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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황금률

2019년 설날 가정 예배

2019년 설날 가정 예배

예전에는 유교식으로 차례와 제사를 지내다가 큰아버지가 교회 직분을 맡으신 이후로 제사 형식을 기독교 예배로 바꾸었다. 올해부터 연로하신 아버지 대신 가정 예배를 인도하기로 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제사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제사를 지낼 때의 마음가짐이다.

  1. 사도신경
  2. 찬송 (78장 참 아름다워라)
  3. 개회 기도
  4. 말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5. 기도
  6. 감사 묵념
  7. 찬송 (305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8. 주기도문

풍자와 신성모독의 충돌

풍자와 신성모독의 충돌

2015년 새해 벽두를 강타한 것은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에 대한 테러였다. <샤를리 엡도>는 모든 권위주의에 반대한다는 기치를 내세우면서 수년 전부터 이슬람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무함마드를 노골적으로 ‘풍자’하는 만평을 게재했다. 이러한 만평은 전세계 무슬림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만평가들은 끊임없는 살해 또는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 <샤를리 엡도>의 편집장 스테판 샤르보니에르는
“나는 보복이 두렵지 않다. 나는 아이도, 아내도, 차도, 신용도 없다. 약간의 허세를 보태자면, 나는 무릎꿇고 사느니 선 채로 죽겠다.”
라며 무슬림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표현의 자유’를 지켜나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015년 1월 7일, 무슬림 무장 괴한 2명에게 살해된다. <샤를리 엡도>의 만평가들은 무함마드를 포르노 배우로 묘사하며 풍자(또는 조롱)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라 여겼고, 과격파 무슬림들은 ‘신성모독’으로 받아 들였다. 무슬림들은 예언자 무함마드뿐만 아니라 인간을 형상화하는 자체를 금기시하는 전통이 있다. 그런 무슬림들에게 <샤를리 엡도>는 포르노 배우로 묘사된 무함마드를 선사했다. <샤를리 엡도>와 과격파 무슬림들은 양립할 수도 있는 ‘표현의 자유’와 ‘상대 종교 존중’이라는 두 개의 가치를 양립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는 공멸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표현의 자유’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 무슬림들에게는 죽음을 불사할 수는 있는 ‘치욕’이 되었다. ‘표현의 자유’라는 깃발 아래에서는 상대방을 모독해도 괜찮은 것인가? 아무리 신성불가침이라지만, 무함마드를 발가벗겨 놓은 것이 12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일만한 엄청난 범죄인가?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인들은 무슬림들을 규탄할 것이고, 무슬림들은 테러를 자행한 범인들을 순교자로 칭송할 것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나 공자의 황금률 밖에는 없어 보인다. ‘표현의 자유’와 ‘신성모독’을 논하기 전에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는 바로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대접해 주길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받아들여져야 하는 진리이다.
조현아가 배우지 못한 단 한 가지

조현아가 배우지 못한 단 한 가지

대한항공 전 부사장 조현아땅콩회항 사건으로 ‘슈퍼갑질’ 논란의 한복판에 섰고, 기어이 구속까지 되었다. 재벌 집 맏딸로 태어나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젊은 나이에 대한항공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던 그가 배우지 못한 것이 단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와 공자가 가르친 황금률이다.

예수는 황금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해 주었으면 하는 대로,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다.

Do to others whatever you would like them to do to you. This is the essence of all that is taught in the law and the prophets.

<마태복음 7:12>

공자도 제자가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단 한 가지를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 위령공:23>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자 태도이다. 안타깝게도 조현아를 비롯한 이 땅의 수많은 갑(甲)들은 이 원칙을 배우지 못했거나 잊어 버렸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은 갑을 관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은 사회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사회가 쉽게 올 것 같지 않다. 갑을 관계가 존재하더라도 이 땅의 갑들이 예수나 공자가 가르친 황금률을 기억하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조현아가 감옥에서 배워야 할 단 한 가지는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대접해 주길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다.

공존

공존

수천 년을 디아스포라로 살며, 쇼아까지 겪은 유대인들은 그 고난과 박해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히틀러는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유대인들은 수많은 팔레스타인들을 죽이고 있다. 나치가 저질렀던 만행을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인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해 주었으면 하는 대로,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다.

So in everything, do to others what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for this sums up the Law and the Prophets.

<마태복음 7:12>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의 조상은 아브라함이고, 그들이 섬기는 신도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신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지만, 예수가 말한 황금률은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유럽에서는 나치 이후 최악의 반유대주의가 꿈틀되고 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이제부터라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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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팔레스타인의 아이들과 여자들은 이스라엘의 공격에 피를 흘리고 있다. 그들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황금률이 사라진 종교

황금률이 사라진 종교

예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말씀과 행적들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지켜야 될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한 진리들이다. 그 진리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것을 실천하기란 만만치 않다. 황금률이라 알려진 다음의 말씀도 그 중 하나이다.

너희는 다른 사람이 네게 해 주길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 주어라.

<누가복음 6:31>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해 주었으면 하는 대로,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다.

<마태복음 7:12>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그 높은 경지를 따라갈 수는 없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이 네게 해 주길 바라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이다. 그런데, 예수가 이런 말씀을 하시기 500년 전쯤, 중국의 공자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子貢 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공이 여쭈었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논어 위령공:23>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야기되어 왔고, 기독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가르쳐왔다. 문제는 그런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고, 그 종교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의 행태이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한 목사가 “스님들이 빨리 예수를 믿어야 한다”며 설레발을 쳤다. 이런 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고, 예수를 모욕하고,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자들이다.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한 자가 대통령이 되는 나라이니, 저런 목사같지 않은 목사들이 날뛰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만약, 어느 유명한 스님이 우리나라 목사들은 빨리 부처를 믿어야 한다,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산다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면 이 땅의 개신교도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사찰마다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 아닌가.

성숙한 종교인들은 다른 이들의 종교도 부정하지 않는다. 올라가는 길은 조금씩 다르지만 (많이 다른 것도 아니다) 그 정상에서는 다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다른 이들의 종교를 부정하는 자들은 자신의 종교도 부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이고, 부처의 가르침이며, 공자의 가르침이다.

지역과 이념과 계급 갈등으로 시달려온 이 한반도에 종교 갈등이라는 또다른 갈등이 추가되었다. 불과 6개월만에 이 나라는 끝모를 나락으로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다.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라 놀랍지도 않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다시 희망을 세워나가냐는 것이다. 절망이 깊어지면, 다시 희망이 찾아 올 것인가.