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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깨달음

궁극의 깨달음

당신이 ‘주시자’의 상태로 직접 들어가 봄으로써만 알 수 있겠지요. 즉 순수하게 주시하고 있는 인식 속에 그냥 조용히 안식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보여질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고, 즉 자연도 아니고 신체도 아니고 상념도 아니고, 오직 그와 같이 주시하며 깨어 있는 순수한 알아차림 속에 조용히 안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러한 주시하며 깨어 있는 인식에 대한 어떤 “감(感)” – 자유감, 해방감, 거대한 팽창감 – 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상태 속에서 안식하고 있으면서 이 ‘주시자’를 거대한 팽창감으로 “감지하고” 있는 동안, 만약 그때 예컨대 당신이 산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주시자’에 대한 감과 산에 대한 감이 동일한 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자신의 순수한 ‘자기’를 “느끼고” 당신이 산을 “느낄 때” 그 둘은 절대로 동일한 느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세계는 당신에게 – 하나는 저 밖에, 하나는 이 안에 – 이중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그러한 양상으로 당신이 현재의 체험 속으로 녹아든다면 분리된 자기감은 느슨하게 풀릴 것이고, 당신은 삶에서 뒤로 주춤 물러서는 것을 멈출 것입니다. 당신이 체험을 하게 되는 게 아니고 갑작스레 당신이 곧 모든 체험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저 밖을” 바라보며 “이 안에” 있게 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안과 저 밖은 하나이고, 그래서 당신은 더 이상 “이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하여 돌연히, 당신은 심신 속에 있지 않습니다. 돌연히 심신이 탈락되어 버립니다. 돌연히 바람이 당신에게 불어오지 않고, 그것은 당신을 통하여 당신 안에서 붑니다. 당신이 산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곧 산입니다. 당신이 곧 그것이고 그래서 당신이란 존재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순간순간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이러한 전체의 찬란한 현시일 뿐입니다. 분리된 자기는 아무 곳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켄 윌버, 모든 것의 역사, 김영사, 2015, pp. 418-419>

마음의 역할

마음의 역할

마음은 몸과 영을 이어주는 고리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음 또는 지성을 붓디(Buddhi)라고 하는데, 거기서 모든 붓다(Buddhas)가 출현한다. 마음이 몸과 영을 하나로 묶는다. 마음은 영에서 직접 발출된다. 마음은 영의 첫 번째 자기표현이며, 영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마음은 몸과 영 사이에서, 영이 몸에 정착하게 하고 몸을 영으로 끌어올린다. 영으로 하여금 물질 차원에 뿌리를 내리게 하며, 몸이 영적인 차원을 향해 나아가도록 그 방향을 부여한다. 이런 마음의 작용이 없다면, 육체만으로는 어떤 감각이나 시각이나 느낌도 갖지 못한다. 영적인 성장이라는 것은 오직 자기만을 느낄 수 있는 자기중심의 육체적인 느낌에서, 마음 곧 다른 사람의 역할을 이해하고 에고를 넘어 확장하는 단계로, 그리고 세계중심의 영적인 포용의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은 인식 작용이고 마음의 작용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느껴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필요하다. 마음은 자기중심적인 느낌의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는 자각을 가져다주며, 온 우주를 껴안는 길로 엄청나게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들어 준다. 느낌과 생각과 명료한 의식(깸), 몸과 마음과 영. 여기에서 마음은 잃어버린 연결고리이다. <켄 윌버, 통합 비전, 물병자리, 2008, pp. 178-179>
영(Spirit)이란 무엇인가

영(Spirit)이란 무엇인가

영(Spirit)을 의식의 최상위 단계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다른 말로 진정한 신성 또는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라 할 수 있다. 깨달은 이들은 일관되게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깨달은 이들)은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를 마법적인 개념이나 신화적인 용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세계 밖에 있는, 또는 단순히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를 이 세계의 ‘그러함(Suchness)’이나 ‘이러함(Thusness)’ 등으로 묘사한다. 또는 모든 것이 출현하는 자궁과 같은 공(空)으로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때로는 궁극적인 지성이나 현존하는 자각 또는 무한한 의식을 암시하는 용어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것은 존재를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아는 존재 자체로서의 지성이며, 동시에 존재를 출현시키는 지성이다. 이 지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참 자아이다. 그래서 앎과 존재, 또는 주체와 객체가 비이원적인 현존 상태에서 하나로 존재하는 그런 지성이다.

그것을 ‘주체(a subject)’라고 한다면, 광대하게 열려 있는 목격자(또는 주시자), 절대적인 주관성, 대상을 공평하고 동등하게 노력 없이 자발적으로 비추는 거울 같은 마음, 모든 것을 끝없이 품으면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 충만하게 현존하는 큰 마음 등으로 표현해 볼 수는 있겠지만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주체이다.

그것을 ‘존재(Being)’라는 용어로 묘사하는 경우에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념과 느낌과 생각과 이미지에 앞서 존재하는, 그러나 존재하고 있는 단순한 느낌으로서 지금 여기에서 쉽게 접촉할 수 있는, 무엇의 그저 ‘그러함(Suchness or Is-ness)’을 의미한다.

그것을 인격적인 개념으로 묘사할 경우에는 모든 신 너머에 있는 ‘신성’, 이 순간 만물이 거기에서 출현해 나오는 ‘심연-지성(Intelligence-Abyss)’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하다. 여기서 영원하다는 것은 영구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이 없는 현재로서 언제나 현존하고 있는 무엇이라는 뜻이다.

<켄 윌버, 통합 비전, 물병자리, 2008, pp. 153-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