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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부처

수행을 하는 이유

수행을 하는 이유

우리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우리도 부처님처럼 살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은 맨발에 헌 옷 하나 걸치고 나무 밑에서 자고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했지만 왕보다 행복했고, 모든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와 인생을 상담할 만큼 지혜로웠습니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았고 수천 대중과 함께 있어도 귀찮아하지 않았습니다. 숲에 홀로 있으면 정진하기 좋았고, 시끄러운 저자에 있으면 교화하기 좋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수행하기에 좋았고, 먹을 것이 많으면 베풀 수 있어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하면 인욕행(忍辱行)하기에 좋았고, 사람들이 우러러 존경하고 따르면 법을 전하기에 좋았습니다. 부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붓다의 삶입니다. 이런 붓다의 삶을 본받는 것, 붓다처럼 되는 길이 바로 수행의 길입니다.

이렇게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면 아무 가진 것이 없어도 비굴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부족한 줄을 알아서 참회하는 사람은 어딜 가더라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비굴하고 교만한 것을 버리고 당당하고 겸손한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수행자가 살아가야 할 길입니다.

<법륜, 기도, 정토출판, 2010, pp. 50-51>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1982년 부처님 오신 날, 성철 스님께서 내려 주신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법어는 불교의 핵심 진리를 담고 있다. 이 말씀만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아무 번뇌와 걱정 없이 이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불생불멸의 본래 자기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진리는 수천년 전에 완성되어 전해졌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탐욕만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일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 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성철 스님, 자기를 바로 봅시다, 1982년 부처님 오신 날 법어>
피폐해지는 블로그

피폐해지는 블로그

“티벳 사자의 서”의 저자 파드마삼바바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과거 삶을 알고 싶으면 현재 그대의 행동을 들여다보아라. 그대의 앞날을 알고 싶으면 현재 그대의 행동을 들여다보아라.

블로그의 글들이 점점 피폐해진다. 비난과 비판과 비아냥으로 가득 차 있는 글들은 내가 써놓은 것이긴 하지만 참으로 읽기 민망하다. 증오와 분노가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분노한다. 인간들의 역사가 파렴치하고 탐욕적인 자들의 농간으로 끊임없이 더럽혀져 왔다는 사실에 나는 절망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고, 간디는 암살당했다. 달라이 라마는 정치적 망명을 떠나야 했으며, 김구도 저들의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

왜 역사는 이리도 부조리하단 말인가? 왜 사필귀정은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왜 가난한 자들은 늘 그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왜 정의로운 자들은 늘 그렇게 탄압을 받아야 하는가? 수천 년 전 예수와 부처가 고민한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인간이란 구원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들이란 말인가?

블로그 글들이 피폐해지는 만큼 내 영혼도 피폐해진다. 파드마삼바바의 말처럼 현재 나의 모습은 과거와 미래의 나의 모습일 것인데, 나는 그 사실이 두렵다.

따뜻하고 소박한 글들을 쓰고 싶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원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해 보인다. 그런 나의 무기력이 슬프고, 비루하고 처참한 세상이 슬프다.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