터넷에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힘없는 네티즌을 구속할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짜 미네르바를 인터뷰하고 두 번씩이나 사람들을 속여온 “신동아”라는 잡지는 아무일 없다는 듯 넘어가면서 유독 힘없는 네티즌만을 상대로 구속 수사하는 것은 당연히 형평성에 어긋난 것이었다. 형평성? 이 말은 너무나 사치스런 말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나서 용산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철거민들의 시위에 경찰이 과잉대응하면서 벌어진 인재였다. 6명의 사람이 불에 타서 숨졌는데, 유족들은 숨진 철거민들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다. 할 줄 아는 것이 오로지 삽질 뿐인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경찰이 견찰이 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사람이 6명이 죽었는데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아무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다만, 경찰청장이 될뻔했던 사람이 물러났을 뿐이었다. 이명박은 그 사람이 아깝다고 했다.

용산참사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때마침 연쇄살인범이 잡혔다. 그리고 권력과 언론은 여론의 관심을 용산참사에서 연쇄살인범 강호순으로 돌리려고 했다. 쓰레기 언론들은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둥, 사실상 무력화된 사형제도를 부활시켜야 된다는둥 법석을 떨었다. 간교했다. 강호순 사건으로 인해 용산참사는 잊혀졌다. 죽은지 두달이 넘도록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철거민들은 여전히 눈을 감지 못했다.

권력이 강호순 사건으로 돌려막기를 시도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전두환 시절의 보도지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용산참사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이었지만, 설령 일어났다 하더라도 정부와 경찰이 사과하고 고인들과 유족들을 달래야하는 것이 상식이다. 정권은 쓰레기 언론을 통해 여론의 관심을 다른 사건으로 의도적으로 돌리려했다. 상식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상식, 도덕 이런 말들도 역시 사치였다. 강호순 사건으로 돌려막기를 했다는 상황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으로 역시 묻혀버렸다.

모든 일이 그런 식이었다. 촛불재판에 관여했다는 신영철 대법관 사건은 어떤가? 법원들의 소장 판사가 들썩였고, 대법원장까지 조사를 해야한다는 말이 나왔다. 조사 결과, 신영철 대법관이 지난 해 있었던 촛불시위 관련 재판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이 결과 발표는 사실 의외였다.) 신영철 대법관은 공직자 윤리위원회에 회부되었고, 사람들이 신영철 대법관이 곧 사퇴할 것이라 생각했다.

신영철 대법관은 한국 야구가 살렸다. 한국 야구가 극적인 승부를 벌이면서 결승까지 진출하자 사람들은 흥분하고 환호했다. 언론도 여론도 신영철이 누구? 하면서 신경도 쓰지 않는다. 신영철 대법관은 WBC 야구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었다.

우울증으로 자살한 줄로만 알았던 여배우 장자연 사건은 또 어떤가? 의외의 거물들이 연관이 되자 이 사건이 수사당국과 언론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고, 박연차 리스트가 다시 등장했다. 박연차는 정권의 곶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둘씩 빼먹는 재미. 노무현 조카 사위가 등장하는 것을 보니, 이제 보궐선거가 다가왔음을 알아채야 한다.

이 많은 일들이 불과 지난 석달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연연해하지 않는 것은 장점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늘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은 힘없는 서민이라는 사실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 대법관들이 웃을 얘기다. 이런 일들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만, 카르마는 절대 잊지 않는다는 것, 반드시 기억해야할 진리는 이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